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하지 않는 감정, 밴드가 말하는 방식

<여러 밴드 음악>을 듣고 공감하며

by 재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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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하지 않는 감정, 밴드가 말하는 방식


“밴드 붐은 온다.” 요즘 유행하는 말이다. 대학 축제엔 밴드가 다시 서고, 알고리즘은 실리카겔, 데이식스, QWER와 같은 밴드들의 무대를 밀어준다. 공연장, 피드, 스트리밍, 쇼츠 등에는 기타와 그 친구들이 다시 등장하기 시작했다. 누군가는 말한다. “밴드가 다시 뜬다.” 그리고 또 누군가는 말한다. “밴드는 돌아왔지만 예전과는 다르다.” 하지만 진짜 중요한 질문은 따로 있다. 정말 ‘다시 뜬’ 게 맞는가가 아니라, 왜 지금 사람들은 다시 밴드를 듣는가. 그 질문에서 출발해야 한다. 밴드의 귀환은 유행이 아니다. 지금 감정이 선택한 언어가 바로 밴드다.


지금 사람들은 감정을 쉽게 말하지 않는다. 말은 리스크가 됐다. SNS에 감정을 쏟아내면 조롱받거나 과잉 해석된다. 관계 속에서도 감정을 드러내는 순간 분위기가 깨질까 봐 삼킨다. 감정은 점점 직접 말해지지 않고, 우회된다. 짧은 클립, 흐릿한 사운드, 공기 같은 분위기. 해석을 강요하지 않는 형식들이 감정을 대신 전한다. DM은 남겨도 진심은 못 전하고, 댓글로만 위로받는다. 지금 필요한 건 말하지 않아도 되는 방식, 설명을 요구하지 않는 구조다. 밴드는 이런 구조를 만들 수 있다. 음악은 말보다 느리지만, 더 깊게 도달한다. 밴드는 다시 뜬 게 아니라, 감정이 스스로 택한 매개체다.


실리카겔은 몽환적인 사운드로 감정을 흐릿하게 전달한다. 보컬은 악기에 묻히고, 선율은 명확하지만 손에 잡히지 않는다. 그런데도 어떤 감정은 정확히 전해진다. 가사를 따라가려고 애쓸 필요 없이, 그 사운드의 벽에 기대면 감정이 밀려온다. 말하지 않기 때문에 진실하다. 그건 공감이 아니라 침투다.


데이식스는 반대 방식으로 감정을 단순하고 정직하게 푼다. 대표곡 「한 페이지가 될 수 있게」는 “이 순간을 너와 함께”라는 가사로 복잡한 감정을 단번에 건넨다. 이들의 음악은 감정을 조각하지 않고, 대신 곁에 머문다. 과장된 드라마 없이 반복되는 진심. 곡 전체가 정서를 설득하고, 연주는 감정을 덧붙이지 않고 남긴다. 아이돌의 형식을 벗어나 정면으로 마음을 흔든다. 이들의 음악은 정면을 보되, 목소리를 낮춘다. 정면조차 부담스러운 시대에 감정은 이제 스며들어야 닿는다.


QWER는 이 흐름에서 가장 ‘지금다운’ 방식으로 등장했다. 처음엔 유튜브형 단발성 콘텐츠처럼 보였지만, 이들은 콘텐츠 자체를 감정 구조로 설계했다. 쇼츠, 밈, 말장난, 밝은 분위기. 이 모든 것들은 감정의 전시가 아니라 접근 가능성을 만든다. 기타를 치며 울지 않고, 드럼을 두드리며 웃는다. 연주는 가볍지만 진심은 가볍지 않다. 감정은 장르가 아닌 기류처럼 흐른다. 말하지 않지만 감정의 밀도는 어딘가에 남아 있다. QWER는 콘텐츠를 통해 ‘감정을 말하지 않는 시대’의 음악적 실천을 보여준다. 가벼워진 포맷 위에 쌓인 진중함. 그 이중 구조는 감정을 더 널리, 깊이 흘러가게 한다.


