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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지 ez Sep 08. 2022

흐르는 시간이 아까워 퇴사를 했다

소비된 시간에서 투자된 시간으로

9월 아침 공기가 서늘하다. 이불 밖으로 나오니 쌀쌀함이 느껴진다. 가벼운 가디건을 걸쳐 입고 주방으로 간다. 뜨겁게 끓인 물을 드리퍼에 천천히 붓는다. 왠지 커피향이 더 잘 올라온다. 


아침을 천천히 짚어볼 수 있는 지금은 퇴사 1일차다.



여행 스타트업에서 콘텐츠에디터로 일했다. 이곳을 선택한 이유는 분명했다. 여행 분야에서 창업을 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스타트업에 들어가 스타트업의 생태를 배우고 싶었다. 처음 입사했을 때만 해도 스타트업 용어를 검색할 정도로 아무것도 몰랐다. 투자 단계는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한국 스타트업 문화는 어떤지, 유망한 여행 스타트업은 어딘지, 사방에 배울게 널려있었다. 매일 질문하고 답을 찾으며 빠르게 시간이 흘렀다.

핀트가 어긋난 걸 깨닫는 데까지는 1년이 걸렸다. 외부 프로젝트를 마무리하고 자체 프로덕트에 투입된 시점이다. 회사는 AI 기반 프로덕트를 관련 업계에 파는 사업을 했다. 영업을 해야 했고 예쁘게 포장하는 걸 핵심으로 삼았다. 리더들은 프로덕트의 완성도가 떨어지더라도 양을 늘리고 싶어 했다. 도시 하나에 유용한 정보를 눌러 담는 것보다, 여러 개 도시를 가진 게 더 매력적인 영업 포인트였을 테다. 프로덕트에 관해 크고 작은 문제들이 있었지만 Future plan으로 미루어졌다. 업무는 문제해결이 아닌 많은 양을 생산해내는 것을 중심으로 흘러갔다. 이곳에서 더 이상의 성장을 기대하기 어려웠다.



롭 무어의 <레버리지>에는 낭비된 시간, 소비된 시간, 투자된 시간이 나온다. 낭비된 시간은 쓸데없는 일에 써버린 시간이며, 소비된 시간은 지속적인 이익을 창출하지 못하는 시간이다. 마지막으로 투자된 시간은 추구하는 가치를 구축하는데 들이는 시간이다. 저자는 일주일의 시간을 어떻게 사용하고 있는지 점검해 보라 한다. 낭비된 시간과 소비된 시간을 줄이고, 투자된 시간을 늘리는 것이 핵심이다. 회사에서 일을 하는 시간이 투자된 시간이면 좋으련만, 소비된 시간에 넣을 수밖에 없었다. 요 근래 회사에서 하는 업무는 다분히 기계적이었으니까. 스타트업을 배우고 싶다는 입사 초기의 다짐과는 달리 딱딱한 직장인으로 굳어지고 있었다.


그래서 퇴사를 했다. 소비된 시간을 줄이고 싶어서. 하염없이 흐르는 시간이 아까워서. 퇴사를 했다. 그럼 어떤 일을 해야지 투자된 시간을 늘릴 수 있을까? 그 답은 이직이 아닌 창업이었다. 내가 추구하는 가치에 시간을 투자하려면, 내가 하고자 하는 일에 온전히 집중해야 한다는 결론에 닿았다. 오래전부터 품고 있던 창업을 도전하기로 마음먹었다. 마침 타겟시장도 꿈틀거리고 있으니 타이밍이 온 것 같다. 스타트업에 들어온 지 이제 일 년, 연차로 따지면 주니어, 여전히 모르는 게 많은 초짜다. 그럼에도 용기를 내보려 한다. 후에 서른살을 돌아봤을 때 생생하게 울렁거리는 기억을 가지고 싶으니까.


창업을 위해 퇴사한다는 말에 (전) 대표는 안타까워하며 이렇게 말했다. “아이고 왜 힘든 길을 오려고 해요.” 그러게 말이다. 앞으로 걸어야 할 길은 누가 봐도 뻔한 자갈길이다. 하지만 힘들어야 남는다는 걸 여행을 통해 배웠다. 주변을 경계하며 땀으로 흠뻑 젖은 인도 기차에서 독립적으로 성장했고, 덤터기 씌우는 렌트카 직원이랑 싸우고는 미성숙한 태도를 내내 반성했다. 힘든 순간은 성장에 발판이 되거나 하다못해 재밌는 에피소드가 된다. 하지만 평화로운 순간은 사진만 남을 뿐이다. 정신이나 육체, 무엇 하나라도 고생해야 투자된 시간으로 이어진다는 일종의 고집이 자리 잡았다. 



퇴사를 하면서 3년 일기장을 선물 받았다. 한 페이지에 1년째, 2년째, 3년째 일기를 쌓아가는 식이다. 미래의 내가 열어볼 생각을 하니, 하루에 한 걸음이라도 나아가고 기록하려 노력한다. 이 일기장에 앞으로 어떤 고난과 성장의 시간이 담길지 기대된다. 분명 소비된 시간은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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