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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로 하는 위로
5월의 마지막 날
나무가 해주는 말
by
이지원
May 31.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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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지개를 켜듯 가지를 살랑이며 나무가 물었다
- 왜 올해도 혼자야?
나는 나무가 나를 알아보는 것이
놀라웠다
"날 기억해?"
- 그럼, 왜 모르겠어 매년 이맘때 내 아래를 지나잖아
나무가 나를 알아보는 방식이 나는 신기했다
벌써 꽃을 한 두 잎씩 떨구고 있으면서도 나무는 당당했다
- 다음엔 같이 올 거라고 그러지 않았나?
"그러게. 아마도 다음이란 게 아직 오지 않았나 보지"
동시에 스물여섯 송이를 한꺼번에 털어내면서 나무는 계속 조잘댔다
- 작년엔
좀 더 기다려볼 생각이었다면서. 근데 왜?
햇수를 넘기면서도 말 한마디 한마디를 기억하고 있는 나무의 상대적 시간 개념이
내겐
충격이었다 기억
속 시간은 시계가 아니라 기회라고, 누군가 말해준 것도 같았다
"이젠 너랑은 아무 상관도 없는 얘기야"
나무는 이미 많은 꽃을 떨어뜨렸다
나는 더 이상 나무를 쳐다보지 않았지만 성급히 그 밑을 떠나지도 않았다
- 부르르-
작은 병아리 같은 5월의 꽃잎들을 마저 떨어내며 나무는
저만치 멀어지는 봄에게 작별 인사를 했다
'하아...'
나는 나무 아래 여전히 혼자 서 있었지만
조금 더 많은 것을 알게
된 것 같았다
여름은 이미 와 있고 꽃은 모두 떨어질 것이었다
가을이 지나면 나무는 잠들고 봄이 오면 다시 깨어나 똑같은 질문을 던지겠지
그리고 나는 아마도 처음인 것처럼 똑같은 모습으로 이곳을 지날
것이다
나는 깊은 한숨을 내쉬고
그대로 주저앉아 나무 아래 지친 몸을 뉘었다
기다림이란
상대가 틀림없이 오리라는 믿음을 필요로 하는 것이었다
돌아오기로 되어 있었다면 진작에
돌아왔을 것이다
하지만 돌아온 것은 시간뿐이었고
계절은 기다리지 않아도 무심히 반복되었다
나는 애써 기다릴 이유가 없었다
내겐
더 이상 할 말도 남아있
지 않았다
그때,
바닥에 수북이 떨어져 만다라를 그리고 있는 노란 꽃잎들이 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 우리가 바로 너의 작년이고
내년이고 내후년이야
나는 깨달았다
내가 무엇을 놓쳤는지를
내겐 늘 다음뿐이었단 것을
오지 않은 다음을 기다리느라 꽃이 피는 걸 보지 못했단 것을
꽃이 진 다음에야 그게 꽃이었음을
알아차렸단 것을
너는 늘 그곳에 있었는데
난 늘 너를 찾고 있었다
왜 오지 않느냐고
너를 밟고 묻고 있었다
나는 한 번도 너를 누려본 적이 없었다
아니, 누려볼 수가 없었다
크로노스가 아닌
카이로스의 시간을 살아야 했었다
지나간 것도 다가올 것도 모두
달려있을 때 존재하는 것이었다
계절은 항상 그랬듯 올해도
더도 덜도 아닌 제철을 선사했다
그렇게 마지막밤은
첫날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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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지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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