여기까지가 현실의 음악이 만들어낸 변화라면, 일본의 밴드 애니메이션들은 그 흐름을 훨씬 먼저 포착한 문화적 예보였다. 《봇치 더 록!》은 그 대표격이다. 주인공 히토리는 사람 앞에서 말도 못 하고, 눈도 마주치지 못한다. 하지만 기타를 들면 말하지 않아도 감정이 터져 나온다. 이건 흔한 성장 서사가 아니다. 이것은 ‘말하지 못하는 존재가 연주를 통해 간신히 존재를 증명하는 이야기’다.


《걸즈 밴드 크라이》는 사회 시스템에서 밀려난 인물들이 밴드로 살아남는 이야기다. 밴드는 이들에게 꿈이 아니다. 현실을 견디기 위한 마지막 구조다. 무너진 일상 속에서 감정을 붙들 유일한 방법이 연주인 것이다.


《록은 숙녀의 소양이기에》는 억압된 여성성과 체제화된 우아함에 대한 이야기다. 주인공들은 ‘예절’과 ‘단정함’이라는 틀 안에 자신을 가두던 감정을 록이라는 장르를 통해 해방시킨다.


이 세 작품은 같은 진단을 공유한다. 밴드는 성취의 수단이 아니라, 감정이 무너지지 않도록 지켜주는 장치다. 감정은 말로 설명되지 않을 때 음악이 된다. 말하지 않아도, 연주하면 전해지는 방식. 이건 창작물이 아니라 감정 구조를 가장 먼저 포착한 서사적 진단서다. 픽션들은 말해왔다. 감정은 설명하지 않아도, 충분히 전달될 수 있다고. 말 대신 연주로, 서사 대신 진동으로. 그리고 지금 그 구조는 현실 속에서도 드러난다.


현실의 음악계에서도 감정 언어의 전환은 또 다른 장면을 만든다. 세대 간 표현 방식의 충돌, 바로 그 지점에서 오아시스가 재결합했다. 90년대 감정의 상징이자, 슬픔과 분노는 커다란 목소리로 외쳐야 진짜라고 믿었던 록의 전형이 돌아왔다. 그들의 음악은 감정을 증폭시키고, 폭발시킨다. “Maybe I just wanna fly, wanna live, I don't wanna die”라고 외치던 시절, 감정은 클수록 진짜였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지금 록은 더는 소리 지르지 않고, 감정을 외치지 않는다. 슬픔은 침묵에 녹고, 분노는 흐릿한 사운드로 번역된다. 한 세대는 감정을 부르짖었고, 다른 세대는 그 감정을 숨긴다. 감정은 표현이 아니라 생존이 됐다. 정서 구조는 그때와 정반대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다.


이 흐름의 대표 격이 바로 슈게이징이다. 이 장르는 감정을 말로 번역하지 않는다. 보컬은 기타에 묻히고, 가사는 흐릿해지고, 감정은 질감으로 바뀐다. 사운드의 밀도와 흐름으로 감정이 흘러간다. Wisp, Diiv, Wednesday 같은 팀들이 이 흐름을 되살리고 있고, 국내에서는 Asian Glow가 언어 이전의 정서를 사운드로 증폭시키며 주목받고 있다. 앞서 등장한 실리카겔 또한 사이키델릭과 전자음악에 가깝지만, 슈게이징의 특성인 흐릿함, 레이어, 침투감을 끌어들인다. 흐릿하기 때문에 오히려 정직하다. 언어 이전의 정서를 건드린다.


지금 청춘은 감정을 말하는 데 지쳤고, 감정을 가진 것 자체에 피로를 느낀다. 그래서 더는 명확하게 설명하려 들지 않는다. 그럴 때 필요한 건 논리보다 감각, 표현보다 밀도, 설명보다 여운이다. 이 장르는 말 대신, 사운드를 쌓는다. 사운드는 무언가를 설명하지 않지만, 무언가를 오래 머물게 만든다. 말이 없는 대신, 감정은 누적된다.


