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에 출전하긴 하지만 달리지 못하는 남자
《문제는 무기력이다》의 저자가 무기력(helplessness)을 정의하면서 그리는 비유입니다.
이 남자, 아직 뛸 생각은 있어 보이니 양반입니다. 무기력은 문제입니다. 하지만 무기력 정도론 상대도 안 되는 다음 단계가 찾아오면 그건 진짜 문제입니다. 무가치(worthlessness)란 놈입니다. 왜 달려야 하는지를 잊습니다. 뭘 위해 달렸던 거지?
잊음 다음엔 잃음이 옵니다. 끝도 보이지 않는 심연이 시커먼 입을 벌립니다. 무의미(meaninglessness)의 경지입니다. 달려야 할 경기 자체가 없어집니다. 조금 전까지 분명히 출발선에 서서 신발끈을 꾸욱 매고 있었는데, 눈을 들어보니 어디로 갔는지 골인 지점이 사라졌습니다. 당황하여 서 있던 자리를 내려다보니 출발선도 지워졌습니다. 경기 자체가 취소됐기 때문입니다. 홀연히 사라진 경기장에 나 혼자만 덩그러니 서 있습니다. 경기는 취소됐는데 나는 취소되지 못해 그 자리에 서 있습니다. 앉지도 뛰지도 오도가도 못한 채 못 박힌 듯 서만 있습니다.
생각해보면 애초에 이 시합에 참가하고 싶어 한 적도 없었던 것 같습니다. 과연 내 의지로 경기장에 입장했는지조차 의심스럽습니다. 하지만 트랙은 연기처럼 사라지고 어느 쪽으로도 퇴로가 보이지 않습니다. 입구는 있었는데 출구가 없는 세상. 들어는 왔는데 나갈 수 없는 인생. 서는 있는데 더는 버틸 수 없는 자신. 그렇다면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연결은 끊겼지만 민감도는 최고조다. 에너지는 바닥인데 이대로 끝내긴 싫다.
여기까지 남 얘기 같지 않았다면 빌리브 미, 당신은 아직 끝을 보지 않았습니다. 아마 다시 뛸 수 있게 될지도 모릅니다. 이 글을 읽고 있다는 게 그 증거입니다. 제가 그 증거입니다. 의욕을, 의지를, 의미를 차례로 잃어버려도 마지막으로 부림 쳐 볼만한 의외의 시도가 하나 남았습니다.
회의(懷疑).
과연 할 만큼 해 봤나? 깨질 만큼 까 봤나? 숨겨논 내면의 비밀을 쪽팔릴 만큼 인정해 봤나? 목숨처럼 지켜온 아스팔트 가치를 기초부터 부정해 봤나? 지금까지의 내가, 내가 맞았나? 여태 살면서 충분히 살아 있었나? 죽을 만큼 하고 싶은 것, 시도는 해봤나? 후회, 안 할 자신 있나?
삶에 회의가 올 때 꾸역꾸역 이기려 애쓰지 않고 흐르는 대로 당분간 맡겨봅니다. 놀랍게도 의심이란 걸 의심하길 멈추고 나면 의외로 될 대로 되란 마음이 생깁니다. 일평생 확신만이 선이라고 믿고 살아온 인생에겐 생각도 못했던 마음가짐입니다. 매우 낯설지만 뭐라도 마음이 생긴다는 건 다시 의지가 생길 여지가 보인단 얘기입니다.
상담을 받습니다. 병원을 찾습니다. 약을 먹습니다.
표현을 합니다. 울분을 토합니다. 눈물을 냅둡니다.
기대를 거둡니다. 모두를 만족시키겠단 불가능한 목표를 포기합니다. 포기도 용기입니다.
흘려보낼 건 흘려보냅니다. 물론 쉽진 않습니다.
해도 해도 끝없습니다. 끝낸다는 것도 없습니다. 그 집착을 보내는 것부터 시작입니다.
그땐 맞고 지금은 틀린 게 있을 수 있습니다. 아무렴요, 충분히 그럴 수 있고 말고요. 그러니 슬퍼할 이유가 없습니다. 필요한 건 단지 한 숨의 여유와 한 주억 끄덕거림입니다.
모든 것에 의미를 부여하지 마세요. 모든 것에 의미가 없는 것이 아니라 그 모든 의미들을 일일이 다 신경 쓸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지나간 숨과 다가올 숨 사이 내가 쉴 숨은 한번에 한 숨이면 충분합니다.
모든 건 현재입니다.
모든 건 진행 중입니다.
내가 서 있는 바로 이 자리가 출발선이자 골인점입니다. 뛰든 걷든 내 움직임으로 만드는 자취들이 가치이고 의미이고 목표입니다. 경기가 사라진 건 내가 그렇게 진행시켰기 때문입니다. 시합의 주최자는 나였으며 대표선수도 나였습니다. 그리고 이건 비밀인데, 사라진 경기장의 등기도 내 이름으로 되어 있습니다.
경기장 안에 선 건 나이며,
이건 나의 경기입니다.
경기장에서 다시 한번 뵙길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