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지원 Jan 22. 2022

무기력보다 무서운 것

이건 나의 경기장이다

경기에 출전하긴 하지만 달리지 못하는 남자


문제는 무기력이다의 저자가 무기력(helplessness)을 정의하면서 그리는 비유입니다.


이 남자, 아직 뛸 생각은 있어 보이양반입니다. 무기력은 문제입니다. 하지만 무기력 정도론 상대도 안 되는 다음 단계가 찾아오면 그건 진짜 문제입니다. 무가치(worthlessness)놈입니다. 왜 달려야 하는지를 잊습니다. 뭘 위해 달렸던 거지?


잊음 다음엔 잃음이 옵다. 끝도 보이지 않는 심연이 시커먼 입을 벌립니다. 무의미(meaninglessness)경지입니다. 달려야 할 경기 자체가 없어집니다. 조금 전까지 분명히 출발선에 서서 신발끈을 꾸욱 매고 있었는데, 눈을 들어보니 어디로 갔는지 골인 지점이 사라졌습니다. 당황하여 서 있던 자리를 내려다보니 출발선도 지워졌습니다. 경기 자체가 취소됐기 때문입니다. 홀연히 사라진 경기장에 나 혼자만 덩그러니 서 있습니다. 경기는 취소됐는데 나는 취소되지 못해 그 자리에 서 있습니다. 앉지도 뛰지도 오도가도 못한 채 못 박힌 듯 서만 있습니다.


생각해보면 애초에 이 시합에 참가하고 싶어 한 적도 없었던 것 같습니다. 과연 내 의지로 경기장에 입장했는지조차 의심스럽습니다. 하지만 트랙은 연기처럼 사라지고 어느 쪽으로도 퇴로가 보이지 않습다. 입구는 있었는데 출구가 없는 세상. 들어는 왔는데 나갈 수 없는 인생. 서는 있는데 더는 버틸 수 없는 자신. 그렇다면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연결은 끊겼지만 민감도는 최고조다. 에너지는 바닥인데 이대로 끝내긴 싫다.


여기까지 남 얘기 같지 않았다면 빌리브 미, 당신은 아직 끝을 보지 않았습니다. 아마 다시 뛸 수 있게 될지도 모릅니다. 이 글을 읽고 있다는 게 그 증거입니다. 가 그 증거입니다. 의욕을, 의지를, 의미를 차례로 잃어버려도 마지막으로 부림 쳐 볼만한 의외의 시도가 하나 남았습니다.


(懷疑).


과연 할 만큼 해 봤나? 깨질 만큼 까 봤나? 숨겨논 내면의 비밀 쪽팔릴 만큼 인정해 봤나? 목숨처럼 지켜온 아스팔트 가치를 기초부터 부정해 봤나? 지금까지의 내가, 내가 맞았나? 여태 살면서 충분히 살아 있었나? 죽을 만큼 하고 싶은 , 시도 해나? 후회, 안 할 자신 있나?


회의가 올 때 꾸역꾸역 이기려 애쓰지 고 흐르는 대로 당분간 맡겨봅니다. 놀랍게도 의심이란 걸 의심하길 멈추 나면 의외로 될 대로 되란 마음이 생깁니다. 평생 확신만이 선이라고 믿고 살아온 인생에겐 생각도 못했던 마음가짐입니다. 매우 낯설지만 뭐라도 마음이 생긴다는 건 다시 의지가 생길 여지가 보인단 얘기입니다.


상담을 받습니다. 병원을 찾습니다. 약을 먹습니다.

표현을 합니다. 울분을 토합니다. 눈물을 냅둡니다.

기대를 거둡니다. 모두를 만족시키겠단 불가능한 목표를 포기합니다. 포기도 용기입니다. 

흘려보낼 건 흘려보냅니다. 물론 쉽진 않습니다.

해도 끝없습니다. 끝낸다는 것도 없습니다. 집착을 보내는 것부터 시작입니다.


그땐 맞고 지금은 틀린 게 있을 수 있습니다. 아무렴요, 충분히 그럴 수 있고 말고요. 그러니 슬퍼할 이유가 없습니다. 필요한 건 단지 한 숨의 여유와 한 주억 끄덕거림입니다.


모든 것에 의미를 부여하지 마세요. 모든 것에 의미가 없는 것이 아니라 그 모든 의미들을 일일이 다 신경 쓸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지나간 숨과 다가올 숨 사이 내가  숨은 한번에 숨이면 충분합다.


모든 건 현재입니다.

모든 건 진행 중입니.


내가 서 있는 바로  자리가 출발선이자 골인점입니다. 뛰든 걷든  움직임으로 만드는 자취들이 가치이고 의미이고 목표입니다. 경기가 사라진 건 내가 그렇게 진행시켰기 때문입니다. 시합의 주최자는 나였으며 대표선수도 나였습니다. 그리 이건 비밀인데, 사라진 경기장의 등기도  이름으로 되어 있습니다.


경기장 안에 선 건 나이며,
이건 나의 경기입니다.


경기장에서 다시 한번 뵙길 소망합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