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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레민 Jul 02. 2024

<화장>, 김훈

삶과 죽음으로의 화장

20 년 전 나는 28회 이상 문학상 대상 수상작을 쉽게 읽지 못했다.
그때 정미경의 <발칸의 장미를 내게 주었네>가 하성란의 작품과 함께 우수작이었다
내가 좋아하는 작가는 대상의 김훈보다 우수작 수상 작가들이었다.

대상 수상작

<화장>의 첫 문장 "운명하셨습니다." 어찌나 강렬했던지 다음으로 이어지는
날 것 같은 서사에 차라리 죽음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 당시 나는 대상 수상작을 넘기고 다른 우수작을 읽었던 것 같다.
나중에 <화장> 이 안성기 주연으로 영화화되었을 때도 보지 않았다.
시간이 지나 소설 속 작중 화자와 비슷한 나이에 이르러 읽게 되었고
오늘 다시 읽은 김훈의 소설은 관념적이면서 현실적이고 현실적이면서 비일상으로 읽힌다.

그는 국내 굴지의 화장품 회사 상무다.
2년 여 걸친 아내의 뇌종양 투병을 지켜보며 삶과 죽음의 이면을 바라본다.
남편으로서의 그의 시선은 너무나 냉철하고 건조한 관찰자의 모습이다.
나는 이 부분이 제대로 고통스러웠다.
간병인이 아내를 씻길 때의 적나라한 표현이 견딜 수 없었고
그가 아내의 토사물과 배설물로 악취 풍기는 몸을 씻어줄 때의 상황과
약해진 괄약근이 열리는 바람에 다시 쏟아지는 배설물을 말할 때 나의 후각도 열리는 듯했다.
종양이 다시 재발했을 때는 그만 죽기를 바랐다.
그것만이 사랑이었다는 말은 진심이었을 거다.
오래고 가망 없는 병시중에 피로감이 극에 달하고 그 역시 전립선염을 앓고 있다.

아내가 죽은 날 아침에도 근처 비뇨기과를 찾아 도뇨관을 통해 오줌을 빼낸다.

한편 그는 회사에 새로 입사한 젊은 여직원에게 연정을 갖는다. 
추은주를 처음 보았을 때 "살아 있는 것은 저렇게 확실하고 가득 찬 것이로구나"
그는 늘 마음속으로 추은주에게 말을 건다.
무슨 일이 있는 건 아니다. 혼자만의 경어로 하는 말.
죽어가는 아내와 살아있는 추은주 사이를 이성으로 오간다.
아내는 '삭정이처럼 드러난 뼈대로 다만 숨을 쉬고 몸은 검불처럼 가벼우며
마른 뼈 위로 가죽이 늘어져서 겉돌았다.'
반면 추은주에게는 '당신의 둥근 어깨와 어깨 위로 흘러내린 머리카락과
그 머리카락이 당신의 두 뺨에 드리운 그늘은 내 눈앞에서 의심할 수 없이 뚜렷하고 완연했다'라고.

화장품 회사의 상무로서,
아내의 죽음을 맞이한 그는 장례가 진행되는 와중에도 회사의 광고를 맡아야 하고 남편 따라 해외로 

가게 된 추은주의 사직서를 결재해야 한다.


엄연하고도 가차 없는 현실이다.
장례 절차로서의 화장과 화장품 회사에서의 임원으로서의 역할
<화장>이라는 '동음이어'를 제목으로 쓴 저자.
지극히 김훈 답다고 생각되었다.

그의 글은 시작과 끝, 삶과 죽음, 정과동 등이 항상 한 문장에 같이 한다.
이를테면 이런 식, 생각나는 대로 감히 흉내 내 보자면
죽음이었으나 동시에 삶이었다.
어둠으로 가는 환한 길.
시작과 함께 끝났다.
고요는 소란했다.
젊었으므로 늙어가고 있었다
충성이지만 다른 시선으로 보면 배신이다.

역설이지만  반어적 강조 효과이며 종당 같은 의미다.


여기서 화장이란 단어도 마찬가지다.

아내의 장례 기록과 젊은 여직원에 대한 연모의 기록이 교차하면서

삶과 죽음은 함께 가는 길이고 아내의 병듦과 추은주의 건강이 계속대비된다.
죽음으로서의 화장이며 삶으로서의 화장이기 때문이다.
현실은 냉혹하다.

죽음을 바라보면서도  나아가야 할 삶이 있기에.

아내의 장례를 마치고 회사업무 광고 컨셉이 잡히자 그는 모처럼 깊이 잠든다.

'모든 의식이 허물어져 내리고 증발해 버리는, 깊고 깊은 잠이었다.'로 맺는다.

나는 다시 첫 문장이 떠올랐다.

"운명하셨습니다."

삶과 죽음은 동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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