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장 영어그림책 이야기 (1)

제1절 영어 그림책 친구

by 백지

1. 그림책과 애니메이션의 만남: 토마스와 설레는 시작

캔터베리 워터스톤즈(Waterstones) 서점 문에 첫발을 내딛던 날, 책장 사이를 오가던 아이의 손이 멈춘 곳은 《토마스 사파리에 가다(Thomas Goes on Safari)》라는 그림책 앞이었다. 낯선 이곳에서 아이가 처음으로 스스로 고른 책이었다. 토마스가 케냐 사파리에서 니아와 함께 야생 동물에 대한 두려움을 극복하고 새로운 친구를 사귀는 모험을 다룬 이야기로, 그 주인공은 영국의'국민 캐릭터'이자 세계적으로 사랑받는 토마스 기차였다.

영국 기차역은 물론 장난감 가게, 아이들 가방과 옷 어디서든 쉽게 만날 수 있는 토마스는 마치 우리나라의 파란색 120번 버스 타요(Tayo) 같은 존재였다. 한국에서는 수많은 탈것장난감 중 하나에 불과했지만, 캔터베리에서의 삶을 막 시작한 아이에게는 익숙한 친구를 다시 만났다는 반가움과 위로였던 듯하다.

토마스 이야기는 원래 1943년 영국 작가 윌버트 오드리(Wilbert Awdry)가 홍역을 앓던 아이 크리스토퍼를 위해 들려준 이야기에서 시작되었다. 1945년 첫 그림책 《세 기관차 이야기(The Three Railway Engines)》가 출간된 이후 수많은 시리즈와 애니메이션으로 이어져 전 세대를 아우르고 있다.

서점에서 책을 집자마자 한참을 읽고, 집에 돌아와서도 그림책에서 눈을 떼지 못하는 모습에서 이 이야기가 아이에게 재미 이상의 의미로 다가왔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혹시 토마스가 낯선 아프리카로 떠나는 여정이 아이에게는 자신의 새로운 삶과 겹쳐졌던 것일까?


2) 좋아하는 시리즈에 몰입: 집중 듣기와 집중 보기

서툰 발음으로 아이에게 《토마스 사파리에 가다(Thomas Goes on Safari)》(2023)를 읽어주던 중, 토마스가 진흙탕에 빠지는 장면에서 아이의 웃음이 터졌다. "Stuck in the muddle!" 진흙투성이가 된 토마스의 모습과 어색한 나의 발음이 겹쳐져 아이는 한참을 웃었다. 책을 다 읽고 나서도 한동안"Stuck in the muddle!"를 외치며 놀았다. 그 장면은 아이가 그림과 소리, 그리고 웃음이라는 긍정적인 경험을 통해 영어 문장을 하나의 상황으로 자연스럽게 받아들인 순간이었다.

이후 유튜브에서 이 책 제목을 검색해 많은 원어민이 올려 둔 책 읽기 영상을 발견했다. 점점 나의 서툰 목소리는 줄이고, 다양한 원어민의 목소리를 들려주며 아이의 흥미를 유도했다. 영상을 직접 보여주는 대신 책과 함께 소리에 집중하게 했다. 우리는 자연스럽게 소리에 맞춰 책을 읽는 집중 듣기를 실천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어서 《토마스 런던에 가다(Thomas Goes to London)》(2016)라는 그림책도 구해와 함께 읽었다. 이 책은 토마스가 여왕의 생일 축하 행사에 참석하기 위해 런던으로 떠나는 모험을 그렸다. 토마스는 템즈강을 따라 런던아이, 타워브리지, 세인트 폴 대성당, 더 샤드 등 런던의 명소들을 지나며 여행한다. 우리는 책을 읽으며 토마스 기차처럼"이곳들을 직접 가보자!"라고 약속했고, 책 속의 장소를 하나씩 찾아가며 우리의 런던 여행지 추천 리스트를 완성해 나갔다.