이 흐름의 정서적 끝자락에서 가장 또렷하게 목소리를 내는 존재가 바로 파란노을이다. 그는 슈게이징의 사운드적 문법을 따르면서도, 감정 표현만큼은 정면 돌파를 택한다. 흐릿한 대신 날것을, 감춘 대신 고백을 선택한다. 대표곡 「청춘반란」은 감정을 포장하지 않는다. “매일매일이 똑같아 / 하루하루가 지겨워 / 만화에서나 보던 그런 청춘은 없어.” 이건 단순한 우울이 아니다. 청춘이 없다는 선언이다. “찐따무직백수모쏠아싸병신새끼 / 사회부적응 골방외톨이” 같은 가사는 자학이 아니다. 감정을 정제하지 않겠다는 의지다. 그런데 곡은 무너지지 않는다. “그래도 발버둥치고 싶어 / 내 이야긴 죽지 않아 / 내 노래는 죽지 않아.” 감정은 무너져도, 음악은 남는다.


파란노을은 감정을 드러내되 미화하지 않는다. 슬픔은 슬픔대로, 분노는 분노대로. 그 감정을 정확히 고백한다. 이건 감정의 실명 증언이다. 슈게이징이 흐릿한 공기를 번역했다면, 파란노을은 그 공기를 정면에서 응시한다. 이 흐름의 정서적 끝자락에서 가장 또렷하게 목소리를 내는 존재가 바로 파란노을이다.


이 직설은 지금 시대의 청춘에게 더 깊은 울림으로 다가온다. 감정을 드러내는 일이 점점 더 어려워진 시대에, 파란노을은 대신 말해주는 사람처럼 받아들여진다. 누군가는 말하지 못하고, 누군가는 감정을 느끼는 것조차 피곤해하지만 이 날것의 고백은 그 눌린 감정을 뚫고 들어온다. 파란노을은 그저 감정을 표현하는 뮤지션이 아니라, 감정을 억제당한 세대의 감각을 대신 외치는 존재다. 그래서 그의 음악은 누군가에겐 대리 발화이고, 누군가에겐 감정의 생존 방식이다. 말하지 못하는 사람이 많아질수록, 그의 고백은 더 크게 들릴 것이다.


이러한 감정 흐름은 단순한 취향의 변화가 아니다. 감정을 억제하는 구조가 청춘을 이렇게 만든 것이다. 지금 사회는 감정을 드러내는 걸 리스크로 취급한다. SNS는 말하라고 압박하지만, 진짜 감정을 말할 수 있는 자리는 없다. 보여지는 자아만 넘쳐난다. 정작 진짜 자아는 숨어든다. 그래서 청춘은 말하지 않는다. 말하지 않는 편이 덜 고립되기 때문이다. 이 억압은 결국 사회 시스템과 맞닿아 있다. 대학은 스펙 공장이다. 노동은 보상이 없다. 관계는 피로의 순환이다. 이 구조 안에서 감정은 쌓인다. 누구에게도 꺼내지 못하고, 어떤 말로도 설명할 수 없다. 감정은 체내에 고이고, 점점 굳는다. 숨긴다고 사라지지 않는다. 눌렀다고 덜 아픈 것도 아니다. 하지만 지금 구조는 감정을 부끄럽게 만들고, 말하는 사람을 웃음거리로 만든다.


사회가 감정을 리스크로 취급할 때, 밴드의 침묵이 곧 우리의 숨통이다. 말 없이 감정을 흘려보낼 수 있는 구조가 지금 필요한 것이다. 밴드 음악, 그중에서도 슈게이징과 파란노을 같은 흐름은 그 통로다. 언어 이전의 감정을 안전하게 흘려보낼 수 있는 몇 안 되는 방식이다. 이건 단순한 음악적 취향이 아니라, 생존 방식이다. 사회가 감정을 잘라낼 때, 밴드는 그것을 지켜낸다. 밴드는 말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 침묵이 우리를 살게 한다. 그래서 우리는 지금 다시 밴드를 듣는다. 외치기 위해서가 아니라, 무너지지 않기 위해서. 정확한 감정을 전달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느껴지는 감정을 살아 있게 하기 위해서. 밴드는 다시 뜬 게 아니다. 지금 감정이 선택한 언어다. 그리고 이 음악들은 말한다. 말하지 않아도 괜찮다고. 무너지지 않아도 괜찮다고. 그리고 지금 이대로, 숨 쉬듯 감정을 품고 살아도 괜찮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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