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애송시 감상노트 22
깃발
청마 유치환
이것은 소리 없는 아우성
저 멀리 海原을 향하여 흔드는
영원한 노스탈쟈의 손수건
純情은 물결같이 바람에 나부끼고
오로지 맑고 곧은 理念의 標ㅅ대 끝에
哀愁는 白鷺처럼 날개를 펴다.
아아 누구던가
이렇게 슬프고도 애달픈 마음을
맨 처음 공중에 달 줄을 안 그는.
이 시는 시작(詩作) 교과서에 단골로 나오는 시입니다. 시에는 비유적(比喩的) 표현이 많이 나오기 때문에, 시를 공부하는 사람에게 이런 비유법을 사용한 대표적인 시로, 위의 ‘깃발’을 예시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비유는 다시 여러 가지로 구분하지만, 그중에서 대표적인 것이 직유(直喩)와 은유(隱喩)입니다.
‘A는 B다’ 또는 ‘내 마음은 호수요.’ 이런 표현은 직유인가요, 은유인가요? 직유라고요? 틀렸습니다. 이러한 비유법을 ‘은유’라고 합니다.
그럼 ‘직유’는 어떤 표현을 말할까요. 이것은 ‘-같이’ ‘-처럼’ ‘-듯이’와 같은 연결어로 비유하는 표현법입니다. ‘내 누님같이 생긴 꽃이여.’ ‘정신이 은화(銀貨)처럼 맑소’ 같은 수사법을 말합니다.
그럼 시 ‘깃발’에는 어떤 비유법을 사용하는지 한번 볼까요.
‘이것(깃발)은 소리 없는 아우성’, 첫 행부터 은유적 표현인 ‘깃발은 아우성’으로 표현합니다. 그런데 이것은 또 ‘소리 없는 아우성’입니다. 이러한 표현은 ‘모순어법’이라고 말합니다. 또 여기서 눈여겨볼 것은, 시각적인 ‘깃발’을 청각적인 ‘아우성’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는 詩作에서 강조하는 ‘낯설게 하기’의 좋은 예입니다. ‘낯설게 하기’란 문학의 언어는 익숙한 언어의 사용 규범을 파괴하여, 독자의 주의를 끌어 새로운 문제 제기나 주제를 전달하려는 수법입니다. 자, 이렇게 단 한 줄의 시에서 정말 많은 표현법을 배우게 됩니다.
다음으로 ‘깃발은 노스탈쟈의 손수건’입니다. 이 시의 두 번째 은유입니다. 그리고 ‘깃발은 슬프고 애달픈 마음’입니다. 이 또한 은유적 표현입니다. 더 나아가 ‘순정’과 ‘애수’도 ‘깃발’을 은유적으로 표현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여기 5개의 은유적 표현을 발견합니다.
‘순정은 물결같이’ ‘애수는 백로처럼’ 이러한 표현법은 물론 직유적인 표현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이 시의 시작법에 대한 분석은 그만하고 이제 시를 감상해 보겠습니다.
표제가 있는 어떤 피아노곡을 듣고, 그 음악을 통해서 작곡가가 나타내고자 하는 것을 상상하기가 쉽지 않은 것처럼 이 시를 읽고 시가 말하고자 하는 어떤 이미지를 떠올리기는 쉽지 않습니다.
여러분은 어떤 이미지를 떠올리시나요.
위에서 본 것처럼 많은 은유와 직유, 낯설게 하기. 모순어법 등으로 더욱 그러합니다.
그렇지만 여러 번 읽어 보면, 바다가 바라보이는 바닷가 언덕 위에 기다란 깃대 끝에 달린 하얀색의 커다란 깃발이 펄럭이는 것을 상상할 수 있습니다. 저 멀리 해원, 즉 바다를 향하여 흔드는 손수건, 그리고 그 손수건, 즉 깃발은 백로처럼 날개를 펼친 흰색의 이미지이니까요.
그리고 전체 시가 전하는 감성은, 노스탈쟈(향수), 순정, 애수, 애달픔 등의 시어로 뭔가 가라앉은 슬픔 같은 느낌을 받지 않으셨나요.
그러면 여기 시의 화자는 왜 바다를 향해 나부끼는 깃발을 쳐다보면서 이러한 감정을 가질까요.
많은 평론가들은 청마 시에 일관되게 나타나는 것은 ‘애수의 정서’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이것은 다시 ‘남성적 애수’라고 말합니다. ‘애수’는 바로 이 시에서도 나오지요? ‘애수’는 우리 가슴에 스며드는 슬픈 마음입니다. 이러한 슬픈 마음은 청마에게는 어떤 것으로부터 나오는 것일까요.
그는 그의 자작시 해설서 ‘구름에 그린다.’에서 직접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내게 있어서 여성은 고독한 밤 항해에 아득히 빛나는 등댓불과 같이 나의 인생에 있어 항상 없지 못할 영혼의 어떤 갈구(渴求)의 존재이다.”라고 토로합니다. 그렇습니다. 여기 ‘애수’도 시인의 사랑하는 이성에 대한 가까이 갈 수 없는, ‘아득히 빛나는 등댓불’과 같은 대상에 대한 어떤 갈구의 심정을, 바닷가에서 펄럭이는 깃발을 통해서 느끼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므로 그 가까이할 수 없는 이성에 대한 염원은 ‘영원한 노스턀자의 손수건’ 즉 ‘영원히 이룰 수 없는 그리움’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이 시에서도 ‘남성적 애수’를 나타내는 시구로는 ‘오로지 맑고 곧은 이념의 푯대’라는 표현에서 느낄 수 있습니다. 시인이 가지고 있는 어떤 이념, 또는 신념, 이것은 여기 푯대처럼 흔들릴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위에서 펄럭이는 것은 그의 내면의 이루어질 수 없는 갈망의 시각적 표현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마지막 연에서 이렇게 슬프고 애달픈 마음, 즉 깃발을 누가 맨 먼저 달았을까 묻고 있습니다. 이것에 무슨 철학적 의미를 도출해 내기보다는 이 시의 화자의 다가갈 수 없는 사랑에 대한 갈급함, 사랑의 원초적 괴로움, 이러한 것들에서 터져 나오는 탄식과 갈등을 이런 질문으로 대신한다고 보면 되지 않을까요.
이렇게 ‘깃발’은 청마 시에서 원천적으로 보이는 삶에서의 아이러니, 또는 괴로움을 초극하려는 의지의 표현으로, 그의 시의 출발점이 되고 있습니다.
한 평론가가 청마와 당시 그와 대척되는 자리에 있었던 미당 서정주를 비교하여 평가한 글을 인용해 보겠습니다.
“청마의 시가 남성적 강인함의 시라면, 미당의 시는 여성적 부드러움의 시이며, 청마의 시가 한자를 많이 쓴 고풍의 시라면, 미당의 시는 토속어의 아름다움을 최대한도로 살린 시이다. 청마의 시가 울분, 탄식, 저항, 질타의 시라면 미당의 시는 체념, 한, 해학, 포용의 시이며, 청마의 시가 남성적 연모(戀慕)의 시라면, 미당의 시는 여성적 사랑의 시이다.”(1)
김현. ‘깃발’의 시학. 한국현대시문학대계15. 지식산업사.1987. 233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