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 골라낳는 시대...우생학의 부활인가
미국의 한 스타트업이 ‘건강하고 똑똑한 아이를 골라 낳을 수 있다’는 서비스를 내놓으면서 전 세계적으로 뜨거운 논란이 번지고 있다.
이 스타트업의 이름은 ‘오키드 헬스(Orchid Health)’로, 체외수정(IVF)으로 만들어진 배아의 유전체를 분석해 특정 질병의 발생 가능성을 예측해주는 서비스를 제공한다. 겉보기엔 유전 질환에 대한 사전 예측이라는 의학적 진보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그 배아들 중 더 건강하고, 더 우수한 유전적 형질을 가진 것을 ‘선택’할 수 있도록 유도한다는 점에서 윤리적 비판이 거세다.
이 회사는 ‘배아 리포트(Embryo Report)’라는 분석 결과를 통해, 각 배아가 향후 발병할 가능성이 높은 질병—예를 들면 신경 발달 장애, 심장 질환, 암, 알츠하이머병 등—을 미리 예측한다고 말한다. 기존에도 다운증후군 같은 단일 유전 질환에 대한 위험 분석은 있었다. 오키드 헬스는 유전체 전체를 분석해 다중 위험 요인을 통합적으로 평가한다는 점에서 훨씬 더 포괄적이다. 이 기술을 통해 부부는 여러 개의 배아 중에서 ‘가장 건강할 가능성이 높은’ 수정란을 선택해 이식할 수 있다.
이러한 기술이 실제로 인간의 출생에 적용되고 있다는 사실도 충격을 더한다. 일본의 유명 테크 재벌 CEO 자녀들 중 일부가 이 서비스를 통해 태어난 것으로 알려지면서, 이른바 ‘현대판 우생학’이라는 우려가 현실이 되었다는 반응이 나오고 있다. 이 서비스가 단순히 질병을 피하는 차원을 넘어, 더 똑똑하고 더 우월한 유전형을 선호하게 만드는 선택 도구가 될 수 있다는 점에서 논란은 더욱 깊어진다.
과학계 일각에서는 이 기술이 현실화될 경우, 영화 <가타카>에서 묘사되던 ‘유전 정보에 따라 사회적 서열이 결정되는 세상’이 도래하는 것 아니냐는 우려도 제기된다. 오키드 헬스의 공동 창업자는 “더 나은 인간을 설계할 수 있다”는 발언까지 하며 논란을 부채질했다. 실제로 미국에서 체외수정 1회당 평균 비용이 약 2만 달러(한화 약 2800만 원)에 이르는데, 여기에 배아 유전체 분석 비용으로 2500달러(약 350만 원)를 추가로 부담해야 하기에, 이 기술은 오직 일부 부유층만이 접근 가능한 영역이라는 비판도 제기된다.
더욱 우려되는 건 분석 결과에 따라 특정 배아가 건강하지 않을 가능성이 있다면, 그 배아를 폐기하는 결정이 이루어질 수 있다는 점이다. 질병의 ‘가능성’이라는 통계적 위험을 근거로 생명의 탄생을 거를 수 있다는 사실은 인간 존엄성과 생명윤리에 대한 깊은 질문을 던진다.
과학자들 역시 이 서비스의 과학적 정밀성과 해석 방법에 강한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스탠퍼드대 안켈로 스탠퍼드 교수는 “5%의 세포만으로 모든 유전체를 예측하는 것은 매우 불완전하다”며, “심각한 부정확성과 오용 가능성이 존재한다”고 지적한다. 특히 유전자의 발현은 환경, 후성 유전, 우연 등 수많은 요인에 의해 영향을 받기 때문에, 특정 유전자를 지녔다고 해서 그 아이가 반드시 특정 질환에 걸리거나 특정 능력을 가질 것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기술은 이미 현실이 됐다. 부모가 유전적으로 ‘우수해 보이는’ 아이를 선택해 출산하는 일이 가능한 시대, 그리고 선택받지 못한 배아가 폐기되는 시대는 더 이상 과학소설 속 이야기만은 아니다. "건강하고 똑똑한 아이"를 고르는 이 기술은 진화된 의학이자 동시에 퇴행하는 윤리 사이에서 오늘도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하고 있다.
우생학과 신자본주의
21세기 중반, 인류는 다시 우생학이라는 금단의 문 앞에 서 있다. 다만 이번에는 흰 가운을 입은 국가 권력이 아닌, 스타트업과 벤처 캐피탈의 손에 의해 문이 열리고 있다. 과거의 우생학이 인종이나 계급의 이름으로 ‘열등한 유전자’를 제거하려 했다면, 지금의 우생학은 유전자에 값을 매기고, 돈을 통해 그 가치를 선택하게 만든다. 이른바 ‘신자본주의적 우생학’이다.
