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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쥴 Aug 28. 2023

이미 생을 다 하다

Prologue

DOA Dead on Arrived


급작스레 나쁜 일이 생겼을 때 예전의 어떤 대화가 불현듯 떠오르며 그때의 말이 저주가 되어 눈앞에 펼쳐지는 느낌을 받은 적이 있는가?


응급의학과 의사인 남편은 나에게 종종 응급실에서 일어나는 일에 대해 이야기해 주곤 했었다.


응급실에서는 환자가 죽어서 오는 경우가 종종 있어
Dead on Arrived.  
DOA라고 하지.

앰뷸런스에서 죽은 환자가 내려지면 보호자들에게 이미 사망했다고 설명을 해.

그래도 보호자가 원하면 CPR(심폐소생술)을 하지.

희망을 갖고 온 가족들 앞에서 의사가 아무 조치도 못 하고 사망선고를 내리는 건 어려운 일이거든.
뭐라도 좀 해줘야지…

의사는 죽은 자가 다시 살지 못한다는 걸 알지만,
가족들이 그것을 받아들일 수 있을 때까지 적당히
CPR을 하며 보호자들 표정을 살피지.
언제쯤 저들의 얼굴에 이제 그만해도 된다는 싸인이 떨어질지..  그 순간을 잘 봐야 하거든.

그런데 가끔 이미 사망해도 의사가 죽을힘을 다해 심폐소생술을 하는 경우가 있어.

꼭 다시 살려내야 할 것 같은 죽은 자.

30,40대 남자 DOA 환자 중에 아내로 보이는 여자와 어린아이들이 커튼 뒤에 기다리고 있으면 우리는 쉽게 포기하지 않아.

‘제발 제발 살아나라’  
마음속으로 부탁하며 남자의 가슴을 누르지.

의사도 이 남자가 이미 죽은 걸 알지만,
환자의 갈비뼈가 부러질 정도로 힘껏 누르면서,

‘기적이 있다면 지금 나타나야 해.
아내와 어린 자식들이 있으니 꼭 일어나야 해!‘
라며 머릿속으로 외치지.


남편이 나에게 해주었던 이야기가 계속 머리를 맴돌며 가슴을 죄어왔다.

다른 집 가장을 열심히 살려내던 남편이 지금 병원 침대에 누워있었다.


침대 머리 위에는 남편 이름과 함께 M / 42세라는 환자표가 붙어있다.

집에서는 세명의 어린아이들이 엄마와 아빠가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환자를 살려내던 남편이 정작 저렇게 누워서 아무것도 못하고 있다니 기가 막혔다.

더 암울한 건 어린 자식이 셋이나 딸린 남편을 고칠 수 있다는 의사가 한 명도 없다는 것이다.

동료 의사, 선후배, 은사님 모두 마찬가지였다.


'이런 건 본 적이 없어.‘

‘ㅇㅇㅇ교수님에게 물어봤어?‘

‘나는 뭔지 모르겠어.’


우리가 만난 모든 전문의들의 표정은 덤덤했다.

마치 DOA환자를 대하듯 나와 남편의 눈치만 힐끗힐끗 봤다.


약간의 발목 끌림에서 시작된 남편의 마비 증상은 3년에 걸쳐 서서히 진행되어 목도 가누지 못하는 상태가 되었다. 원인도 알 수가 없어 제대로 된 진단명이 없었다.




변하지 않는 것은 없다.


처음엔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그러다 어느 날부터인가 남편의 걸음걸이가 불안해 보였다.


지팡이를 구해다 놓자 지팡이를 집고 다녔다.

목발을 가져다 놓자 며칠 뒤 목발을  쓰기 시작했고 곧 보행 워커, 휠체어가 없이는 다닐 수 없게 되었다.


어느 날부터인가 혼자 침대에서 일어나지 못했고,

어느 날부터는 혼자 샤워하는 것이 어려워졌고,

어느 날부터는 혼자 화장실에 앉지 못했다.


젓가락질이 어려워져 포크를 사용하게 됐지만 곧 포크조차 들 수 없게 되었다.


고통스러운 시기였다.


불안함에 뒤덮여 있었던 시간이 지난 뒤 원인과 치료법을 찾아 한참을 헤매다 곧 지갑이 텅 비게 됐다.

