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가로 하는 시간 여행
기억력이 좋지 않다. 지나간 것은 지나간 대로 잊어버린다. 친구들이 "야 그때 기억나?" 말을 열어도 기억이 안 나고, 길가다 인사를 받으면 못 알아보는 일이 허다하다.
여행에서도 별반 다르지 않다. 여행이 끝나고 나면 없던 일처럼 금세 사라져 버린다. 여행의 기억만은 잊어버리고 싶지 않아 블로그를 시작했다. 하지만 블로그 포스팅을 올리면 그걸로 끝. 언제든 꺼내볼 수 있는 곳에 남겨놓고 심해에 숨겨놓은 것처럼 좀처럼 꺼내보지 않는다. 포스팅에 댓글이 달리거나, 누군가 여행을 추천해달라는 특수한 외부 자극이 없으면 돌아가서 추억에 잠기는 일은 거의 없다. 그런데 오래된 기억을 스스로 불러내는 신묘한 방법을 알게 되었다. 바로 요가다.
요가 수련의 마지막에는 몸과 마음을 풀어주는 '사바아사나' 시간이 있다. 요가매트 위에 누워서 다리를 어깨넓이로 벌리고 팔도 몸에서 약간 떨어트려 손등을 바닥에 내려놓는 자세이다. 요가를 처음 시작하고는 사바아사나는 '몸의 긴장만' 푸는 시간이었다. 처음에는 낯선 요가 자세들을 따라 하고는 기운이 쭉 빠진 상태로 누워 '아 힘들다..'라는 생각만 했다. 다행히 몇 달 지나니 요가 수련에 적응이 되었고, 사바아사나에서 몸은 물론이고 마음까지 편안히 풀어줄 수 있게 되었다. 그러자 갖가지 기억이 튀어올랐다.
눈을 감고 누워있는데 창문으로 선선한 바람이 들어왔다. 그 바람이 얼굴에 스치더니 갑자기 드넓은 호수가 펼쳐졌다. 바람이 품은 온도, 습도, 속도와 꼭 닮은 파타고니아 여행으로 돌아간 것이다. 파도가 칠 정도로 거대한 푸콘 호수 위에서 카약을 타던 순간이었다. 푸른색 호수를 바라보며 선선한 바람을 맞았다. 물결에 따라 찰랑이는 움직임과 카약 보트에 파도가 부딪치는 소리가 들렸다. 맙소사 여행한 도시 이름조차 잊어버리는 내가 이렇게 생생한 감각을 떠올리다니!
계속해서 요가 수업이 기다려졌다. 어느 날은 인중에 맺힌 땀방울이 인도 악샤르담 분수쇼를 기다리는 뜨끈한 돌계단 위로 데려다주었고, 또 다른 날은 틀어진 음악의 새소리가 코코라 계곡에서 길을 헤매던 때로 보내주었다. 사바아사나를 하는 순간에는 모든 감각이 깨어나 무의식 속의 낡은 기억을 꺼내 주었다. 흐려진 기억들이 사실은 무의식 속에서는 생생하게 잠들어 있었던 것이다. 요가를 통해 과거로 시간여행을 떠나는 능력이 생겼다. 다음에는 또 어떤 곳으로 여행을 떠나게 될지 기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