미국 스타트업 오키드 헬스가 제공하는 배아 유전체 분석 서비스는 이런 흐름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이 서비스는 체외수정으로 얻은 여러 개의 배아 중에서 더 건강하고, 더 똑똑하고, 더 오래 살 가능성이 높은 배아를 골라주는 기능을 한다. 선택은 부모가 하지만, 기준은 유전체 알고리즘이 정한다. 질병 발생 가능성 점수, 인지 능력 예측, 외모와 수명까지, 생명은 이제 확률과 순위표 위에서 경쟁을 시작한다.
이러한 시스템은 우생학과 신자본주의의 두 축이 교차하는 지점에서 작동한다. 첫째, ‘선택’이라는 이름 아래 인간의 가치를 서열화한다는 점에서 이는 분명한 우생학이다. 선호되는 유전자형, 회피되는 유전자형이 존재하고, 사회는 점차 ‘기준에 부합한 아이’를 낳는 쪽으로 기울게 된다. 이는 곧 어떤 생명이 ‘더 낫다’는 가치 판단으로 이어지고, 생명은 더 이상 고유한 존재가 아니라, 설계되고 편집될 수 있는 제품이 된다.
둘째, 이 선택은 자본의 힘에 의해 작동한다. 체외수정과 유전자 분석을 모두 포함하면 한 번의 시도에 수천만 원이 들고, 이는 상위 10%의 부유층만이 감당할 수 있다. 결과적으로 이 기술은 생명조차 불평등하게 만든다. 더 부유한 가정은 더 건강하고 우월한 조건의 아이를 선택할 수 있는 반면, 그렇지 않은 가정은 단지 주어진 대로 아이를 낳는다. 그렇게 출발선부터 차이가 나는 구조가 생기고, 그 구조는 다시 다음 세대로 되물림된다.
우생학은 원래 ‘좋은 유전자를 퍼뜨려 인류를 개선한다’는 명목으로 시작되었지만, 역사 속에서는 늘 차별과 배제의 도구가 되었다. 20세기 초 나치 독일과 미국 일부 주에서는 ‘열등한 유전자’를 가진 이들의 강제 불임 시술까지 있었다. 오늘날의 배아 유전체 분석은 그런 폭력성을 표면에 드러내지 않는다. 대신 친절한 리포트와 알고리즘 점수, 그리고 부모의 자유로운 ‘선택’이라는 말로 포장된다. 하지만 결과는 같다. 생명은 다시 선별되고, 생명의 위계는 다시 매겨진다.
문제는 이 흐름이 기술 발전이라는 이름으로 정당화되고 있다는 것이다. 생명 윤리학자 마이클 샌델은 “완벽함을 추구하는 기술은 인간의 조건 자체를 무너뜨린다”고 경고했다. 인간은 본래 불완전하고 예측 불가능하며, 그 다양성이야말로 문명과 공존의 핵심이었다. 그러나 지금, 생명조차 ‘옵션’이 되어가고 있다.
이 기술은 또 하나의 질문을 남긴다. 우리는 과연, 어떤 인간을 원하는가? 더 건강한 인간인가, 더 경쟁력 있는 인간인가, 아니면 우리가 통제 가능한 인간인가? 그리고 그 선택의 기준은 누구의 것이며, 그 책임은 누가 질 것인가?
우생학과 신자본주의가 맞물릴 때, 생명은 ‘상품’이 되고, 출산은 ‘선택’이 되며, 미래는 ‘기획’이 된다. 우리는 그 문턱에 서 있다. 문제는, 우리가 그 문을 ‘알면서’ 열고 있다는 사실이다.
AI와 유전자 편집 기술
21세기 생명공학은 단순한 치료의 시대를 넘어, 생명을 설계하고 재구성하는 시대로 접어들고 있다. 그 중심에는 두 가지 기술이 있다. 하나는 유전자를 직접 고치는 분자 가위, 즉 유전자 편집 기술이고, 다른 하나는 그 편집을 지능적으로 계획하고 제어하는 인공지능(AI)이다. 이 둘의 결합은 인간이 자신의 유전자를 읽고, 해석하고, 수정하는 능력을 갖게 된 역사상 첫 순간을 의미한다.