그림책뿐만 아니라 아마존 프라임을 통해 애니메이션 영화 《토마스와 친구들: 빅 월드! 빅 어드벤처! 더 무비(Thomas & Friends: Big World! Big Adventures!)》도 함께 시청하며 토마스 시리즈에 대한 집중 보기를 시작했다. 이 영화는 토마스가 처음으로 소도르 섬을 떠나 아프리카 세네갈과 탄자니아 다르에스살람, 인도와 중국까지 전 세계 5개 대륙을 횡단하는 여행하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아이가 좋아하는 캐릭터를 통해 자연스럽게 영어와 문화를 접할 수 있었다. 토마스 시리즈는 좋아하는 캐릭터나 주제를 찾아 그림책, 애니메이션, 실사영화 그리고 뮤지컬 공연으로 연결하고, 확장한 집중보기의 시작이었다.

3) 자막 없이 즐기는 영어 애니메이션

처음으로 긴 애니메이션 영화를 보는데 자막을 보여줄 것인지에 대한 고민이 있었다. 이전에 짧은 영상을 보여줄 때는 생각해 보지 못했던 것이었다. 전문가나 부모들의 의견이 다양했다. 나는 아이가 그림책을 볼 때 영어 또는 한글 그림책이 아닌 그저 그림책으로 받아들였던 순간을 떠올렸다. 아이가 긴 영상을 볼 때도 영어에 거부감이 들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우리는 한국어나 영어 자막을 따로 틀지 않고 보기로 했다. 아이가 영어 자막을 읽지도 못하는데 자막을 읽어야 한다는 부담을 주는 것은 아닐까, 그러면 자막은 아이가 영상을 보는 것에 방해만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한편 한국어 자막을 켜두면 영어 애니메이션을 보거나 듣는 일에 소홀히 할까 하는 내심의 우려도 있었다. 다행히 아이는 영상만으로도 충분히 내용을 이해했고, 끝까지 집중하며 영화 자체를 즐겼다.

아이는 토마스 시리즈를 통해 그림책을 놀이처럼 즐기고, 스스로 책을 꺼내 읽는 일이 많아졌다. 우리 가족은 캔터베리 버스터미널에서 윙햄 야생 동물원(Wingham Wildlife Park)으로 향했다. 이곳 동물들을 보면서 자연스럽게 그리고 즐겁게 토마스 이야기를 나누었고, 캔터베리 근교에 있는 포트 님프니(Port Lympne), 하울렛츠(Howletts Wild Animal Park), 그리고 런던 동물원(London Zoo)에서도 이 이야기를 떠올렸다.

아이의 이 경험은 영어책을'공부해야 할 교과서'가 아니라'내가 좋아하는 이야기'로 느끼게 해주는 계기가 되었다. 또한 아이는 영어책 한 권을 혼자 읽어냈다는 작은 성취감까지 얻게 되었다. 토마스 시리즈를 만난 건 아주 사소할 수 있지만, 중요하고 따뜻한 첫걸음이었다.




2. 웃음을 주는 친구 : 페파 피그 고향에 가다

1) 분홍빛 돼지 가족의 소박한 일상, 그리고 웃음

영국에 오기 전까지 아이의 영상 매체 노출을 최소화했다. 대신 동화책 읽기, 색칠놀이, 종이접기 등 아날로그 감각을 살린 활동에 집중했다. 텔레비전은 아이에게'고장 난 TV'나 다름없었고, 아이가 잠든 후에야 보곤 했다. 영화는 오직 영화관에서만 보는 것이었다.

아이가 마미 헨리 선생님 발화 스터디에 꾸준히 참여하는'보상'으로 애니메이션을 보여주기로 했을 때, 어떤 프로그램을 선택할지는 신중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심사숙고 끝에 선택한 아이의 첫 영어 애니메이션은 바로 《페파 피그(Peppa Pig)》였다. 마미 헨리 선생님과 두 살 많은 사촌 누나 서연이의 추천도 결정에 한몫했다.

