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에 일어나 쓰다.
아이들을 내가 보는 날이었다.
한 게임회사가 해운대 센텀에 만든 큰 실내 놀이터에 아이들을 데리고 갔다.
아이들이 노는것을 지켜보던 나는 오랜만에 아버지를 뵈러 잠깐 그곳을 나왔다.
오래걸리지 않았다.
아버지는 약국 조제대에 계시다가 문을 열고 들어선 나를 발견하시고는 환하게 웃으셨다.
아버지는 그 작은 공간에서 30년을 보내셨다.
아버지의 머리는 이제 하얗게 세어 있었고 얼굴 가득히 퍼지는 아버지 특유의 웃음을 오랫만에 보니 좋았다.
내가 자라며 아버지와 대화했던 순간들은, 빛나는 대화의 시간도 있었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가 더 많았다.
아버지와 이렇게 편안하게 이야기 한 순간은 많지 않았다.
나는 긴 사춘기를 지낸, 인생의 길목에서 항상 흔들려온 삐딱하고 제멋대로인 아들이었기 때문이다.
한때는 내 안에서 아버지의 모습을 발견하는 것이 그렇게도 불편하고 싫었다.
그리고 머리가 굵어지면서 그 미움은 아버지에게 투사되었다.
분명히 나는 좋은 아들이 아니었다.
그러나 이제 오래전 일이다.
세 아이들과 세월의 덕분으로 나는 아버지를 이해할수 있을 만큼, 충분한 나이를 먹었다.
아버지와 단 둘이 보내는
손님없는 약국의 평일 오후,
깔끔하신 아버지가 항상 신경쓰셨던
잘 닦여 깨끗하고 투명한 창문으로 내가 어린시절을 보내온 익숙한 골목 들이 보였다.
공기는 청명했고
매대위에 올려놓은 내 손등위로 쏟아지는 봄볕은 따듯했다.
아버지는 손주들은 어디에 있냐고 물으셨고,
바로 위에서 자기들끼리 아주 잘 놀고 있다고 대답했다.
아버지는 다시 한번 깊게 주름을 지으며 흐뭇하게 웃으셨다.
동생들에 대해서도 서로 이야기 했다.
아버지의 희망을 저버린 나와는 달라, 가업인 약업을 이은 동생들.
둘다 약국을 한다고, 아이를 키우며 이런저런 일이 있었다는 이야기를 했다.
그런데 아버지도 아시다시피, 아버지 때처럼 약사가 좋은 직업은 아닌것 같아서 여러가지 생각을 하는 것 같다고 조심스럽게 말하고
아버지는 쓸쓸히 웃으셨다.
예전에 아버지는
내게 딱 한번,
아버지가, 큰아들이 자기가 평생을 바쳐온 가업을 잇도록 바라는게 잘못된 일이냐고 물어보신 일이 있다.
내 진로와 선택들에 대해 아버지가 답답해 하셨던 첫번째이자 마지막 기억이었다.
분명 나는 좋은 아들이 아니었다.
그리고 이제 그런 일들을 끄집어 내기에는 너무 많은 세월이 지나버렸다.
그런데
문득
매대위의 신문들을 훑던 내 손에 보드랍고 따뜻한 것이 느껴졌다.
그리고 그때 깨달았다.
내가 사는 부산과 아버지가 평생을 보내신 종로5가 약국 골목은 너무나 멀리 떨어져 있다는 것을.
아버지는 저런 백발을 가져보신 일이 없다는 것을.
아버지는 내 결혼도, 손자도 목격하지 못하고 떠나셨던 것이다.
이불속에서 막내의 따뜻한 손이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