나는 필사적으로 직장을 구해 남편과 아이들을 부양해야만 했다.


희망고문으로 너덜너덜 해지다가,

결국 더 이상 이전의 삶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것을 받아들이게 된 시간들이 차례로 흘러갔다.




환자의 위치에서게된 남편은 본인을 대하는 의료진들에게 부담이 되지 않기 위해 세심하게 신경 썼다.

하지만 우리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남편의 몸은 더욱 굳어만 갔다.


그 과정에서 내 삶의 철학과 가치관은 남편의 병 진행보다 훨씬 빠르게 변했다.




나는 서울 강남에서 유년시절을 보내다 명문대학에 진학했고 남편을 만났다.

우리는 사랑스러운 아이 셋과 함께 남 부럽지 않은 가정을 꾸렸다.

부족함을 몰랐던 나의 삶과 가치관은 한순간에 무너졌다.

새롭게 선택해야 할 일은 많았고 아이들과 남편의 삶을 유지하기 위한 결정의 기준이 되는 나의 가치관은 점점 달라졌다.


당연하게 여겼던 것을 놓아주어야 했고 그 자리를 새로 발견한 가치들로 채웠다.


'남편이 걸을 수 있음'에서

'남편과 얘기할 수 있음',

'남편을 만질 수 있음'

그리고

'그저 살아 있음'에 가치를 두며 행복을 느꼈다.


종교와 신념, 아이들 교육관도 너무나 쉽게 바뀌었다.

절대 불변일 것 같던 가치들을 손바닥 뒤집듯이 갈아치웠다.


내가 할 수 있는 선택의 폭은 점점 좁아졌지만 그 선택 기준은 단순해졌다.

남편, 그리고 우리를 닮은 세 명의 아이들이 있었다.

예전이라면 전혀 안 했던 선택들을 우리 가족을 위해 했다.


안락한 잠자리 대신 간병인 보조 침대를 펼쳤고,

남편이 먹다 남은 환자식을 전자레인지에 돌려 먹었다.


생계를 위해 새로운 업무를 파악을 하며 아무도 없는 회사에서 자정을 넘겼고,

나이 많은 상사의 회식자리 실수도 웃어넘겼다.

나이 어린 상사의 공개적인 실언에도 침묵했고,

부하직원의 뒷담화도 못 들은 척 흘렸다.


집주인에게 계약연장을 해달라고 빌었고,

아이들 중고 교재를 구해 지우게로 답안을 지워주었다.


시련은 아이들 세명을 두르고 있던 울타리의 모양도 바꾸었다.

때때로 세 아이들은 서로의 울타리가 되어 엄마 아빠가 없는 시간들을 버텨냈다.




마법의 주문


고맙게도 아이들은 힘든 시간을 견뎌내며 또래답지 않은 다정함을 보여주었다.

힘들고 어려운 순간마다 내게 힘을 주던 것은 바로 세 아이들이었다.


혼자 남편 간병과 생계 활동을 하며 가족을 모두 잘 챙기고 있는 건지 나 자신도 확신할 수 없었다. 그렇게 버거웠던 시간, 지치고 힘든 나를 다시 일으켜 세워주는 존재들도 바로 아이들이었다. 세 아이들은 쉽게 어두워지는 나의 마음에서 꺼지지 않고 계속 반짝였다.


아이들은 저녁이 되면 어김없이 문자를 보냈다.


내 핸드폰에는 아이들로부터 받은 '엄마 언제 와'메시지가 수백 개가 있다.

퇴근길에, 바쁜 회의 중에, 분노의 물결이 치던 순간, 절망과 좌절에 혼자 울던 때, 어김없이 메시지 알림이 울렸다.


메시지에 적힌 다섯 글자는 심란한 마음을 정화시켰다.

하루종일 이리저리 치이며 한없이 초라해졌던 나를 세 아이의 엄마로 변신시켜 없던 힘도 끌어올려 충전시켰다.


나를 깨우는 마법의 주문.

'엄마 언제 와'



"왜 살아야 하는지 아는 사람은 그 어떤 상황도 견딜 수 있다."¹


난 슬픔에 잠겨있을 수 없었다.

어쨌거나 살아내야 한다.



1. 니체의 말 : 빅터 프랭클의 "죽음의 수용소에서"에서 재인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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