2004년 첫 방송된 《페파 피그》는 핑크빛 돼지 페파와 가족, 친구들이 소소한 일상을 보내는 짧은 에피소드 형식의 영국 애니메이션이다. 단순하고 따뜻한 이야기 속에서 일상 표현들이 반복적으로 등장하는데, 특히 진흙 웅덩이에서 신나게 뛰노는"Muddy Puddles!" 장면은 단번에 아이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비 오는 날이면 아이는 장화를 신고 나가"It's muddy puddle time!"이라 외치며 물웅덩이를 찾아다녔다. 진흙은 더 이상 칙칙한 것이 아니라 웃음과 놀이의 소재가 되었다. 생각해 보면 이는 이전에 토마스 책에서"Stuck in the muddle!"이라며 웃던 장면과도 연결된다. '진흙'이라는 이미지가 아이에게 영어 표현과 긍정적 감정이 맞닿는 연결고리였던 셈이다.

영국에 오면서 아이는 4년 동안 다녔던 《빛들 어린이집》의 선생님과 친구들과 작별해야 했다. 익숙한 것들이 모두 사라지고, 새로운 환경과 새로운 관계를 받아들여야 하는 시기였다. 그 시기, 첫 런던 나들이 중 들른 햄리스(Hamleys) 장난감 가게에서 아이의 시선이 멈춘 곳은'간호사 페파 피그의 집'이었다. 햄리스 장난감 가게는 1760년 윌리엄 햄리가 홀본에'노아의 방주(Noah's Ark)'라는 이름으로 처음 문을 열었고, 1881년 리젠트 스트리트(Regent Street)에 현재의 매장을 열었다. 제2차 세계대전 중 다섯 차례 폭격을 맞으면서도 문을 닫지 않고 운영을 계속했다. 그날 밤 아이는 작은 페파 피규어를 꼭 쥐고 잠들었고, 그 순간부터 페파는 낯선 땅에서 만난 첫 번째 친구가 되었다.


2) 페파 피그와 함께한 다채로운 경험들

2024년 부활절 주간, 영국 남부로 2주간의 여행을 떠났다. 스톤헨지, 바스, 솔즈베리 대성당을 둘러본 뒤 돌아오는 길, 고속도로 휴게소의 전광판에서"Peppa Pig World ~ A Fun Day Out!" 광고가 눈에 들어왔다. 아이의 눈도 함께 반짝였고, 우리는 언젠가 꼭 가보자고 약속했다. 그 약속은 그해 핼러윈 무렵 현실이 되었다.

햄프셔 주의 가족형 놀이공원 폴튼스 파크(Paultons Park) 안에 있는 페파 피그 월드는 마치 애니메이션 속 세상을 현실에 옮겨놓은 듯했다. 할아버지 피그의 보트 라이드(Grandpa Pig's Boat Trip), 조지와 함께하는 공룡 탐험(George's Dinosaur Adventure), 미스터 불(Mr. Bull)의 열기구, 공원 전체를 순환하는 기차(Grandpa Pig's Little Train), 파스텔톤의 분홍과 하늘색 풍경, 그리고 핼러윈을 맞아 주황빛 호박으로 꾸며진 테마파크는 아이에게는 현실이 된 꿈 그 자체였다.

그러고 나서 우리는 포츠머스(Portsmouth)에서 공연된 '페파의 즐거운 하루(Peppa's Fun Day Out)' 뮤지컬도 관람했다. 수지 양(Suzy Sheep)의 생일 파티와 동물원, 해변을 배경으로 한 유쾌한 이야기 속에서 아이의 얼굴은 내내 기대와 설렘으로 빛났다.

또한 런던의 배터시 파워 스테이션(Battersea Power Station)에 위치한 페파 피그 스토어도 잊지 못할 장소 중 하나였다. 조지와 사진을 찍으려는 아이들이 길게 줄을 서고, 페파 피그 이야기가 나오는 대형 스크린이 있는 매장 안은 아이의 상상 속 세계가 실제 공간으로 펼쳐지는 경험이었다.

토마스가 책과 애니메이션 중심의 시청각적 콘텐츠였다면, 페파 피그는 애니메이션을 넘어 책, 인형, 뮤지컬, 놀이공원까지 확장된 더 입체적인 경험이었다. 그리고 토마스가 아이에게 다른 언어와 문화에 대한 이질감을 완화시켜 주었다면, 페파 피그는 언어 습득과 문화 이해, 관계 형성의 출발점이자 영국이라는 낯선 환경 속에서 정서적 안정감을 주는 친구였다.

