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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지원 Feb 03. 2022

여행자와 생활자 사이

달팽이처럼 여행하기


중3 땐가 

아파트 반상회에 다녀오신 어머니로부터 놀라운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우리 동 건너편 라인에 독특한 취미를 가진 은퇴한 노부부가 살고 계신다는 것이었습니다. 정년퇴직 후 부부가 함께 1년에 하나씩 언어를 정해서 반년은 말 공부를 하고 나머지 반년은 그 말을 사용하는 나라로 여행을 다녀온다는 것이었습니다. 그게 벌써 3년째라 습니다. 해외여행에 동경은 품었으나 일찌감치 학업 현실에 치인 사춘기 학생 귀에는 놀라움을 넘어 조금은 충격적인 삶의 방식이었습니다. 그런 여유로운 삶이 가능한가 신기하면서도 실천력이 대단해 보였습니다.


@Cafe Beaubourg, Paris


2005년 겨울,

프랑스 파리 4구의 유명한 카페 보부르(Cafe Beaubourg) 2층 창가에서 저는 혼자 쇼콜라쇼를 홀짝거리고 있었습니다. 현지 회사에 다니는 동창도 만날 겸 일주일 휴가를 내고 파리 근교 여행 중이었습니다. 제 딴엔 벌써 두 번째  방문이라고 나름 한껏 여유를 부리던 참이었습니다. 창밖으로 따사로운 햇살이 내리쬐었고 벙어리장갑을 낀 아이들이 꺅꺅 소리를 지르며 퐁피두 센터 앞을 뛰어다녔습니다. 잠시 후 동네 아저씨 둘이 옆 테이블에 털썩 자리를 잡더니 새끼손가락만 한 에스프레소를 시켜놓고는 쥬느쎄 세상 큰일 난 것처럼 손짓 발짓 큰소리로 떠들기 시작했습니다. 잠시 후 아이 엄마 한 명이 유모차를 끌고 오더니 더욱 알아들을 수 없는 빠르기로 샹송 스타일 랩 배틀에 가세했습니다.


처음엔 

동네 시끄러운 잡담에 여행자의 로망을 방해당하는 게 못마땅했습니다. 그런조금 지나자 마음속에서 뜻밖의 아쉬움이 피어올랐습니다. 내게 시간이 좀 더 있었더라면 저 일상의 동영상에 해볼 텐데. 어설프게나마 불어를 조금 더 알았다면 여행의 잡음이 아니라 삶의 소통으로 이 순간을 남길 텐데. 같은 시간 같은 골목을 걷더라도 간판을 읽을  아는 거랑 대충 좋다 하고 지나치는 거랑 체험의 폭이 천지차이라는 건 이미 잘 알고 있었으니까요. 하지만 그 대신 저는 황급히 사진 한두 장 찍고는 다음 관광지로 이동할 지하철 노선도를 꺼내 었습니다. 당시엔 시간적 여유도 말 걸 용기도 없는 그냥 관광객이었으니까요. 그런데 더 이상 그저 그런 관광객으로 지나치고 싶지 않았습니다. 보다는 좀 더 내밀한 여행자, 기회가 된다면 저들과 같은 생활인 모드로 지내보고 싶었습니다. 그때 결심했습니다. 다음엔 말을 배워서, 시간을 좀 더 내서 거주민 흉내라도 함 내봐야지!



거점을 두고
살면서 여행하는


저니(journey).



숙소 말고 집을 구하기로 했습니다.

가이드북 말고 텍스트북을 들기로 했습니다.

여기저기 찍는 대신 한 곳에 정착해 보기로 했습니다.


물론, 직장인 신분에 말처럼 쉬운 일은 당연히 아니었습니다. 그래도 바람을 품은 뒤로 여행의 폭과 깊이가 조금씩 넓고 깊어졌습니다. 가능한 대로 한 곳에 오래 머무르는 달팽이 같은 여행법을 익혀갔습니다. 그렇게 이런저런 기회로 5대양 6대주 80여 개국을 돌면서 마침내 저는 생활자의 바람을 이룰 수 있었습니다.


달팽이 같은 저의 첫 집은,

스페인 바르셀로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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