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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EEYOUHERE Feb 10. 2023

오지랖_<랑과 나의 사막>, 천선란

무릅쓰는 마음

사막 한가운데서 인간 랑에 의해 구조된 로봇 고고. 이 책은 랑을 떠나보낸 고고가 랑과의 추억을 회상하면서 인간의 감정을 체화하는 과정을 담은 이야기다. 로봇이 감정이라니. 믿기지 않겠지만 SF장르에서 그 정도 상상력은 눈 감아 줄만 하다. 이야기가 너무 따사로와서 모르는 척 속아주고 싶어진달까.


어떤 따사로움이냐면 어린 왕자를 읽었을 때와 비슷한 따사로움이다. 고고가 랑을 걱정하고, 그리워하고, 사랑하는, 인간의 감정을 깨닫는 장면들을 통해서 진솔한 관계와 사랑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

'네가 오후 네시에 온다면 나는 세시부터 행복해지기 시작할거야'

사막여우가 인내로서 서로에게 길들여지는 배려심 깊고 조심스러운 사랑을 가르쳐줬다면, 고고는 다 내어주는 용기있는 사랑을 가르쳐줬다.


[40-41p]

'나는 이게 더 마음에 들어. 그러니까 이걸 고고가 가져.'

'마음에 드는 걸 가져야 하는 거 아닌가?'

'아니, 마음에 드는 걸 선물해야 해. 그래야 너한테 준 걸 내가 보고 싶어서 자꾸 너를 보러 오지.'

그렇게 말하면서도 랑은 내게 내민 조개껍질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나는 랑이 준 조개껍질을 받아 다시 라이의 손바닥에 올려주었다.

'그럼 랑이 이걸 가져야지. 나도 이게 마음에 들거든.

......

[44p]

이틀 동안 벽을 바라보며 등이 넓은 조개껍질과 물결무늬 조개껍질을 떠올렸다. 랑이 던졌던 질문과 그 질문을 다시 람에게 묻는 선택 외에 내가 할 수 있었던 제3의 선택이 무엇인지를.

'마음은 중요해.' 랑의 말에 나는 마음이 없다고 대답했고, 랑은 아니라고 고개를 저었다.

'마음은 목적이야. 네 목적에 가장 빨리 닿으려고 애쓰는 게 마음이야.'

내게는 랑을 행복하게 해줘야 한다는 목적이 있다. 행복을 웃음과 편안함과 숙면 정도로만 추측할 수 있으면서 감히 그런 목적을 가지고 있다. 고로 마음에 드는 걸 가지라던 랑의 질문에 대한 옳은 선택은 내 목적을 이루기 위한 선택이었으면 된다는, 너무 뒤늦게 해결책을 찾았다. 조개껍질 두 개, 전부 랑에게 주었으면 됐다.


나중에 고고는 조개껍질을 두 개 다 랑에게 줬어야 했다고 뒤늦게 생각한다. 중요한 것은 내가 무얼 가질지, 얼마큼 줄지가 아니라 상대를 생각하는 마음이라는 거. 어쩌면 관계에 있어 가장 중요한 주제가 아닐지. 연인과의 대부분의 다툼은 서로 자기가 더 희생하고 있다는 억울하고 아까운 마음을 내세울 때 시작되지 않나? 손해 보고 있다는 느낌에서 비롯된 아까운 마음. 사랑은 주는 것(Love is giving)인데 말이다. 랑의 말처럼, 마음은 중요하다. 그러니 잊지 않도록, 잃지도 않도록 자꾸 들여다봐줘야 한다. 두려움, 질투, 이기심 같은 것들이 사랑을 가리지 않도록.


고고는 스스로가 인간을 학살하는 전쟁무기였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오래 근심한다. 사랑하는 랑을 해칠까 봐. 그러고는 어떤 경우의 수에서도 자폭할지언정 자신이 랑을 해치는 결괏값은 없을 것이라고 결론 내린다.


[111p]

한참을 걷다 멈춘다. 뒤돌아본다. 돌아가는 길이 보이지 않아 다시 걷는다. 문득 어느 곳으로 가도 랑이 없다는 사실이 이상하다. 이런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는데. 한 달에 한 번씩 조와 함께 꼬박 두 시간을 걸어가야 나오는 식료품점을 갈 때와 지카의 집에 놀러 갔던 날을 제외하고 랑이 이렇게 오래 내 옆을 비운 적이 없었는데. 싱그럽던 랑의 움직임이 이 사막 어디에도 없다는 것이, 기다려도 만날 수 없다는 것이, 이 이상함을 계속 이상한 채로 품어야 한다는 것까지 전부 끈적하게 등에 달라붙는다. 낯선 감각이 든다. 이를테면 가슴판을 열어 속을 헤집고 싶다는 충동. 형용할 수 없는 응어리가 오색 빛깔로 내 속을 휘젓고 다니는 것만 같다.


