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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린 Oct 21. 2024

나의 여름 과일은요 1

예전에 비해 집중력이 짧아졌다. 이게 다 임신 때문이라고 말하는 건 좀 지나친 것 같고, 원인의 큰 비중을 차지했다고는 말해도 될 것 같다. 민들레 홀씨만 한 작은 점이 있는 아기집을 확인하고, 반짝이는 심장 소리를 듣고, 새 생명이 태어나는 예상 날짜와 분홍 배지를 받기까지, 별다른 변화가 있지는 않았다. 신기하게 임신 확인서를 받은 이후부터, 기다렸다는 듯이 임신 초기 증상들이 시작되었다.


가장 먼저 찾아온 변화는 잠이었다. 그 당시 재학 중이었기에 한참 기말을 앞두고 여러 논문을 읽고 과제를 정신없이 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글을 읽다 보면 졸음이 쏟아지는 거다. 정확히는 글을 읽어서가 아니라 그냥 무작정 잠이 쏟아지는 거다. 머리를 기대거나 편안한 자세가 아닌 꼿꼿이 앉아 있거나 가만히 서있던 상태에서도 목이 휘청할 정도로 깜빡 졸기도 했으니 말이다. 그 정도로 잠에 취해 있었다.


게다가 누구나 알고 있는 유명한 임신 증상, 입덧이 찾아왔다. 나는 '입덧=토'라고 알고 있었다. 하지만 임신해 보니 입덧은 정말 사람마다 천차만별로 증상이 다양하다는 걸 알았다. 나의 경우는 '울렁덧'이었다. 한 번도 토한 적은 없다. 다만 계속해서 배를 타고 있는 느낌이다. 분명 나는 단단한 지면 위를 걷고 있고, 가만히 앉아 있는데도 바다 위에 출렁거리는 작은 배를 타고 있는 것처럼 어지럽고 울렁거렸다. 설상가상으로 임신 초기에는 기초 체온이 오르기도 하는데, 폭염이 이어지는 나날 속에 기초 체온도 오르고, 입덧 증상이 겹치니 모든 냄새에 그렇게 예민해질 수도 있다는 걸 처음 알았다. 감각에 초예민한 사람이 된 느낌이었다.


임신 초, 고통의 시간을 견디기 위해서는 내 주의를 전환시킬만한 가볍고 즉각적인 자극이 필요했다. 나는 가장 손쉽고 가벼운 방법인 핸드폰을 들었고, 그렇게 알고리즘의 세계에 빠져들었다. 하루 종일 나에게 권해주는 영상을 멍하니 이어서 보다 보면 시간이 놀랍게도 순식간에 지나가 있었다.


논문을 읽고 내용을 정리하고 내 생각을 덧붙이고, 글을 쓰고, 토론하고. 정말 힘들게 시간을 투자하고 훈련해서 습관을 만들어 두었는데, 무너지는 건 어찌나 한순간이던지.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마음 편하게 쉬는 것만으로도 이미 충분히 훌륭한 임산부라는 주변의 목소리에 죄책감 없이 그 달콤함에 빠져들었다.


시간이 흘러 입덧이 가라앉고 컨디션이 안정되는 중기에 접어들자 슬슬 책 생각이 났다. 참 신기하다. 내가 좋아하는 일은 시키지 않아도 자연히 한다. 휴학과 동시에 논문을 읽고 연구하는 건 멈추게 되었지만, 도서관을 방문하고, 책을 고르고, 읽고, 쓰는 행위는 다시 이어졌다. 달라진 점이 있다면 책 취향일까. 이전에는 사회과학 도서를 많이 읽었다. 예리한 시선으로, 예민하고 적확한 언어로 사회 현상을 바라보는 작가들의 야무진 글이 짜릿했고, 그 탄탄한 논리를 따라가는 게 즐거웠다. 물론 지금도 관심은 있으나 아무래도 주제가 가볍지 않고 글이 길다 보니 책을 빌려오더라도 끝까지 읽지 못하고 혹은 앞부분 몇 장만 읽고 반납하는 경우가 잦다. 그래서 문학으로 눈을 돌렸다. 소설도 읽어보고 에세이도 읽어보니, 에세이에 자꾸 손이 간다. 한 편의 호흡이 길지 않아 집중에 대한 부담이 적고, 누군가가 나에게 자신의 삶을 도란도란 이야기해 주는 느낌이라 외롭지 않다.


최근 내 출퇴근 길을 함께 한 에세이, '우리의 여름에게'. 에세이만 집중해서 여러 권 읽다 보니 나에게도 나름 취향이라는 게 있구나 싶다. ‘아 이 에세이 참 좋다!' 하는 경우 저자의 소개나 저자를 찾아보면 시인인 경우가 대다수다. 이 책도 표지와 제목에 끌려서 우연히 빌렸는데, 첫 에피소드를 읽고 책날개를 확인해 보니 역시나, 시인이었다. 최지은 시인 덕분에, 가을로 넘어가는 이 시점에 나의 여름을 떠올려 볼 수 있었다.


지하철에서, 버스에서 읽었다


책 속 여러 이야기 중, 나도 이걸로 글을 써봐야겠다, 생각했던 작가의 질문이 있다. 바로


'당신의 여름 과일은 무엇인가요?'.


질문을 보자마자 나의 임신 초기, 무더웠던 여름이 떠올랐다. 몸에 열이 오르고 입덧으로 울렁거리는 탓에 무엇 하나 먹기 쉽지 않은 그 시기를 무사히 견디고 지나갈 수 있게 해 준 과일, 그리고 옆에서 묵묵히 알뜰살뜰 나를 챙겨주었던 내 편. 그 이야기를 적어보고자 한다.


신나게 쓰다 보니 앞이 길어졌다. 과일 이야기는 다음 글에 이어서 쓰는 걸로. 오늘은 여기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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