유전자 편집 기술 중 가장 혁신적인 것은 단연 CRISPR-Cas9이다. 2012년 등장한 이 기술은 특정 유전자를 정밀하게 잘라내거나 대체할 수 있어, 희귀 유전 질환이나 암, 실명, 면역질환 등의 치료를 가능하게 만들었다. 특히 2023년에는 CRISPR 기반 치료제 ‘Casgevy’가 미국과 영국에서 정식 승인되면서, 이 기술이 실제 인간 치료에 적용된 첫 사례로 기록됐다. 그러나 편집 과정에서 의도하지 않은 부위를 손상시키는 ‘오프 타깃 효과’ 문제나, 편집된 유전자가 후세에 어떤 영향을 끼칠지 아직 알 수 없다는 불확실성은 여전히 크다.
여기에 AI가 들어오면서 상황은 급변하고 있다. CRISPR가 도구라면, AI는 그 도구를 사용하는 지휘관이다. 수십억 개 염기쌍으로 구성된 유전체에서 원하는 타깃을 찾아내고, 잘라낼 위치를 정하며, 부작용 가능성을 계산하는 일은 인간의 직관으로는 불가능하다. 하지만 AI는 그것을 해낸다. 딥러닝 기반 모델은 특정 질병과 관련된 유전자를 예측하고, 편집할 RNA를 설계하며, 최적의 조합을 도출하는 데 쓰인다. 구글 딥마인드의 알파폴드(AlphaFold)는 단백질 구조를 예측해 유전자 기능을 해석하는 데 기여하고 있으며, 오픈CRISPR나 벤치링(Benchling) 같은 기업은 유전자 실험을 설계하고 자동화하는 플랫폼을 제공하고 있다. 이제 유전자 편집은 실험이 아니라 계산이 되고 있다.
AI와 유전자 편집 기술이 결합하면, 유전자의 ‘설계’는 훨씬 더 정교해진다. 인간의 유전체 전체를 AI가 실시간 분석해, 맞춤형 치료는 물론 태아 단계에서의 유전 질환 제거, 심지어는 근육 발달이나 학습 능력 같은 기능 강화 영역까지 접근이 가능해진다. 예를 들어 배아 유전자 분석 서비스에 AI 알고리즘을 적용하면, 여러 개의 배아 중 가장 건강하고, 가장 장래가 유망한 유전형을 가진 것을 ‘선택’할 수 있다. 이는 단순한 질병 예방이 아니라, 사실상 인간 디자인의 시작이다.
물론 이 기술은 무한한 가능성과 함께 거대한 윤리적 파문을 몰고 온다. AI가 특정 유전자를 '선호'하고, 특정 유전자를 '위험'하다고 판단할 때, 그 기준은 누가 정하며, 그 판단은 누구의 이익을 위한 것인가? 또한 유전자 편집은 치료를 넘어 ‘강화(enhancement)’로 가고 있다. 이는 결국 우생학적 선택으로 이어질 수 있다. 자본이 이 기술에 접근할 수 있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을 나누고, 일부 계층만이 ‘더 우수한’ 유전자를 선택할 수 있게 된다면, 생명 자체가 시장의 질서에 종속되는 시대가 도래하는 셈이다.
현재도 국가마다 규제의 정도는 천차만별이다. 미국과 영국은 소페틱 셀(somatic cell), 즉 체세포 편집에 한해 제한적 허용을 하지만, 생식세포(germline)의 편집은 대부분 금지하고 있다. 반면 일부 무규제 국가에서는 생식세포 편집 시도까지 감행되고 있으며, 기술 수출을 통해 편법적인 유전자 디자인이 이루어질 가능성도 제기된다.
결국 AI와 유전자 편집의 결합은 인간이 처음으로 자기 자신을 ‘업그레이드할 수 있는 종(種)’이 되었음을 의미한다. 이는 과학의 승리일 수도, 윤리의 몰락일 수도 있다. 선택은 기술이 아니라, 우리가 어떤 인간을 원하는가에 대한 철학적 결단에 달려 있다. 생명이 데이터를 따라 움직이는 이 시대, 그 데이터를 누가 해석하고 결정할 것인가. 인류는 지금, 과학의 최전선에서 근본적인 질문과 다시 마주하고 있다.
우생학의 역사적 사례들
우생학은 더 나은 유전자를 선택하고 열등한 유전자를 제거함으로써 인류를 향상시킨다는 생각에서 출발했지만, 실제 역사 속에서 그것은 과학의 탈을 쓴 폭력과 차별의 언어로 작동해왔다. 1883년 프랜시스 골턴이 처음 ‘유전적 개량’이라는 뜻의 우생학(eugenics)을 제시한 이후, 이 개념은 전 세계 수많은 국가에서 정책과 법률의 형태로 채택되었고, 그 결과 수십만 명의 인간이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생식 능력을 박탈당하거나, 목숨을 잃거나, ‘비정상’이라는 낙인 아래 존재를 부정당했다.