가고 싶은 과거의 순간으로 갈 수 있다는 '드카르가의 검은 벽'으로 떠나는 고고의 여정. 그것은 그리운 랑에게 가는 길이고 죽은 랑을 추모하는 애도의 길이다. 고고는 로봇 주제에 랑을 그리워하고 랑의 부재에 슬퍼한다.


고고는 그 척박한 사막길에서 여러 인물들을 만난다. 그들의 처지에 공감하고, 그들을 걱정하고, 한쪽 팔까지 내어준다. 곧 탈수가 올 것처럼 땀을 많이 흘리면서도 그늘로 가지 않는 인간 버진을 보며 고고는 '애가 탄다'고 생각한다. 애가 탄다니. 네가 왜? 하여간 오지랖 넓은 로봇이다.


오지랖이 넓다

쓸데없이 지나치게 아무 일에나 참견하는 면이 있다.


"머리 아닌 가슴으로 하는 이야기~ 네가 싫다 해도 안 할 수가 없는 이야기~"

아이유 선생님과 임슬옹 선생님의 명곡, 잔소리에서 처럼 우리는 사랑하면 오지랖 평수가 넓어진다. 평당 가격은 사람마다 다르겠다. '쓸데 있는' 참견이었다면 사랑이 아니겠지. 쓸데없기에, 지나치기에 사랑에서 비롯된 게 아닐까 싶다, 오지랖이라는 건.


고고는 머릿속에 랑의 영상이 계속 재생되는 것이 '오류'라고, 자신은 감정이 있을 수 없는 로봇이라고 말하지만 독자는 곳곳에서 고고의 마음을 발견할 수 있다.


[133]

"감정은 교류야. 흐르는 거야. 옮겨지는 거고, 오해하는 거야."

살리의 말은 단번에 이해되지 않는다. 나는 말을 분석해 본다. 쉽지 않다. 살리에게 뜻을 도로 묻고 싶지만 살리가 말을 잇는 바람에 기회를 놓친다.

"그냥 그럴듯하게 연기하는 거야. 느끼고 공감하는 것처럼. 자연스러우면 그게 바로 감정이야."


과학철학 수업을 듣던 때가 생각난다. 인간이 지식이나 감정을 학습하는 과정이 어쩌면 컴퓨터와 크게 다르지 않을 수 있다는 가정. 감정이라는 것도 마음 어딘가에 심어져 있다가 발현하는 것이 아니라, 보고 배우고 흉내 내고 세상과 교류하는 '행위'를 통해서 생긴다는 점. 그렇다면, 그게 사실이라면 고고가 느끼는 것은 진짜다. 그것은 진짜 감정이다. 아니라고 해도 고고의 여정을 쫓다 보면 그렇게 믿고 싶어 진다.


고고는 결국 드카르가의 검은 벽을 통과한다. 몸이 망가지는 걸 알면서도 아주 용감하고 간절한 마음으로 간다. 로봇이라 고통 따위 못 느낄 테니 조금은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고고는 랑을 만났을까? 그간의 여정에서 만난 사람들에 대해, 그들에게 랑이 걱정했던 것보다 좋은 첫인상을 준 것에 대해 이야기해 주었을까? 하나가 된 팔로 랑과 포옹하고 랑의 체온에 안도감을 느꼈을까? 이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를 모두와 나눠 읽고 싶다. 재고 따지는 마음의 평수를 넓혀주고 싶다. 종종 옹졸해지곤 하는 내 마음도 계속 기억했으면 하는 이야기다. 랑과 고고의 사막이 계속해서 이어지길.


넓어진 마음은 사방으로 거대해져 무엇이든 채운다. 거대해진 마음은 우리를 상냥하게 하고, 두려움을 무릅쓰게 하고, 있는 그대로 만족하게 한다. 그 만족에 조건은 없다. 목적은 역시 사랑. 사람을 위대하게 만드는 건 오직 사랑뿐이리라. 아, 로봇을 위대하게 하는 것도 마찬가지, 이하상동(ditto)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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