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 주위 사람들에게는 암이라는 사실을 알자마자 1차로 나의 상황을 알리고*① 아직 말하지 못한 친정엄마와 아이들에게 이를 이야기하는 마지막 관문만이 남아있다. 일할 때는 아이들 봐주느냐 늘 우리 집에 살다시피 하셨는데, 휴직 중이기도 하고 엄마도 연말 행사들이 많으셨던 터라 꽤나 오랜만의 방문이다. 이야기를 듣고 집에 돌아가시는 길의 마음이 너무 무거우신건 아닐까 싶어 내가 친정집으로 갈까 싶다가 아이들 오랜만에 얼굴 보러 오라는 핑계 겸 태연하게 전화를 걸었다.
평소와 다를 바 없는 대화와 행동들. 세밤을 자고 가시기로 한 엄마의 첫날과 둘째 날은 여느 때와 같다. 오전은 무슨 청소하러 딸 내 집 오는 잔다르크 마냥 한 손에는 식초, 한 손에는 마른 걸래 전투적인 자세로 온 집안 곳곳 심지어는 냉장고까지 뒤집어 말끔하게 닦는다. 아이들이 돌아올 쯤의 오후부터는 할미품 양쪽 공평하게 두 손주 녀석들에게 내어주며 밤새 이야기꽃 피우다 잠이 드는 바쁘디 바쁜 일정의 우리 엄마. 그리고 결전의 마지막날이다. 아침부터 요동치는 마음이 누그러지지 않는데 티를 안내려니 뭔가 더 뚝딱거리는 느낌이 든다. '뭔가 어색하지 않겠지? 평소와 똑같이 행동해야 해...'
평소와 다른 게 하나 있다면 할머니 오시면 거실에 너른 요를 깔아 양쪽에서 내가 더 옆에 있을 거야 티격태격하는 아이들 제쳐두고 오늘은 할머니 힘드시니 둘 다 제방 들어가 자자 타일러 잠들게 하고는 거실에서 평소에는 보지도 않는 티브이를 켜고 소파에 엄마와 무심한 듯 나란히 앉았다.
"엄마..."
"응?"
"나 수술받아"
"응? 왜 무슨 일인데"
"큰 건 아니고 갑상선이 좀 안 좋아서 떼기만 하면 된 데, 별거 아니야..."
적막이 흘렀다. 미리 틀어놓은 티브이에서 나오는 패널들의 농담이 서로의 불편한 공기를 메꾸어 준다. 조용히 두 뼘으로 눈물이 흐른다. 크게 흐느끼지도 펑펑 울음소리를 내지도 않았다.
"그거 뭐라고, 넌 아무 걱정 마 엄마가 있잖아"
"최서방이랑 애들 있고 엄마 있는데 뭐. 수술받으면 괜찮아"
엄마는 나를 와락 안았다. 참아왔던 눈물이 복받치듯이 펑펑 쏟아진다. 그렇게 한참을 엄마와 나는 아무 말 없이 울었다. 그 울음 속에서 서로의 대화가 그리고 마음이 오갔다. 불과 반년도 채 되기 전 정말 주위에서 유명할 정도로 다정하고 사이좋으셨던 엄마와 아빠는 갑작스러운 아빠의 담도암 판정으로 1달 만에 사별을 하셨다. 이미 힘겨운 나날들을 엄마 특유의 단단함으로 아닌 척 일상을 살아가고 있는 그녀에게 내 소식이 엄마의 마음을 무거운 납처럼 더욱 짓누를까 나는 너무 무서웠다. 하지만 그 엄마에게는 지금 이 순간 본인의 생채기도, 내 병의 정도도 그 어떤 것도 중요하지 않았다. 그냥 나는 엄마 앞에서 울고 있는 한없이 작은 딸이 되었다.
고민했던 것보다 쉬이 엄마에게 터놓고 나니 한결 마음이 더 편안해진다. 짝꿍에게 하루 양해를 구하고 (그는 더 좋았을지도?!) 오랜만에 거실에 너른 요를 깔고 엄마옆에 누웠다. 엄마와 서로 닿아 숨을 나누는 시간이 얼마나 값지고 감사한 일인지!
엄마품이 좋다. 오늘따라 더 따뜻해 어린아이마냥 마구 파고든다. 철없던 아이 때에도, 뜨겁고 호기로왔던 방랑의 스무살에도, 애 같던 애가 엄마의 인생을 사는 서른 즈음에도... 늘 고민을 마주할 때마다 별것 아닌 듯 털어내고 안착할 품이 되어 준 나의 엄. 마. 나보다 나를 더 믿는 사람들 덕에 일어날 수 있었던 기적 같은 순간들. 내 모든 날들이 이들을 통한 기적이었던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