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갑자기 명왕성 궤도에 정체 모를 벽이 생기며 태양계는 고립되고, 일개 경찰이던 주인공은 거대기업의 음모를 파헤치는데..
촌평:
그렉 이건 결심했어.
주의:
아는 소리 모르는 소리 온갖 심오한 떡밥소리.
<1> 먼저, 빛과 어두움에 대해 고찰해 보자.
아이작 아시모프의 《전설의 밤》엔 6개의 태양이 떠있는 행성이 등장한다. 2049년에 한 번씩 찾아오는 개기일식. 전설로만 내려온 종말의 날에 사람들은 암흑을 두려워했지만 정작 그들을 미치게 만든 건 태양이 사라진 뒤 처음 맞닥뜨린 찬란한 별들의 존재였다. 미지를 자각하고 인류는 미쳐버렸다. 빛은 모든 곳에 있었으나 빛이 있기 위해선 먼저 빛이 없음이 있었어야 했다. 빛이 사라지고 나서야 빛이 보였다. 어둠이, 보이게 했다.
빈 디젤의 리딕 시리즈의 시발이 된 《Pitch Black》(국내 제목은 뜬금없는 《에이리언 2020》) 속 외계행성이 이 모티브를 따왔다. 그 영화 속 칠흑 같은 어둠은 괴생명체 등장을 위한 배경에 불과하지만, 그렉 이건은 이 소설에서 정체 모를 모종의 다이슨스피어에 시달리는 인류의 존재론적 존망을 색다른 '이너'스페이스 오페라로 진행시켰다.
<2> 이번엔 유아론에 대해 생각해 보자.
어릴 때 미국 홀마크카드의 한 문구를 읽고 혼돈에 빠진 적이 있다. "If a tree fell in a forest and there's nobody saw it, did it really fall?" "숲 속에서 나무 한 그루가 쓰러졌는데 아무도 보지 못했다면, 그 나무는 정말 쓰러진 걸까?"
18세기 아일랜드의 철학자 조지 버클리는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 "Esse est percipi." "존재하는 것은 지각되는 것이다."
내가 인지하지 못한 사건은 내게는 벌어지지 않은 사건이다. 이것을 확장시켜 모든 인류가 영원히 알 수 없는 어떤 것이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과연 존재하는 것이라 할 수 있는가? 좀 더 엄밀히 말해, 우리는 실상과 허상을 구분해서 안다고 말할 수 있는가? 알 수 없는 건 존재마저 하지 않는 것 아닐까?
<3> 마지막으로 인류원리에 대해 알아보자.
무한하고 복잡한 우주에서 너무도 완벽한 조건의 지구라는 이곳에 말도 안 되는 확률로 우리 같은 지적 생명체가 어떻게 존재하게 된 건지, 설명을 하다 하다가 <인류 원리>란 게 탄생했다. 휘뚜루마뚜루 후려치자면, 우리가 여기 있으니까 세상이 이런 거다..?
여기까지 읽고, 잘 알지도 못하면서 어디서 약을 팔고 요상한 얘길 주워섬기고 있어, 했다면 빙고! 이 소설을 정확히 파악했다.
다방면에 걸쳐 방대하고도 잡다한 지식을 자랑하는 작가는 "추리극, 첩보극, 생리학, 양자역학, 결정론, 형이상학을 모조리 때려넣"은 "지적 유희의 끝판왕"이라는 추천인들의 추천사처럼 처음부터 끝까지 도무지 쉴 틈이 없이 독자의 머리를 안드로메다로 보낸다. 추천사는 추천사니까 그렇다 치고, 이 작가 오지랖은 확실히 넓다.
헤르만 헤세의 《유리알 유희》에 도전하다가 나도 모르게 딥슬립 모드에 빠져본 적이 있다면 -그것도 여러 번- 인정. 그 현학적 유희의 21.5세기 판이다. 그런데, 반전. "버블"과 "쿼런틴"이라는 용어로 품게 한 대중적 스페이스 오페라의 기대는 단지 맥거핀에 불과했다.