그 시작점은 미국이었다. 1907년, 인디애나주는 세계 최초로 우생학적 강제 불임법을 통과시켰고, 이후 무려 30여 개 주가 유사한 법을 제정했다. 이 법의 대상은 지적 장애인, 정신질환자, 범죄자, 빈곤층, 그리고 ‘도덕적으로 부적절하다’고 여겨지는 여성들까지 포괄했다. 캐리 벅(Carrie Buck)이라는 여성이 대표적인 희생자다. 그녀는 지적장애가 있다는 이유로 강제로 불임 수술을 받았고, 1927년 연방대법원은 ‘버크 대 벨(Buck v. Bell)’ 사건에서 이 조치를 합헌이라고 판결했다. 당시 대법관 올리버 홈스는 “세 세대의 바보는 충분하다(Three generations of imbeciles are enough)”라는 말을 남기며 우생학적 폭력에 정당성을 부여했다. 이 판결 이후, 미국 전역에서 최소 6만 명 이상이 본인의 동의 없이 불임 수술을 당했다. 그 정책들은 대부분 1970년대 말까지 유지되었고, 일부 주 정부는 2000년대가 되어서야 뒤늦은 사과를 발표했다. 특히 충격적인 사실은 아돌프 히틀러가 나치 독일의 우생학 정책을 설계할 때 이 미국 모델을 직접 참고했다는 것이다.
독일은 우생학을 단순한 이론이 아닌 국가 이데올로기로 승화시킨 대표적 사례다. 나치 독일의 히틀러는 ‘순수 아리안 민족’을 만들기 위해 ‘열등 유전자’를 제거해야 한다고 믿었고, 그 믿음은 현실에서 참혹한 결과를 낳았다. 1939년부터 1945년까지 진행된 ‘T4 프로그램’은 정신질환자, 장애아동, 노약자를 포함한 약 27만 명을 병원과 요양소에서 조직적으로 살해한 국가 주도 살인 프로젝트였다. 가스실을 통한 살해 기술은 바로 이 프로그램에서 처음 사용되었고, 이후 유대인 학살로 이어지는 아우슈비츠 시스템의 실험장 역할을 하게 된다. 또 하나의 프로그램인 ‘레벤스보른(Lebensborn)’은 우수한 유전자를 가진 독일 남성과 여성의 출산을 장려하고, 북유럽 점령지에서 독일군과 현지 여성 사이에 태어난 아이들을 독일로 강제 송환해 아리안화 교육을 실시한 프로젝트다. 이 아이들은 부모로부터 영구 분리되어 독일화 되었고, 그 숫자는 수천 명에 이르렀다.
일본 역시 우생학에 깊이 관여한 국가 중 하나다. 1948년 제정된 ‘우생보호법’은 유전병, 정신질환, 지적장애 등을 이유로 불임수술과 낙태를 허용했으며, 이는 무려 1996년까지 유지되었다. 이 법 아래 약 1만6000명 이상이 본인의 동의 없이 불임수술을 당했고, 지금도 그 보상 문제를 놓고 논란이 지속되고 있다. 식민지 조선에서도 조선인을 ‘열등한 유전형’으로 규정하려는 우생학적 연구와 논문이 다수 작성되었으며, 식민지 정책 전반에 우생학적 사고방식이 영향을 끼쳤다.
스웨덴은 1934년부터 1976년까지 6만3000건 이상의 강제 불임 시술을 시행했고, 1999년에야 공식 사과를 발표했다. 캐나다 알버타주는 1972년까지 강제 불임 정책을 유지했고, 중국은 1990년대 한 자녀 정책 하에서 장애 태아 낙태 유도나 소수민족 대상 출산 제한 정책을 시행했다.
그리고 이제, 우리는 과거의 우생학을 떠올리게 하는 현대판 기술들과 마주하고 있다. 배아 유전체 분석, 디자이너 베이비, 인공지능이 선호하는 유전형을 골라주는 생명 선택 알고리즘은 새로운 형태의 우생학으로 떠오르고 있다. 형태는 달라졌지만, 본질은 크게 다르지 않다. 여전히 어떤 생명은 선호되고, 어떤 생명은 배제되며, 과학이라는 이름 아래 인간의 존엄은 계량화되고 서열화되고 있기 때문이다.
