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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린 Oct 23. 2024

나의 여름 과일은요 2

한 손에 쥐면 꽉 차게 들어오고 보송보송하고 단단한 과일. 코에 가까이 가져가면 달큼한 향이 나는 뽀얀 과일. 껍질 채로 먹으면 나는 입술이 따끔따끔 빨갛게 부풀어올라 섬세하게 껍질을 깎아서 먹어야만 하는 과일. 무엇일까요?


암막 커튼 사이로 강렬한 여름 햇살이 성가시게 느껴지는 주말 아침. 한껏 게으름과 여유로움을 즐길 수 있는 날의 일화이다. 임신 전에는 아침을 준비하기 위해 내가 부산을 떨었다면, 임신 후에 주방에서 냉장고를 열고 식사를 준비하는 일은 오롯이 남편의 몫이 되었다. 입덧이 있는 임산부를 먹이는 일은 난이도가 상당하다. 아침을 먹을 생각이 전혀 없는 나를 보고선 남편이 스무고개를 시작했다.


"아침으로 먹고 싶은 거 있어?"

"아니 없어. 그냥 안 먹을래."

"그래도 먹어야지. 내가 나가서 빵 사 올까?"

"아니 빵 안 먹을래."

"어제 베이글 먹고 싶다고 하지 않았어?"

"지금은 별로..."

"그럼 스크램블 에그 해줄까?"

"아니 괜찮아."

"시리얼이랑 우유 먹을까?"

"아니, 우유.. 생각만 해도 울렁거려."

"그럼 두유?"

"더 싫어.."

"미안. 그래도 뭐라도 먹어야지. 아! 어제 사온 사과 먹을래?"

"아니, 사과도 별로."

"그럼, 뭐가 있을까. 복숭아??"

"복숭아? 음.. 그래. 복숭아는 괜찮을 것 같아."


기나긴 실랑이 끝에 통과한 복숭아. 내 입에서 '괜찮다'가 나오자마자 남편이 기쁨으로 가득 차서 외쳤다.


"소금아! 아빠 문제 맞혔다!! 이게 얼마나 어려운 건지 알아?! 와!!!" (소금이는 태명이다.)


이불을 박차고 일어나 엉덩이를 덩실거리는 모습에 나도 웃음이 절로 나왔다.


"근데 우리 집에 복숭아 다 떨어졌어."

"사 오면 되지."

"아직 과일가게 문 안 열었어. 마트도 아직 안 열었을 텐데."

"시장은 열었을 거야."

"시장까지 다녀오려고????"

"응."


남편은 별 일 아니라는 듯 대답하며 외출복으로 갈아입었다. 별 일이 아닌데. 시장은 우리 집에서 걸어서 편도로 15-20분. 왕복으로 30분이 넘는 거리다. 같이 가자 했더니, 시장에는 각종 식재료 냄새가 섞여 있으니 울렁거릴 거라고. 자신이 빨리 뛰어서 다녀오겠다고 했다. 그 사이 먹고 싶다던 내 마음이 또 변할 수 있으니까. 누워서 좀 더 쉬고 있으라는 말을 덧붙이며, 남편은 모자를 푹 눌러쓰고 손 흔들며 서둘러 나갔다. 적막감이 감도는 집 안. 마음이 몽실몽실한 채로 다시 까무룩 잠들었던 것 같다.


나는 여름에 항상 수박만 먹곤 했는데. 정말 신기하게 올해는 수박이 전혀 먹고 싶지 않았다. 엄마가 예쁘게 잘라 통에 담아다 준 수박을 한 조각 먹은 게 이번 여름 수박의 처음이자 끝이었나. 오히려 새콤한 맛이 싫어서 잘 먹지 않았던 자두와 천도복숭아. 껍질에 알레르기 반응이 있기에 꼭 깎아 먹어야 하고, 비싸서 잘 사 먹지 못했던 복숭아. 내가 낯설게 느껴질 정도로 이 과일들과 가깝게 지냈다. 새콤한 과일을 원 없이 먹었던 여름. 정확히 말하면 계속 먹고 싶고, 양껏 먹을 수 있는 게 과일뿐이었던 여름. 메슥거림을 가라앉힐 수 있었던 건 과일이었을까, 먹고 싶다는 과일을 바로 사다 주고 깎아줬던 남편의 사랑이었을까.