이휘재의 <그래 결심했어>를 꺼내지 않을 수가 없다. 작가의 이름을 딴다면 <그렉 이건 결심했어>가 되려나. 추천인들 같은 전문학자가 아닌 다음에서야 이 정도 이해만으로도 충분히 훌륭하다. 부질없이 현란하기만 한 잔가지(?)들을 다 제쳐놓고 몸통줄기 하나만 뽑으라면 결국 '슈레딩거의 고양이' 양자중첩 이야기다. 거시세계에선 알 수 없는 미시입자들의 세계가 있다. 그곳에선 입자들이 관찰자에 의해 파동함수가 붕괴되기 전까지 모든 곳에 위치가능한 양자중첩의 상태로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존재했는 줄도 모르는 수많은 다른 가능성의 우리들을 죽이고 있는 것이 아닌가? 이 화두를 푸는 얘기다.
☑️ "단지 관측하는 것만으로 우주를 난도질하고 있다고?”
☑️ "인간으로 존재한다는 것은 바로 이런 일, 우리였을지도 모르는 사람들을 학살하는 일인 것이다."
소설을 다 읽고 나면 양자적 확산상태에서 표류하던 의식이 최소한 다음의 두 가지 중 하나로 수축한다. '이걸 다 읽은 스스로를 칭찬해' 아니면 '내가 지금 뭘 읽은 거니'. 둘 다라면 그도 이상할 것 없다.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린 끊임없이 중첩돼 있으니까.
어느 누구도 양자역학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것만은 확실하다" - 리처드 파인먼
※사족:
"그래 결심했어!"는 1990년대 MBC 일밤의 <TV 인생극장>에서 인기를 끈 밈이다. 당시 일본 후지 tv 프로를 참고했다. 다시 유재석의 무한도전에서 <만약에 if>로 확산(수축?)했다.
"빠밤빠 바밤빠 바밤빠 바바바밤" 유명한 bgm 역시 남궁연이 만들고 싸이가 리메이크하기 전에 보니 M의 《Felicidad》 "Mama oh mama"라는 원곡으로 존재한다. 무단 샘플링 시비를 피하기 위해 약간의 변조(확산?수축?)가 가미됐다.
'암호비서', '야간교환수' 등 미래 상용화될 법한 앱들이 제조사, 가격과 함께 구체적인 품명으로 기술된다. (예: "NHK(뉴홍콩)를 방문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으나, 나는 시가지의 최신 지도와 정보 패키지가 포함된 '데자뷔(〈글로벌 비지주〉, 750달러)'를 켜놓았다.") 또한 소설가의 오지랖의 발현이겠으나 sf로부터 실제 구현된 사례들이 여럿임을 볼 때 봉이 김선달 식 선점전략이 될 수도.
부자연스러운 복문에 지극히 사전적인 직역이 걸려 옮긴이를 검색했는데 sf 동네에서 알아주는 번역가라 하여 의문이었다. 테드 창 등 유명작가의 작품을 전담해 왔다는데, 일부러 원작의 필을 살리려는 의도라 하니 원전을 들여다보기 전엔 확인할 도리 없어 그러려니 읽었다. 말미에 <옮긴이의 말>의 문체를 보고 못지않구나 이해가 갔다.
아래는 소설에 등장은 하지만 대세와 상관없는 잡지식이다.
<1> 팡글로스 ☑️ "닥터 팽글로스는 내가 가장 선호하는 정보 수집가다."
프랑스 계몽사상가 볼테르(1694-1778)의 《캉디드》에 나오는 인물. 그리스어로 ‘모든’을 뜻하는 ‘pan’과 ‘혀’를 가리키는 ‘gloss’의 합성어. 모든 걸 다 설명할 수 있는 박식한 사람이란 뜻. 비상식적으로 과도한 낙관주의자. 세계는 조화롭도록 예정되어 있다는 라이프니츠의 낙천주의를 비판하기 위해 창조한 인물.
<2> 몰리에르 ☑️ "파우더를 뿌린 가발을 쓴, 점이 있는 팽글로스의 가면은 나로 하여금 언제나 볼테르라기보다는 몰리에르를 떠올리게 하고,"
몰리에르(1622-1673)는 영국의 셰익스피어, 스페인의 세르반테스에 비견되는 프랑스가 자랑하는 극작가. 프랑스어를 몰리에르의 언어라고 한다 함. 루이 14세의 총애를 받아 베르사유 궁에서 여러 작품을 올림. 호색한의 대명사《동 후앙》이 그가 쓴 희곡.
<3> 가르강튀아와 팡타그뤼엘 프랑수아 라블레(1494-1553)의 풍자소설 속 거인 부자. 식탐과 음탐, 똥탐으로 점철되어 르네상스인의 환희와 몽상, 구태의연한 정치, 사회, 사상의 왜곡에 대한 풍자와 비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