주요 종교의 관점에서 본 우생학
기독교, 이슬람 등 주요 종교는 우생학 문제를 창조와 인간 존엄성의 원칙에 비추어 비판적으로 바라보고 있으며, 그 배경에는 각 종교마다 생명, 결혼, 공동체에 대한 사상이 깊게 자리 잡고 있다.
우선 가톨릭 교회는 생명은 신의 형상(Imago Dei)으로 창조된 것이기에, 어떤 인간도 다른 이의 가치를 기준으로 선별되거나 제거되어선 안 된다고 본다. 1930년 교황 비오 11세는 회칙 『Casti connubii』에서 명확히 우생학을 비판하며 “국가는 인간의 몸에 직접 손댈 권리가 없으며, 가족의 신성함을 훼손해서는 안 된다”고 선언했고, 이후 가톨릭 학자들과 의사들—예를 들어 예수회 신학자 René Brouillard—도 “강제 불임은 절대 혐오스러운 것”이라고 규탄했다. 이러한 가톨릭의 입장은 생식과 가족, 생명의 고귀함을 핵심 가치로 보는 전통에 기반한다. ‘부정적 우생학’이라 불리는 강제적·선별적 불임·살생 행위는, 신이 부여한 생명의 고유 가치를 침해하는 일이며, 가족보다 국가 권력이 우선하는 사고는 결코 용납될 수 없다는 것이다.
개신교, 특히 미국의 주류 교파에서는 20세기 초반 일부 성직자가 우생학을 찬성하는 발언을 하기도 했다. 예컨대 1926년 미국 ‘Eugenics Sermon Contest’에는 목사들이 “가정의 혈통과 국가의 건강을 위한 우생학 설교”를 경쟁하듯 발표했고, 몇몇 목회자 가족은 ‘Fitter Family’ 대회에서 우생력을 자랑하기도 했다. 그런데 시간이 흐르며 교회 내에서는 생명을 상품처럼 보는 접근에 대해 비판적 견해가 확대되었고, 현대 개신교 학자들은 ‘새로운 우생학’—맞춤형 유전자 선별이나 강화 기술—이 시장 중심적으로 확산되고 있다며, 이는 인간 본성과 개인의 존엄성을 왜곡할 위험이 있다고 지적한다.
이슬람 문화권에서는 유전적 특성을 고려한 배우자 선택이 일부 전통 하디스(hadith)에도 언급된다는 점에서, 이론상 ‘우생학적 사고’와 유사성이 지적된다. 그러나 현대 이슬람 학자들은 이러한 전통적 고려와, 인위적 유전자 개입이나 배아 선별, 강제적 조치는 구분해야 한다는 입장에서, 후자는 샤리아에 위배된다고 본다. 즉 인간의 창조는 신이 결정한 것으로, 인간이 스스로 설계를 핑계 삼아 생명을 조정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유대교에서도 근본적으로 생명을 신성한 선물로 받아들이며, 불필요한 개입을 경계한다. 역사적으로 아이를 갖지 못한 부부도 축복으로 여겨왔고, 유대교율법에서는 ‘동의 없는 몸의 개조’를 철저히 금지한다. 비록 직접적인 성직자의 발언 출처는 제한적이지만, 유대교 전통은 생명 존엄과 윤리적 책임을 강조하며 우생학적 선별과 착취적 상업화를 강력히 경계한다는 점에서 가톨릭 및 이슬람과 맥을 같이한다.
우생학에 대한 각 종교의 관점은 다음과 같이 정리된다. 가톨릭은 생명은 신의 형상이며, 국가나 시장이 결정할 수 없다고 본다. 『Casti connubii』로 공식 비판했고, 강제 불임 및 유전자 선택은 “절대 혐오스러운” 행위다. 개신교는 20세기 일부 찬성 발언이 존재했지만 현대에는 ‘새로운 우생학’에 우려를 표명하고 있으며, 인간 존엄과 창조 원리에 반한다는 목소리가 증가하고 있다. 이슬람은 전통적 배우자 선택에 유전 고려가 존재하긴 하나, 인위적 개입은 창조 질서를 혼란시켜 샤리아 위배로 배격한다. 유대교는 동의 없는 신체 개조를 금지하고, 생명은 축복으로 여겨지며, 우생학적 상업화와 선별은 전통적 윤리와 충돌한다.
이처럼 생명과 창조, 가족의 고귀함을 핵심 가치로 삼는 주요 종교들은, 시대와 문화가 바뀌어도 우생학의 본질—인위적 선별과 생명 조작—에 대해 공통적으로 비판적 태도를 유지하고 있다. 지금 우리가 ‘배아 분석, 유전자 선택, 강화 AI’ 같은 기술에 직면했을 때, 이 신앙 공동체들의 오래된 윤리적 지침은 여전히 중요한 이정표가 된다.