페파 피그는 토마스 시리즈와 함께 아이의 영어 적응을 돕는 정서적 조력자가 되었다. 우리는 애초에 교육적인 효과를 기대하지 않았지만, 페파 가족과 함께 뛰놀고 웃으며 즐기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아이에게 영어 표현을 억지로 따라 하게 하지 않았고, 그저 스스로 웃고, 집중하고, 자연스럽게 따라 하고 싶어질 때까지 기다렸다. 그러는 사이 아이는 점차 표현을 익혀 나갔다.

2025년 5월, 페파와 조지에게'에비(Evie)'라는 이름의 새 여동생이 태어났다는 소식이 영국 뉴스에 보도되었고, 아이는 페파 피그의 새로운 가족 구성원을 무척 반가워하고 있다.




3. 용기를 주는 친구' : 퍼피 구조대

1) 퍼 패트롤! 퍼 패트롤! 필요하면 언제든지~

페파 피그와 함께 아이의 영국 생활 속에 자연스럽게 스며든'오래된' 친구가 있다. 바로 퍼피 구조대(PAW Patrol)다. 영국에 오기 전부터 이미 아이의 삶 깊숙이 자리하고 있었다.

아이는 소방차, 구급차, 경찰차 등 특수차를 좋아하며 자동차 로고를 통해 제조 회사를 익히기 시작했다. 이후 공룡과 포켓몬 이름을 외우고, 한국을 빛낸 위인들, 독도는 우리 땅 같은 노래들도 뜻을 모른 채 따라 부르게 되었다. 자동차에 한창 관심을 갖던 무렵, 서울에 계신 이모할머니께서 장난감을 선물로 보내주셨는데, 그것이 바로 퍼피 구조대였다. 처음에는 각 캐릭터의 이름을 잘 몰랐지만, 장난감을 가지고 노는 것 자체가 즐거웠다.

《퍼피 구조대(PAW Patrol)》는 키스 채프먼(Keith Chapman)이 기획하고 스핀 마스터 엔터테인먼트(Spin Master Entertainment)가 제작한 캐나다 어린이 애니메이션 시리즈였다. 영국에 와서야 비로소 퍼피 구조대가 토마스 기차, 페파 피그와 함께 이곳 아이들에게 대표적인 캐릭터였다. 한국에 두고 온 장난감들이 아쉬웠지만, 다행히 캔터베리에서도 퍼피 구조대는 아이의 일상 속 즐거운 순간을 만들어 주었다. 특히 6살 생일 선물로, 그리고 페파 피그 외에 새로운 애니메이션을 보고 싶을 때에도, 아이의 선택은 언제나 퍼피 구조대였다. 아이의 즐거움을 지켜주는 든든한 구조대였던 셈이다.

퍼피 구조대는 라이더(Ryder)라는 소년과 체이스(Chase, 경찰견), 마셜(Marshall, 소방견), 스카이(Skye, 비행 구조견), 러블(Rubble, 건설견), 주마(Zuma, 수상 구조견), 록키(Rocky, 재활용 및 정비 전문가) 등 여섯 마리 강아지 구조대원들이 어드벤처 베이(Adventure Bay)에서 각종 문제를 해결하는 이야기다. 각 캐릭터는 고유의 역할과 개성을 지니고 있으며, 구조 장비와 차량이 등장해 아이들의 시선을 사로잡는다. 또한 저먼 셰퍼드, 달마티안, 코카푸, 잉글리시 불도그, 래브라도 레트리버, 슈나우저 믹스 등 다양한 견종들이 등장해, 아이가 자연스럽게 강아지의 여러 품종에 대한 흥미와 지식을 키울 수 있었다.

아이도 처음에는 단순히 자동차와 장난감에 끌려 보기 시작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이야기와 캐릭터에 애정을 가지게 되었다. 그렇게 퍼피 구조대의 세계에 빠져들었고, "퍼 패트롤! 퍼 패트롤! 필요하면 언제든지~" 하는 주제곡도 금세 따라 불렀다.

어느 날 아이는 유튜브에서 퍼피 구조대 영상을 보며 웃고 있었다. 나는 문득 장난스레 말을 건넸다. "어? 2PP를 좋아하는구나?" 아이는 고개를 갸웃하며 되물었다. "2PP가 뭐야?" 페파 피그(Peppa Pig)와 퍼피 구조대(PAW Patrol) 모두 영문 앞 글자가'PP'로 시작한다는 우연한 발견에서 나온 질문이었다.

