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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지원 Jan 23. 2022

내 속에 내가 너무도 많아

멸균의역설>소립자>에셔>미토콘드리아>세포의탄생>with와syn>적자공생존

위드 코로나 덕에 수시로 비눗칠이 습관이 되다 보니 투머치 위생적이었는지 어느 날 손등이 우둘두둘 빨개지며 거칠게 살갗이 일어났다. 피부과에 갔더니 비누가 유분을 다 뺏어가 보호막이 없어지는 셈이라며 비싸서 좋다는 보습 연고를 팔았다. 평생 로션과 에센스가 뭔 차인지, 핸드밤이 먹는 건지, 관심도 재주도 없는 나로선 세상 거꾸로 돌아가는 소리였다. 언제부터 우리가 알량한 손등조차 화학약품에 맡겨야 할 정도로 ''위생적이었단 말인가! (그렇다 비위생적이라고 쓴 거 맞다.)


두꺼비한테 헌집 떠넘기고 새집 뜯어내던 낯 두껍던 그 시절, 세정제고 살균제고 하나도 몰라도, 흙먼지 뒤집어쓰고 콧물에 말아 먹어도, 안 죽고 잘만 자랐. 그게 위생이었다. 물론 회충도 자라고 머릿니도 공생했지만  알러지에 아토피에 자가면역반응에 그런 복잡한 건 잘 몰랐다. 그러던 인간이 혼자 잘 먹고 잘 살겠다고 온갖 균과 벌레를 잡아죽였는데 21세기 하고도 21년이 더 지난 지금 듣도보도 못한 바이러스한테 호되게 당하고 있다. 멸균의 역설이다.



낱개의 신화부터 깨 보자.


여럿 가운데 따로인 한 개 한 개를 낱개라 부른다. 우주에 오로지 낱개인 것은 없다. 원자를 쪼개고 핵을 쪼개서 쿼크니 렙톤이니 요상한 이름의 소립자 세계로 파고 들어가면 입자와 반입자란 괴상한 짝꿍이 꼭 붙어있다. 물질의 근원은 쌍으로 생성되고 소멸한다. 낱개는, 모여야 역할을 찾는다.



씨줄과 날줄이 만나 패브릭이 된다. x축과 y축이 교차해야 좌표가 찍힌다. 닭이 먼전지 달걀이 먼전지, 먹으려 사는지 살려 먹는지 모르겠지만 뭐든 하나만 남기려는 순간 나머지는 사라지고 그게 다시 스스로를 지우는 모순이 생긴다. 지독한 얽힘이다.


아래 에셔의 그림을 보자. 오른손은 왼손을, 왼손은 오른손을 그리고 있다.


에셔, 손을 그리는 손, 1948

내 안의 나들


미토콘드리아라는 작은 박테리아가 있었다. 먹힌 건지 먹혀준 건지 하여간 어쩌다 자기보다 큰 박테리아 으로 들어가게 됐다. 스리슬쩍 자리를 잡았는데 어라? 서로 같이 지내는데 딱히 껄끄러움이 없다. 그렇게 합방을 하고 세월이 지나 세간살이가 조금씩 불어났으니 세포의 시작이다.

 

우린 박테리아들의 합체의 총체다. 있어 보이는 용어'휴먼 마이크로바이옴(Human Microbiome)'이라고 한다. 인체는 그 자체 수많은 미생물들로 이루어진 하나의 생태계다.



이쯤에서 질문. 


어디까지가 나인가? 내 위장은 분명 내꺼니까 나겠지? 그럼  속에 살고 있는 수조 마리 미생물들은? 얘네들이 생성해내는 각종 효소와 물질들은? 몸에 좋다고 먹는 프로바이오틱스가  면역을 도와준다는데 그건 내부물질인지 외부물질인지?


반대로, 때는? 이태리타월로 빡빡 밀기 전까지 내 피부였던, 내부경쟁에서 밀린 이 덜 떨어진 세포들은? '암세포도 생명'이라는데 진짜 내 세포였던 때는 내가 아닌가? 한편, 인체는 매 1초에 380만 개, 하루 평균 3300억 개의 세포를 새 걸로 갈아치운다. 장 세포의 수명은 3~5일, 혈액세포는 3~4개월, 온몸의 세포가 싹 바뀌는데 7년이면 된다는 자료도 있다. 그렇다면, 놀라운 회전율의 7년 전 나는 지금의 나랑 과연 같은 생명체인가? 그때 나랑 지금 나는 남남인가?

(인체의 모든 세포가 교체되는 것은 아니다. 뇌세포나 눈 수정체 세포처럼 평생 갖고 가는 것도 있다.)



with와 syn의 차이


공생을 영어로 하면 symbiosis다. 이때 syn-이라는 접두어는 전치사 with와 약간의 의미 차이가 있다. with가 산술적이라면 syn은 합성적이다. 사과 하나에 하나를 더하면(with) 두 개가 되지만 합성하면(syn) 1+1=3일 수도 있다. 씨너지의 스펠링은 씬-어지(synergy)다. A와 B를 합성(synthesis)해서 새로운 C를 만들듯이, 서로 다른 여러 악기들의 조화로운 화음이 심포니(symphony)를 구성하듯이, syn에는 단순 덧셈 이상의 대칭(symmetry) 혹은 균형의 뜻이 담겨있다.


공생(共生)의  지나치게 강조한 나머지, 있는 대로 무조건 살리고 보잔 식의 박애주의적 생태 관점현실적이지 않은 면이 있다. 찰스 다윈의 적자생존이 실은 약육강식이 아니라 호혜공생이었다는 표현은 아름답게 들리긴 하지만 냉정히 해석해서 "협력적 경쟁이 생존에 이로웠기 때문"에 가깝다. 즉, 공생이란 단지 기계적인 합이 아니라 오랜 시간 유기적 조절을 통해 나름의 적절함을 맞춰온 균형이라는 사실을 헷갈려선 안 된다.



그래서, 뭣이 중헌디?


두말하면 목 아프다. 균형과 조화다. 내가 살기 위해 네가 살아 주는 게 필요하고 그러려면 나도 적당히 있어 주는 게 중요하다. 공생을 위해 공감(sympathy)이 필요하다. 너와 나는 다르다. 다르긴 다른데 느끼는 건 비슷하다. Ctrl+C, V 복붙은 아니지만 거울 보듯이 엇비슷하다. 서로가 서로에게 적당하기, 조화롭기, 그래서 균형 잡기. 


같이 살려면(survive)

같이 살아야(exist)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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