뇌간의 깊은 곳 숨뇌의 하얀 점
금요일 저녁 6시가 되었다.
사무실 컴퓨터에 하던 작업을 저장하고 회사 사람들의 눈치를 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들 즐거운 주말 보내세요”
마치 즐거운 계획이 있는 것처럼 서둘러 인사를 하고 나왔다.
1층 주차장에 있는 차의 트렁크를 열어 출근할 때 싸둔 짐가방만 꺼내 지하철 역으로 향했다.
'지금 회사에서 출발해. 장조림이랑 김이랑 좀 챙겨가는데 다른 거 뭐 먹고 싶은 거 있으면 알려줘. 사갈게'
문자를 보내며 혜화역으로 가는 열차 시간을 확인했다.
'안녕하세요. 저 지금 출발하면 7시 반정도면 도착해요. 애들 아빠 한 시간 정도는 혼자 있어도 괜찮으니 먼저 들어가 보세요. 일요일 오후 1시까지 다시 와주시면 돼요. 비용은 지금 바로 입금해 드릴게요. '
간병인 아저씨에게 문자를 보냈다.
힘이 좋은 이번 간병인 아저씨가 혹시 다른 환자를 알아볼까 걱정이었다.
덩치가 큰 남편을 흔쾌히 맡을 간병인은 많지 않았다.
집에 있는 아이들이 눈에 밟혔다.
'별일 없지? 엄마 아빠한테 갔다가 일요일에 올 거야. 동생들 데리고 할머니네가서 저녁 먹고 와'
'응 알았어.'
큰아이가 보낸 짧은 답문자에 코끝이 찡해졌다.
114병동.
퉁퉁 부은 얼굴의 남편이 나를 보고 활짝 웃었다.
혈장교환술¹ 부작용이었다.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일주일의 긴장이 풀렸던 걸까,
아이들에 대한 미안함과 남편에 대한 안쓰러움 때문이었을까.
남편은 괜찮다며 나를 달래주었다.
그러는 사이 Medulla(숨뇌)²에 있던 하얀 점이 사라졌다가 다른 모양으로 번지고 있었다.
MRI 판독에서는 탈수초성³ NMOSD⁴나 염증 가능성이 높다는 의견이 나왔다. 그러나 염증성 치료를 담당하는 신경과에서 가능한 치료를 모두 시도했음에도 효과가 없었다. 신경과에서도 더 이상 할 수 있는 것이 없자, 다시 신경외과 협진을 진행했고, 가능성이 낮지만 림프종⁵일 수 있다고 했다. 그러나 림포마의 근거로 확인되는 IGH⁶ 검사는 음성으로 나왔다.
신경외과 교수 중 한 명이 환자가 원한다면 조직검사를 해볼 수 있다고 제안했다.
하지만 호흡을 비롯한 자율신경을 관장하는 숨뇌는, 건드리기만 해도 생명에 치명적인 위험이 따르는 부위였다. 남편이 생검 중 사망해도 괜찮다는 동의서에 서명하지 않으면 진행할 수 없는 검사였다. 설령 생검을 통해 정확히 알아낸다 해도, 림프종이 아니라면 남은 가능성은 뇌간교종⁷일 텐데, 치료할 방법이 없는 신경교종을 확인해 봐야 무슨 소용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남편은 '죽을 때 죽더라도 뭔지나 알아보고 죽자' 라며 한번 해보자고 했으나 동료의사들 모두가 이를 만류했다.
결국 우리는 생검을 안 하기로 했다.
대신 남편은 림프종 치료인 MTX⁸를 시도해보고 싶다고 했고, 혈액종양내과에서 치료를 진행하겠다는 연락이 왔다.
아무도 모른다는 것이 무서웠다.
알 수 없다는 것,
무언가 있는데 그것이 무엇인지 모르는 것,
그것이 무엇일지 떠올릴 때마다 가슴이 서늘해졌다.
혈액종양내과의 협진으로 항암치료를 해보았지만 남편은 나아지지 않았다.
이제 남편은 음식을 먹다가 사례 걸리는 일이 잦아졌다.
연하장애⁹까지 오다니 절망적이었다.
호흡기 내과 교수인 친정오빠는 얘전부터 방사선 치료를 한번 해보라고 이야기하곤 했었다.