사소한 장난 같은 이런 질문 하나가 아이들의 호기심을 자극하고, 때때로 새로운 관심과 학습으로 이어지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그렇게 퍼피 구조대는 아이에게 익숙함을 발판 삼아 영어를 배우고 문화를 익히는 또 하나의 창구가 되어주었다.


2) 스카이처럼, 용기를 내어 날아오르다

2023년 가을, 퍼피 구조대의 극장판 《퍼피 구조대: 더 마이티 무비(PAW Patrol: The Mighty Movie》(2023)가 개봉했다. 아이는 좋아하는 애니메이션을 큰 스크린으로 만날 수 있다는 기대감에 망설임 없이 캔터베리 리버사이드 영화관(Curzon Riverside)으로 향했다.

영화 속에서 퍼피 구조대원들은 신비로운 운석의 힘으로 특별한 초능력을 얻게 되지만, 미친 과학자 빅토리아 밴스(Victoria Vance)의 계략에 빠져 초능력의 원천인 크리스털을 빼앗기고 위기에 처한다. 특히 비행 구조견 스카이(Skye)가 힘을 잃고"난 너무 작고, 너무 약해(I'm too small, I'm not brave enough)"라며 절망하는 모습을 보이지만, 동료들의 변함없는 믿음과 격려 속에서 스카이는 용기를 되찾고 다시 날아올라 어드벤처 시티를 구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해낸다.

이 애니메이션이 전하는 용기의 메시지는 현실 속 아이의 성장 노력과 연결되었다. 페파 피그를 발화 스터디의 보상으로 받고 기뻐한 모습이 떠올랐다. 안아달라 하지 않고 잘 걷고, 깨끗하게 정리하고, 예쁘게 말하기 등 작은 일 하나하나를 잘 해낼 때마다 주었던 칭찬 스티커를 아이는 꾸준히 모았다.

그렇게 스티커 25개를 모두 모은 어느 날, 아이는 드디어 자신이 그토록 갖고 싶어 했던 퍼피 구조대 장난감을 선물로 받을 자격을 얻었다. 장난감을 고르기 위해 향한 곳은 캔터베리 동쪽 모리슨 슈퍼마켓 옆에 자리한 B&M이었다. 대형 할인 매장임에도 불구하고, 이곳은 다양한 종류의 장난감을 판매하고 있어 아이에게는 장난감 천국이었다. 수많은 퍼피 구조대 장난감들 사이에서 아이의 손에 들린 것은 결국 러블(Rubble)과 그의 불도저였다.

처음에는 단순히 좋아하는 캐릭터를 본뜬 장난감이었지만, 영화를 통해 깊어진 캐릭터에 대한 애정과"필요하면 언제든지 달려가는 퍼피 구조대처럼, 어떤 어려움이 와도 용기를 내서 도전할 수 있어!"라고 씩씩하게 말했던 아이의 다짐이 더해지며, 장난감 이상의 의미를 갖게 되었다.

퍼피 구조대는 아이에게 도전과 용기의 가치를 알려주는 친구가 되었다. 낯선 환경에서 조금씩 적응하며 성장해 가는 아이의 모습이, 역경을 딛고 다시 날아오른 스카이의 모습과 겹쳐 보였다.




