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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슴슴하게씀 Oct 24. 2021

내일도 해가 뜬다

20211024

20211024 내일도 해가 뜬다


쌀쌀한 한낮, 가만히 침대 위에 누워 있다 난데없이 일어나 롱패딩에 몸을 꿰어 넣는다. 까만 모자를 푹 눌러쓰고 거울을 흘깃 본 뒤 어기적어기적 방을 나선다. 한기에 몸을 웅크리며 경사진 언덕을 오른다. 패딩 안의 몸이 후덥지근할 때쯤 평화의전당이 눈앞에 나타난다. 언덕을 다 올라 평화의전당 앞에 서면 비로소 저편에 뜬 해가 보인다. 그쪽을 향해 서서 소매를 꾸역꾸역 걷는다. 그리고 가만히 햇빛을 쐰다. 날이 추워 금세 소름이 돋는다. 그럼 추위를 이기려 맨 팔을 마구 흔든다. 다행히 차만 주차되어 있고 사람은 별로 없다. 졸업을 앞두고 딱히 정해진 게 없던 지난겨울에 자주 하던 일이었다.



요즘 자주 의욕을 잃는다. 뭐든 무의미하게 느껴지고 시작할 마음이 들지 않는다. 사람들을 만나도 집중하지 못하고 떠있는 것 같다. 혼자 있는 시간이 크게 특별한 것도 아니다. 그저 심심풀이로 게임을 하거나 봤던 유튜브 영상을 또 보면서 시간을 죽이곤 한다. 바삐 움직여야 할 때에 늘어지고 가라앉아버렸다. 몸이 바닥에 가까울수록 더 밑으로 당겨져 가라앉는 법인 걸 알면서도 마냥 침대에 붙어 있었다.


혼자 누워서 생각해본 바 원인은 다양하다. 급작스레 추워진 날씨에 몸을 움직이기 싫다. 혹은 감상에 젖은 것일 수 있다. 아니면 한동안 운동을 못 하고 있어서 처진 것일 수도 있다. 해야 할 것도 하고 싶은 것도 많은데,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갈피를 못 잡아서 그런 것일 수도 있겠다.


또 뜬금없이 몸을 일으켜 건물의 옥상으로 올라갔다. 예고도 없이 서늘해진 날이었지만 볕은 따뜻했다. 옥상에 앉아서 지난겨울에 그랬듯 외투의 소매를 걷고 햇빛을 쐬었다. 그때 자주 듣던 노래를 오랜만에 다시 들어보았다. 그때 방영하던 힙합 오디션 프로그램에 나온 노래의 ‘내 삶은 빛나 VVS, VVS’ 같은 가사를 들으며 빛나는 해를 찍었다.


햇빛을 쐬는 게 몸에 좋다고 한다. 세로토닌이라는 호르몬이 분비되어서 기분이 좋아지고 밤에 잠도 잘 자면서, 뼈도 심장도 튼튼해지고 면역력도 좋아진다는 것이다. 이 무슨 만병통치약 같은 이야기였지만 연구를 통해 밝혀진 사실이라 했다. 심지어 돈 내고 사 먹을 필요도 없는 공짜 약이었다. 기분도 안 좋고 밤에 잠도 안 오고 건강하지도 않았던 지난겨울에는 만병통치약 같은 게 있었으면 했다. 그래서 하라는 대로 추운 날에 두꺼운 소매를 걷고 햇빛을 쐬었다.


그 후로 다 의미 없다고 느껴지면 햇빛을 쐬러 나가곤 한다. 당연히 만병통치약은 아니다. 해를 뚫어져라 본다고 어떤 통찰이 오지는 않는다. 오히려 소매를 걷고 떨다 보면 뭐하는 짓인가 싶다. 다시 시작할 의욕은 거기서부터 생긴다. 별 의미 없이 떠 있는 해를 보며 볕을 쬐면 기분이 좋다. 내일도 해가 뜬다. 내일도 의미를 찾지 못해도 기분은 좋을 수 있는 것이다. 사실 의미는 찾지 말아야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런 생각을 하다 보면 아무 의미 없는 일들을 다시 마주할 마음을 갖고 돌아올 수 있다.



갓 입대해 육군훈련소에서 훈련할 때, 느리게 흐르는 시간이 갑갑했다. 하루하루를 세는데 답이 없다는 생각만 들었다. 지금은 다 잊어버렸다. 그런데 아직 선명하게 기억나는 장면이 있다. 하나같이 빡빡 깎은 머리에 똑같은 옷을 입은 동기들과 함께 샤워장에서 씻고 나오다가, 문득 고개를 들고 보았던 노을 진 하늘이다. 왜 아직 기억나는지 이유를 헤아려보다 그만두었다. 알 수 있는 건 갑갑했던 날들은 다 잊고 그 하늘만 기억한다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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