우생학이 꼭 필요하다는 주장들
생학은 오랫동안 차별과 폭력의 상징으로 비판받아왔지만, 일부 영역에서는 여전히 우생학적 접근이 불가피하다는 주장이 꾸준히 제기되고 있다. 이들은 우생학을 단순한 생명 선별이 아니라, 공공 보건, 사회복지, 과학기술의 진보라는 맥락에서 바라보며, 그 필요성을 세 가지 큰 관점—질병 예방의 효율성, 유한한 의료 자원의 배분, 유전 질환의 근본적 제거 가능성—으로 설명한다.
첫째, 가장 흔한 주장은 유전병 예방과 의료비 절감에 대한 것이다. 선천성 유전 질환, 예를 들어 헌팅턴병, 낭포성 섬유증, 겸상적혈구병 같은 경우는 출생 전에 유전자 검사로 예측이 가능하며, 한 번 발병하면 평생 동안 고통과 막대한 치료비를 감수해야 한다. 따라서 부모가 사전에 배아 유전체 정보를 통해 특정 유전병 보인자를 가진 배아를 제외하고 건강한 배아를 선택한다면, 아이는 질병으로부터 자유롭게 태어날 수 있고, 그에 따른 개인적 고통과 사회 전체의 의료비 지출 또한 줄일 수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이스라엘, 싱가포르, 사우디아라비아 등 일부 국가는 이미 지중해빈혈 같은 유전 질환에 대해 결혼 전 유전자 검사와 상담을 법적으로 의무화하고 있으며, 이를 통해 질환 발생률을 효과적으로 줄였다는 평가도 있다. 이 주장에 따르면, 질병 가능성이 높은 생명을 걸러내는 것은 잔인해 보일 수 있지만, 평생을 병으로 살아가야 할 생명에게는 오히려 연민의 선택일 수 있다는 논리가 뒷받침된다.
둘째, 생명윤리보다는 사회윤리를 중심에 두는 관점에서도 우생학은 현실적인 선택지로 제시된다. 모든 생명은 고귀하지만, 그 생명이 사회 속에서 살아가기 위해 필요한 자원은 유한하다는 인식에서 출발한 주장이다. 특히 의료 자원이 부족한 국가나 복지 체계가 한정된 환경에서는, 중증 유전 질환이나 희귀질환을 가진 아동 한 명에게 수십억 원에 달하는 의료비와 돌봄 복지 비용이 지속적으로 투입된다. 이 구조가 반복되면 건강한 다수에게 돌아가야 할 자원은 점점 줄어들고, 사회 복지의 형평성은 심각하게 훼손된다는 것이다. 이들은 어떤 생명을 선택하지 않는 것이 반드시 차별이라고만 볼 수는 없으며, 오히려 사회 전체를 위한 구조적 조정이자, 지속 가능한 복지 체계를 위한 불가피한 선택일 수도 있다고 주장한다. 다시 말해, 생명을 비용으로만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그 생명이 한 사회 안에서 함께 살아가기 위해 필요한 실질적인 책임과 부담을 고려해야 한다는 것이다.
셋째, 인간 유전자에 대한 진화적 개입이 필요하다는 과학기술 중심의 주장이 있다. 생물학적 진화는 너무 느리고 비효율적이며, 질병을 극복하거나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기에 충분치 않다는 점에서, 유전자 편집 기술은 인류가 자기 자신을 스스로 개선할 수 있는 도구로 여겨진다. 특히 CRISPR 기술은 특정 유전 질환을 원천적으로 제거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인간이 처음으로 자신의 진화를 설계할 수 있는 시대를 열었다. 2023년 미국에서 승인된 겸상적혈구병 치료제 Casgevy는 단 한 번의 유전자 편집으로 질병의 근본 원인을 제거하는 데 성공했으며, 이는 치료의 개념을 넘어 예방과 설계의 가능성으로 확장되고 있다. 이 기술을 출산 전에 적용해 건강한 개체만을 선택한다면, 미래 세대는 유전적 질병으로부터 훨씬 자유로울 수 있으며, 이는 곧 사회 전체의 유전적 건강성도 향상되는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는 것이다. 일부 트랜스휴머니즘 철학자들은 인간의 능력을 향상시키는 방향까지 포함해 우생학을 다시 바라보며, 기억력, 면역력, 감정 조절 능력 같은 기능을 유전적으로 강화한 인간이 미래에는 필요할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들에게 우생학은 생명에 대한 차별이 아니라, 진화의 새로운 방식이다. 우리는 더 건강하고 우수한 인류를 설계할 수 있는 최초의 세대이며, 그 기회를 왜 포기해야 하느냐는 반문이 따라붙는다.