4. 마음을 어루만지는 위로의 친구

1) 패딩턴: 낯선 도시에서 사랑받는 곰

런던 시내 곳곳의 기념품 가게부터 레스터 스퀘어 인근 공원의 벤치에 앉아 있는 동상까지, 런던 거리에서는 빨간 모자에 파란 더플코트를 입은 작고 귀여운 곰, 패딩턴을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다. 낯선 도시 런던에서 처음 마주한 패딩턴은, 아이와 나 모두에게 묘하게 친숙하게 느껴졌다. 어쩌면 우리와 비슷한 처지, 어딘가에서 막 건너온'누군가'처럼 느껴졌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패딩턴은 영국 작가 마이클 본드(Michael Bond)가 1958년 발표한 그림책 《곰 한 마리, 패딩턴(A Bear Called Paddington)》의 주인공으로, 전 세계 어린이들에게 오랫동안 사랑받아온 캐릭터다. 이야기는 페루에서 온 이 작은 곰이 런던의 패딩턴 역에 도착해 브라운 가족을 만나고, 낯선 땅 영국에 적응해 가는 과정을 그린다. 역 이름에서 이름을 얻은 그는, 목에"이 곰을 잘 돌봐 주세요. 감사합니다(Please look after this bear. Thank you.)"라는 쪽지를 달고 있었다. 짧은 문장이지만, 어쩌면 새로운 환경에 던져진 모든 이들의 마음속 외침 같기도 했다. 아이는 그 문구를 읽고 “이건 진짜 내가 해야 하는 이야기 같다”라고 말했다.

패딩턴과의 연결은 그 이후로 더욱 깊어졌다. 먼저, 패딩턴이 런던 곳곳을 누비는 이야기가 담긴 그림책을 읽었고, 책에 나오는 장소들—햄프턴 코트, 런던 타워, 템스강변 등—을 실제로 찾아가 보았다. 현장에서 그림책을 펼쳐 읽으며 이야기 속 공간과 현실의 공간을 연결해 보는 시간은 아이에게 특별한 경험이었다. 특히, 이야기의 시작이 된 패딩턴 역에 가서 패딩턴 동상 옆에서 사진을 찍을 때, 아이의 얼굴에는 진심 어린 기쁨이 가득했다.

이후 우리는 영화 《패딩턴》(2014)과 《패딩턴 2》(2017)를 차례로 감상했다. 1편에서는 역에서 브라운 가족을 만나 런던에 적응해 가는 패딩턴의 좌충우돌 모험이 펼쳐졌고, 자연사 박물관 장면에서는 아이가 “여기 가봤잖아!” 하며 반가워했다. 2편에서는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갇힌 패딩턴이 이웃들의 도움으로 진실을 밝혀내는 이야기가 감동적으로 그려졌다. 영화 속에서 패딩턴이 루시 이모에게 런던을 소개하는 책자를 전하고 싶어 하는 장면에서는, 아이가 “나도 할머니, 할아버지한테 그거 해주고 싶어”라고 말했다. 책자를 건네지 못하게 되자 패딩턴이 선택한 다른 방식에는, 우리도 모르게 마음 깊은 울림을 느꼈다. 엉뚱한 실수투성이지만 늘 진심을 다하는 패딩턴의 모습은, 결국 관계를 맺는 일이 얼마나 소중하고 의미 있는지를 보여주는 것 같았다.

그전까지 《토마스와 친구들》, 《페파 피그》, 《퍼피 구조대》와 같은 애니메이션 시리즈만 봤던 아이는 실사 영화 속 인물들에게 빠르게 몰입했다. 영화의 마지막 크레디트를 끝까지 챙겨보며 등장한 배우가 다른 영화에도 나오는지 검색해보기도 했다. 그러면서 “이제는 진짜 영화 보는 거 같아”, “나는 사람 나오는 영화도 본다?”며 으쓱해하기도 했다.

우리가 캔터베리에 머물던 2024년에는 시리즈의 세 번째 영화, 《패딩턴 인 페루(Paddington in Peru)》가 개봉했다. 런던에서 새로운 가족을 만났던 패딩턴이 이번에는 고향 페루로 돌아가는 이야기다. 모험이 끝난 후, 패딩턴은 다시 런던으로 돌아왔을까? 패딩턴이 페루에서 다시 출발하는 모습은, 영국에서 새로운 시간을 보낸 우리 가족이 다시 한국으로 돌아가려는 여정과도 겹쳐 보였다.

패딩턴 동상은 런던 패딩턴 역과 레스터 스퀘어에 있으며, 영국 전역에'패딩턴 방문 트레일'의 일환으로 23개의 동상이 설치되어 있었다. 요크 민스터 옆 공원, 맨체스터 과학산업박물관 가는 길목에서도 우리는 머멀레이드 샌드위치를 든 패딩턴 동상과 함께 사진을 남겼다. 그런데 얼마 전, 한 지역에서 패딩턴 동상이 도난당했다는 뉴스를 접한 아이는 깜짝 놀라며 속상해했다. 그만큼 패딩턴은 영국 사람들에게도 깊은 애정과 의미를 지닌 존재라는 걸 아이도 자연스럽게 느낀 것이다.