"RT(방사선 치료)한번 쳐봤으면 좋겠어. Lymphoma⁵면 효과가 있을 거야. MTX⁸로 효과를 못 보는 경우에도 RT는 잘 먹어서 좋아지는 경우가 있어. 물론 폐암 하고는 다르겠지만. Glioma⁷라고 해도 늦출 수 있을 거야."
이제 더 이상 거동할 수 없는 남편을 두고, 나 혼자 병원 상담을 다니기 시작했다.
한 교수님이 신경교종에 준한 방사선 치료를 시도해 보겠다고 제안하셨다. 완치는 어렵지만, 그래도 종양의 성장을 늦출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교수와의 상담내용을 녹음해서 남편에게 들려주었다.
하지만 남편은 다시 중환자실로 들어갔다.
그즈음 막 청소년기를 지나는 큰아이가 길을 잃고 방황하기 시작했다.
나는 이제 누구부터 구해야 할지,
아직 어린 나머지 아이들은 괜찮은 건지,
절대 놓칠 수 없는 로프 다발을 움켜쥐고,
얼마나 더 버틸 수 있을지,
아득한 하늘만 바라보고 있었다.
아래는 차마 볼 수 없었다.
내 발끝에는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힘주어 이 무게를 버티려면 몽돌이라도 밟고 서야 하는데,
허공 속에 서 있는 듯, 아무것도 발에 닿지 않았다.
*혹시나 검색으로 이 글이 노출 됐을 때 보다 정확한 정보로 오해가 없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자세히 적어봅니다. 가끔씩 예전에 제가 정보를 구했던, 남편과 비슷한 케이스가 없는지 찾아 다녔던, 여러 환우회 카페에 남긴 저의 글들에, 남편이 어떻게 됬는지, 어떤 병으로 확진을 받았는지 묻는 글들이 올라오곤 합니다. 실망시켜드릴까 차마 답글을 남기지 못한 글들이 많습니다. 간절한 마음으로 치료방법을 찾는 분들께 누가 되지 않았으면 합니다.
1. 혈장교환술 Plasma exchange
혈장 안에 있는 자가면역항체, 면역복합체, 독성 물질 등을 제거함과 동시에 새로운 혈장단백(알부민 등)을 보충하는 치료.
2. 숨뇌(Medulla)
뇌의 가장 아래쪽에 위치한 뇌간의 아래 부분이다. 척수와 바로 연결되어 있으며, 생명 유지에 필수적인 호흡, 심박수, 혈압 조절 등의 중요한 기능을 담당한다.
3. 탈수초성(demyelinating disease)
신경의 탈수초현상(신경을 전선이라고 비유하면, 전선을 감싸는 막이 벗겨져 신호 전달이 안 되는 현상)으로 신경막이 손상되어 신경전달에 문제가 되는 현상. 횡단성 척수염, 시신경척수염, 다발성경화증 등등이 포함된다.
4. 시신경 척수염 스펙트럼 장애(neuromyelitis optica spectrum disorders: NMOSD)
자신의 면역이 시신경, 척수, 뇌를 포함한 중추 신경을 공격하여 발생하는 병.
5. 림포종 lymphoma
면역세포가 암세포 변이해 증식하는 종양으로 비교적 항암제에 잘 들어 관해(암 완치) 율이 높다.
6. IGH 검사
림프종 진단에 있어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검사 중 하나. Immunoglobulin Heavy chain의 약자로, B세포가 만들어내는 항체의 중요한 구성 요소이다. 림프종 세포 역시 B세포에서 유래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이 세포들이 만들어내는 IGH 유전자의 변화를 분석하여 림프종의 종류와 특성을 파악할 수 있다.
7.뇌간교종(Brainstem Gliomas)
뇌종양의 일종으로 뇌간이라는 위치에 종양이 있으면 수술로 완전 절제하는데 한계가 있기 때문에 예후가 불량한 암이다.
8. MTX (methotrexate)
Vincristine, Procarbazine과 함께 척수강내 항암 주사요법으로 사용대는 대표적인 항암제.
류마티스 관절염, 원발성 중추신경계 림프종(Primary Central Nervous System Lymphoma)에도 사용된다.
9. 연하장애
음식물을 삼키데 관여하는 구강, 인두, 식도의 근육들 까지 마비되면서 음식물을 넘기지 못하는 상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