있는 그대로와 배려에 대하여

자기 존중과 타인존중, 솔직함과 사려 깊음의 균형

by 빛의 조각




서점에 진열되어 있는 자기 계발, 에세이 서적들을 쭉 살펴보면 "있는 그대로"라는 말을 심심찮게 볼 수 있다.


'있는 그대로를 인정하고 사랑하라. 있는 그대로 나답게. 있는 그대로여도 괜찮아' 등..
이 말은 자신의 '자존감'을 지키라는 얘기처럼 들린다.
자존감이 낮아 힘들어하는 사람들을 보면 자신의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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뭇사람들처럼 나도 자존감이 낮은 편이다.
나는 나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했다. 스스로 만족하지 못하고 남들과 비교하며 늘 부정했다.
부족한 자존감을 채우기 위해 나는 변화를 추구했다.

하지만 꾸준히 자기계발하고 관리하는 이면엔
지금의 나를 발전시킨다는 의미보단 못난 진짜 나를 감추고 숨기고 싶었던 게 더 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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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말에 친언니랑 술 한잔 하며 대화한 적이 있다.
이야기는 가벼운 근황부터 시작됐지만
술 한잔 한잔 기울이면서 가족과 과거, 서로의 진솔한 이야기를 꺼냈다.




"언니, 난 나 자신을 사랑하는 법을 몰라.
자존감이 낮아. 사람들은 나한테 그럴 필요 없다고 그러는데 못 받아들이겠어. 나도 이거에 대해 왜 그런지 많이 고민하고 생각해 봤어.
근데 지금 내 성격과 모습은 어릴 때 영향을 많이 받은 것 같아. 난 어릴 때 가족한테 부정당한다는 느낌을 많이 받았어.
그저 있는 그대로 사랑받고 싶었어."


"근데..... 네가 말하는 있는 그대로라는 게 뭐야?
들리기엔 난, 네가 네 몸 편하게 있고 싶다는 거 같은데?
이건 있는 그대로를 인정하고 아니고를 떠나서
배려의 문제라고 생각해.
예를 들어서 세탁기 돌리고 빨래 개는 거?
하라고 해도 넌 바로 안 하잖아.
"알겠어. 좀 있다 할게."라고 하면서 안 하지 않았어?
난 바로바로 하는 게 중요해.
물론 넌 시간이 좀 더 필요하다고 하지만
있는 그대로 인정해 달라는 거 너 몸 편하게 있자는 거 아니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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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렵게 꺼낸 얘기,
돌아오는 대답에 순간 머리가 띵해졌다.
말하려는 의도와는 다른 반응이었지만 언니가 하는 말엔 일리가 있었고 100% 다 부정할 순 없었다.


'배려?... 배려....'















결국 서로의 시간엔 차이가 있었고 표현에 문제가 있었음으로 이야기는 종결됐지만,
언니가 던진 '배려'라는 그 화두가 며칠간 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언니가 말한 배려는 단순히 내가 행동을 하지 않는 문제를 지적하는 게 아니었다.

서로 다른 속도를 가진 사람들이 함께 살아갈 때, 배려는 '내 방식'이 아니라, '상대가 어떻게 받아들일지'를 생각하는 태도에서 비롯된다는 걸 의미했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있는 그대로'라는 건 '아무것도 안 하는 상태인 있음' 그 자체를 말하는 걸까?
그렇게 따지면 있는 그대로 인정받는 사람이 몇이나 있을까?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사랑하는 것이 올바른 관계의 방향이라고 하지만
사실 나조차도 상대방을 볼 때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사랑하지 못할 때도 많았다.


특히 남자친구 사귈 때 사람 자체가 좋아도, 때로는 아무런 꾸밈없이 나를 마주하는 그 사람을 보면서 왜 자신을 가꾸지 않을까 답답하면서 짜증 나기도 했다. 그리고 생각해 보면 만나기 싫은 사람들 유형엔 자신의 부족한 점, 타인에게 상처가 될 수도 있는 뾰족한 점들을 "난 원래 이래"라며 합리화하고 고치려 하지 않는 사람들이었다.

몇 주간 이 의문에 사로잡혀있던 중, 집 앞에 한결같이 서있는 나무 한 그루를 보다 문득 해답을 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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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는 항상 그 자리에 있었다.
물론 모종 하는 경우도 있지만 뿌리내린 땅엔 늘 한결같이 존재한다.
햇빛을 받고 물을 마시며 영양분을 흡수하고 시간에 따라 점점 자라면서 가지와 잎을 내고 열매를 맺는다.
그렇게 나무는 그 자리에 항상 있다. 그러나 주변 상황은 늘 바뀐다.
비바람과 태풍이 찾아와 나무의 자리를 위협할 때도 있고
봄처럼 따뜻할 때도, 여름처럼 뜨거울 때도, 가을처럼 선선할 때도, 겨울처럼 몸서리치게 차가울 때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무는 죽지 않고 항상 그 자리를 지킨다.
다만 나무의 모습을 때에 맞게 바꾼다.


즉, 나무는 언제나 그 자리에 있지만 계절에 따라 변화한다.

변화한다고 해서 나무가 본래의 자기를 잃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스스로를 가꾸고 자라면서 더욱 단단해진다.

사람들은 이러한 변화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인다.
계절에 맞게 꽃 피우고, 잎을 떨구며 다음을 준비하는 나무의 모습을 보며 축제를 열고, 그 아름다움을 눈에 담아 간다.

하지만 나무가 건강하게 자라기 위해서는 가지치기가 필요하다.

무분별하게 뻗어나가는 가지를 정리해야 더 풍성한 성장과 균형 잡힌 모습을 유지할 수 있으며, 병충해를 예방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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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니가 말한 배려라는 건, 어쩌면 나무의 제멋대로 자라는 가지를 잘라내는 과정과 같지 않을까.
있는 그대로를 사랑한다는 것, 결국 '자존감'이라는 것은
아무런 노력과 대가 없이 날것 그대로의 모습을 의미하는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물론 생명 그 자체로 존귀하긴 하지만)



진정한 자존감이란, 수많은 세월과 풍파 속에도 자신의 자리를 지키며, 상황에 맞게 변화하고 성장하려는 노력과 함께 스스로를 존중하는 마음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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