이러한 주장은 단지 이론에 머무르지 않고 실제 제도와 정책으로도 현실화되고 있다. 아이슬란드는 출산 전 다운증후군 유전자 검사를 통해 대부분의 양성 반응 태아가 낙태되면서, 사실상 다운증후군 아기가 태어나지 않는 국가가 되었다. 중동 지역 일부 국가에서는 결혼 전 유전자 검사가 혼인 허가의 조건이 되었으며, 중국 일부 지역에서는 장애 태아에 대한 선별 시스템이 실질적으로 작동 중이다. 미국과 유럽에서는 배아 유전체 분석 기술이 의료 기관을 통해 상업적으로 제공되고 있고, 이를 통해 부모는 자신이 원하는 배아를 선택할 수 있다.
물론 이런 주장들에 대해 반론도 존재한다. 반대 측은 이렇게 묻는다. 그 ‘선택’을 누가 하는가? 무엇이 ‘좋은 유전자’인가? 생명을 비용으로 환산할 수 있는가? 그 논리는 과거 우생학과 무엇이 다른가? 기술이 아무리 정밀하고, 윤리적으로 포장된다 하더라도 기준의 문제, 선택권의 집중, 차별의 정당화 가능성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라는 것이다. 지금 ‘질병 예방’이라는 명분으로 시작된 기술이 시간이 지나면 지능, 외모, 능력이라는 더 주관적이고 사회문화적인 기준으로 확장될 가능성 또한 부정할 수 없다.
결국 우생학이 필요하다고 주장하는 측은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영역에서 목소리를 내고 있다. 첫째, 유전 질환을 사전에 막는 것이 더 나은 삶과 사회를 만든다고 보고, 둘째, 공공 자원의 효율적 분배를 위해 의료·복지 비용이 과도하게 발생할 수 있는 생명을 조정해야 한다고 생각하며, 셋째, 인류 스스로 유전자를 설계하고 개선함으로써 진화의 새로운 시대를 개척할 수 있다고 믿는다. 이 논의는 여전히 뜨거운 감자이며, 기술이 빠르게 발전하고 있는 지금, 우리는 어떤 생명을 선택하고 어떤 생명을 포기할 것인가에 대해 근본적인 물음을 다시 마주하게 된다.
철학자들의 관점으로 본 우생학
우생학은 20세기 전반의 어두운 그림자로 기억되지만, 그 사상의 뿌리는 놀랍게도 고대 철학에서부터 싹트기 시작했다. 플라톤은 『국가』에서 이상 국가를 설계하며, 수호자 계급의 구성원들이 의도적으로 우수한 유전자를 가진 자들끼리 짝을 이루고, 열등한 자들의 자손은 제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이를 축제일에 추첨을 가장한 통제된 혼인 제도라는 방식으로 제안했으며, 이는 곧 국가가 번식의 방향을 통제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이어졌다. 플라톤에게 있어 이 혼인 설계는 단순한 신체적 강인함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 ‘혼의 기질’과 ‘이성적 능력’이 뛰어난 자들만이 국가 전체의 도덕과 질서를 유지할 수 있다는 철학적 전제 위에 서 있었던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 역시 비슷한 맥락에서 논의를 전개했다. 그는 『정치학』에서 아이의 수를 통제하지 않으면 국가가 혼란에 빠진다고 경고하며, 출산과 자녀 수를 제한할 필요성을 주장했다. 병약하거나 결함 있는 아기는 태어난 직후 제거될 수 있다는 그의 발언은, 생명의 가치보다 공동체의 이상적 구조를 더 우선시했던 당시 철학적 사고를 여실히 보여준다. 결국 고대 철학자들에게 우생학적 사고란 자연 선택의 과정이 아니라, 사회적 질서를 위한 도구였고, 생명의 존엄성보다는 공동체의 안정성과 순수성을 유지하는 것이 더 중요한 철학적 명제였다.
근대로 접어들면서 철학은 인간 이성과 합리성을 중심으로 재편되었고, 그 속에서 ‘개선 가능한 인간’에 대한 생각이 점차 뚜렷해지기 시작했다. 프랜시스 베이컨은 『신기관』에서 자연을 정복함으로써 인간의 삶을 개선할 수 있다고 보았고, 르네 데카르트는 인간을 기계처럼 분석 가능한 존재로 인식하며 생명을 기술적으로 다루는 관점을 열었다. 이성은 인간을 해방시키는 도구였고, 그 이성이 과학과 결합하면서 생명은 점차 수정 가능하고 최적화 가능한 대상으로 여겨지게 되었다.