과일로 가득했던 임신 초기


임신 기간 내내 한결같았던 남편. 내가 무언가가 먹고 싶을 때마다 귀찮은 내색 없이 반갑게 반응하고 발 빠르게 움직였던 모습들. 누군가 나의 필요와 욕구에 즉각적으로 반응하고 수용해 준다는 느낌이 이런 거구나, 원 없이 느꼈다. 내내 고마웠다.


아, 그리고 도시락도 빼먹을 수 없지. 학기 말에 더위가 더해져 입덧이 극으로 치닫고 있을 때, 학교 급식실 공사가 시작되었다. 오히려 음식과 사람 냄새로 가득한 식당에 가지 않아 다행이기도 했지만, 내내 개인 도시락을 챙겨 다녀야 하는 번거로움이 발생했다. 서울에 살지 않지만 서울로 출퇴근을 해야 하는 직장인이라면 모두가 알 거다. 아침 시간은 무척이나 부지런해야 한다는 거. 시간의 흐름은 가차 없으니까. 특히 출근길 5분 차이는 지각을 좌우할 정도로 교통량과 사람의 밀도 차이가 크니까. 그런데 도시락이라니.


내 남편은 아침에 굉장히 약한 사람이다. 알람 소리를 잘 듣지도 못하고 일어나기까지 시간이 오래 걸린다. 그런 남편이, 아침에 내 도시락을 챙겨야 한다며 눈도 제대로 못 뜬 채로 냉장고 문을 열고, 과도를 쥐고 과일을 깎아주었다. 내가 냉장고 문을 열기 힘들어하는 걸 알기에, 항상 개수대 앞에 서서 과일을 깎는 건 남편의 몫이었다. 남편은 시간이 지날수록 과일 깎기 달인이 되어 껍질을 얇고 길게 늘이기 기술도 선 보이기도 했다.


아침을 힘들어하는 사람이 잠을 이겨내고, 부지런히 과일을 깎고, 도시락을 챙기고. 잠들기 전 먹고 싶은 메뉴를 먼저 묻기도 하고. 제법 손이 많이 가는 메뉴를 말한 날에는 30분 일찍 알람을 맞추고 새벽부터 도시락을 챙겨주기도. 자신이 회사를 돌아가더라도 내가 사람 많은 버스를 타지 않도록 가까운 지하철 역까지 데려다주고. 여름날의 모든 시간이 남편에 대한 고마움으로 가득하다.


복숭아, 복숭아 그리고 또 복숭아.



'올여름 어땠나요?' 나에게 묻는다면, 무더움과 울렁거림을 가장 먼저 대답할 거다. 임신 초기라 임산부 배지 외에는 내가 임산부인 걸 알 수 있는 외양적 변화가 없었기에 배지를 최대한 잘 보이게 빼고 임산부 석에 앉았던 어색한 내 모습. 도로 위 진동이 고스란히, 강렬하게 느껴져 집 가던 중간에 내려 버스정류장에서 한참을 울렁거림을 달랬던 퇴근길. 눈을 질끈 감고 잠을 청하려고 애써도 울렁거림이 크게 느껴지고, 이리저리 뒤척여도 편하지 않아 얼음을 문 채로 지쳐서 잠들었던 나날들.


서럽고 울렁거렸던 기억들이 먼저 흘러가고 나면 밑바닥에 찐덕하게 달라붙어 있는 달콤한 기억이 보인다. 주변 사람들로부터 축하받고, 돌봄 받고 사랑받았던 기억. 특히 내 옆에서 모든 일상을 함께 했던 견고한 내 편, 남편.


임신 중에는 작은 일에도 쉽게 울고 웃게 된다더니. 나는 많이 웃고 많이도 행복했다. 그걸 당연히 여기지 않고 매번 꼼꼼히 기록해 둔 과거의 나 덕분에 지금도 그 시기의 일기장을 펼치면 남편의 이름과 '고맙다'라는 표현으로 가득하다. 기억은 어렴풋하게 희미해지지만 기록은 뚜렷하고 선명하다.


나의 여름 과일이야기는, 여기까지.

당신의 여름 과일은 무엇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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