2) 토이 스토리: 변화 속에서 나를 찾다

캔터베리의 커즌 리버사이드(Curzon Riverside) 영화관에서 우리가 처음 본 애니메이션은 《토이 스토리 4》(2019)였다. 아이는 이미 한국에서 우디(Woody)를 한글 그림책을 통해 접한 적이 있었기에, 영어로 상영되는 영화임에도 자연스럽게 이 작품을 선택할 수 있었다.

이 애니메이션은 오랜 시간 아이의 장난감으로 헌신해 온 우디가 처음으로"나는 무엇을 원하는가?"를 고민하며 자신의 삶을 선택하는 여정을 담고 있다. 새로운 주인 보니(Bonnie)와, 쓰레기라고 여겨졌던 포크 장난감 포키(Forky)를 지키는 과정에서 우디는 오랜 친구 보 핍(Bo Peep)을 다시 만나고, 자유롭게 살아가는 그녀의 삶을 통해 장난감으로서의 운명에 대해 깊은 고민에 빠진다. 결국 우디는 보니와 친구들에게 작별을 고하고, 보 핍과 함께 자신만의 새로운 삶을 선택한다. 이는 이별이 아니라, 자신을 위한 용기 있는 선택이었다. 그 모습은 정든 어린이집을 떠나 새로운 환경에 적응해야 했던 아이의 모습과도 겹쳐 보였다.

《토이 스토리 4》를 본 후, 자연스럽게 시리즈의 앞선 작품들을 찾아보기 시작했다. 우리는 픽사(Pixar)와 디즈니(Disney)의 초기 작품들을 매주 하나씩 ‘역주행’하며 감상했고, 이들 스튜디오에 대한 궁금증도 생겼다.

디즈니(Walt Disney Company)는 1923년에 설립된 세계적인 엔터테인먼트 기업이며, 픽사(Pixar Animation Studios)는 1986년 스티브 잡스가 인수한 후 본격적으로 컴퓨터 애니메이션을 제작하기 시작했다. 이후 2006년 디즈니가 픽사를 인수하면서, 현재는 픽사가 제작을 맡고 디즈니가 배급을 담당하는 구조로 운영되고 있었다. 그래서 픽사 영화의 인트로에는 픽사의 상징인 룩소 주니어(Luxo Jr.) 램프와 디즈니의 성 로고가 함께 등장한 것이었다.

《토이 스토리》 시리즈는 장난감들이 살아 움직이며 아이들을 위해 헌신하는 이야기를 통해 우정, 성장, 이별, 그리고 변화의 의미를 전하고 있었다. 1편에서는 주인 앤디(Andy)의 가장 아끼는 장난감 우디가 새로운 인기 장난감 버즈 라이트이어(Buzz Lightyear)를 질투하다가 함께 모험을 겪으며 진정한 우정을 쌓는다. 2편에서는 수집가에게 납치된 우디를 구하기 위해 버즈와 친구들이 협력하고, 그 과정에서 제시(Jessie), 불스아이(Bullseye) 같은 새로운 캐릭터가 등장한다. 3편은 앤디가 대학에 진학하며 장난감들이 어린이집으로 가게 되는데, 거기서 만난 로츠(Lotso)의 억압에서 벗어나 다시 자유를 찾고, 결국 새로운 아이인 보니에게 맡겨지는 이야기다. 앤디가 장난감 하나하나를 보니에게 소개하며 마지막으로 우디를 건네는 장면은, 성장과 이별이 교차하는 감동적인 순간으로 남았다.

《토이 스토리》 시리즈는 익숙한 것들과의 이별, 낯선 환경 속에서의 적응과 결국 자신만의 길을 찾아가는 여정을 보여줬다. 장난감조차 변화 속에서 자신의 자리를 다시 찾아가는 모습을 통해, 우리 역시 변화 앞에서 두려워하지 말고 새로운 삶을 향해 나아가자고 다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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