이러한 흐름은 19세기 우생학의 선구자인 프랜시스 골턴의 사상으로 구체화된다. 그는 다윈의 사촌으로, 자연선택 이론을 인간 사회에 적용하려 했으며, 우수한 유전자를 퍼뜨리고 열등한 유전자를 억제함으로써 인류 전체를 향상시킬 수 있다고 믿었다. 그는 “천재는 유전된다”는 가설을 토대로 통계학을 접목해 ‘측정 가능한 인간 가치’라는 개념을 정립했고, 이는 곧 유전자적 우월성이라는 신념으로 확장되었다. 근대 철학의 구조적 한계는 이 지점에서 분명해진다. 계몽주의는 인간 해방을 위해 시작되었지만, 이성이 효율성과 예측 가능성을 중시하게 되면서, 생명은 점차 수단으로 환원되었고, 인간은 자기 자신조차 통제하고 관리할 수 있는 대상으로 간주되기 시작했다.
임마누엘 칸트는 인간을 “목적 그 자체”라고 규정하며 인간 존엄성의 철학적 기초를 마련했지만, 실제로 그는 ‘민족 간 우열’에 가까운 서술을 남기기도 했고, 인간 사이의 선천적 능력 차이를 인정하는 발언을 한 적도 있다는 점에서, 그의 윤리학 또한 우생학적 사고와 미묘한 긴장 관계를 형성하고 있었다.
20세기에 접어들면서, 우생학이 실제로 수많은 폭력적 정책으로 실현되자 철학은 더 이상 이를 중립적 기술로 보지 않게 된다. 한나 아렌트는 『전체주의의 기원』에서 나치즘의 핵심은 정치적 악의 결과가 아니라, 행정적 평범함에서 비롯된다고 분석했다. 그녀는 우생학이 과학의 탈을 쓴 행정 기술로 기능하며, 얼마나 쉽게 비윤리적 권력에 흡수될 수 있는지를 예리하게 지적했다. 미셸 푸코는 『감시와 처벌』과 『생명관리정치』라는 개념을 통해, 국가 권력이 더 이상 생명을 죽이는 권력이 아닌, 생명을 통계화하고 관리하는 권력으로 이동했다고 설명한다. 푸코에게 우생학은 생명을 조절하는 권력 기술의 대표적 사례였고, 인간은 점점 자신의 유전 정보로 정의되기 시작했다. 생명은 더 이상 고귀한 존재가 아니라, 효율과 관리의 대상이 되어갔다.
슬로터다이크는 『인간 농장 실험』이라는 도발적 저작에서 인간은 이제 스스로를 진화시킬 의지를 갖게 될 것이며, 유전자 수준에서 인간을 개선하는 기술은 필연적으로 등장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이것이 윤리 없는 우생학이라면 전체주의로 흐르겠지만, 윤리 있는 우생학은 오히려 불가피한 미래라고 말했다. 즉 기술의 발전을 무작정 억누르기보다는, 그 기술이 어떤 윤리적 틀 안에서 작동할지를 고민해야 한다는 것이다.
마이클 샌델은 『완벽해질 권리』에서 현대 유전자 강화 기술이 단지 질병 예방이나 효율 향상을 넘어, ‘완벽함에 대한 중독’으로 이어질 수 있다고 경고했다. 그는 인간이 원래 불완전함을 통해 서로 연대하고 공동체를 이루는 존재라고 보았고, 유전자 선택은 그 연대의 기반을 무너뜨릴 수 있다고 보았다. 기술적 향상이라는 이름으로 인간 조건을 근본적으로 바꾸려는 시도가 인간다움 자체를 위협할 수 있다는 그의 주장은, 우생학을 둘러싼 논쟁의 중심에 있는 윤리적 긴장을 다시금 상기시킨다.
결국 철학은 시대마다 우생학을 다른 얼굴로 바라보았다. 고대에는 공동체의 질서를 위한 생식 통제로, 근대에는 계몽과 과학에 의한 인간 향상의 가능성으로, 그리고 현대에 와서는 인간 조건에 대한 본질적 성찰과 기술 권력의 위험성을 경계하는 시선으로 우생학을 다뤄왔다. 시대가 바뀔수록 우생학의 형태도 진화하지만, 그 이면에는 여전히 같은 질문이 반복된다. 인간은 누구이고, 어떤 존재가 되어야 하며, 우리가 선택하지 않은 생명에게 어떤 책임을 질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