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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그네 긴 소매 꽃잎에 젖어,

나의 애송시 감상노트.21

by kacy



완화삼

- 목월에게

조지훈


차운 산 바위 우에 하늘은 멀어

산새가 구슬피 울음 운다.


구름 흘러가는

물길은 七百里


나그네 긴 소매 꽃잎에 젖어

술 익는 강마을의 저녁노을이여


이 밤 자면 저 마을에

꽃은 지리라.


다정하고 한 많음도 병인 양하여

달빛 아래 고요히 흔들리며 가노니.....



이 시는 먼저 제목이 좀 어렵습니다. ‘완화삼(玩花衫), 여기서 ’玩‘은 ’사랑하다‘ ’즐거워하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衫‘은 ’적삼, 웃옷, 옷‘의 뜻입니다. 그래서 ’완화삼‘을 풀어서 보면 ’꽃무늬가 있는 적삼(花衫)을 즐거워하다. 또는 꽃무늬 적삼을 사랑하다.‘라고 풀이할 수 있습니다.

시 본문에 ’나그네 긴소매 꽃잎에 젖어‘에서 바로 ’花衫‘의 이미지가 떠올라 옵니다.


이제 시를 감상해 봅시다. 산 위에 하늘이 멀어 가을인가 했더니, 산새가 울고 강둑에 핀 꽃이 적삼을 적실 정도이니 아마도 봄이 한창인 것 같습니다.

강물이 흘러가는 어디쯤 산이 보이는 것을 보면 어느 강의 상류 쯤 되는, 인가도 인적도 드문 그런 곳을 두루마기에 봇짐을 진 나그네가 홀로 물길을 따라 천천히 걸어가고 있는 전경입니다. 나그네의 여정이 칠백리인지, 아니면 강의 길이가 그런지는 알 수 없지만 꽤 긴 길을 걸어가고 있는 느낌입니다. 얼마나 오래 걸었는지 긴 옷 소매에 꽃물이 다 들도록 말입니다.


이렇게 걸어가다 보니 이제 저녁노을이 집니다. 여기서 나그네는 하룻밤을 묵고 다음 날 떠날 만도 한데, 그러나 달빛을 받으며 그냥 가고 있습니다. 이 밤이 지나기 전에 꼭 가야할 곳이 있는지, 아니면 갈 길이 너무 멀어서 좀 더 가다가 다음 마을이라도 찾아보려는 건지 알 수 없는 일입니다.

그래도 술 익는 강마을을 그냥 갈 순 없겠지요. 저녁노을 아래 어디 주막에서 한잔 탁주에 지나온 노정과 앞으로 가야할 길을 생각하다가 주모에게 몇 잔 술을 더 청해 마셨는지도 모르겠군요. 왜냐하면 저녁노을은 지고 이제 달이 떴으니 주막에서 꽤 시간을 보낸 모양입니다.


다시 봇짐을 지고 걸어가며 이 마을의 꽃도 내일이면 저 버릴 것을 걱정합니다. 몇 잔 술로 마음이 좀 고양된 것인지, 원래 이 나그네가 시인처럼 다정다감한 사내인지는 알 수 없지만, 꽃이야 피었으면 지는 것이 당연지사인데 이 나그네는 그런 다정한 감상이 병인 줄을 알면서도 어쩔 수 없다는 듯 술에 취한 듯 달빛에 취한 듯 그렇게 조금씩 흔들리며 강을 따라 걸어가고 있습니다.

이 시에 대한 비판적 읽기를 보면 일제 말기인 당시의 암혹한 시절에 무슨 술익는 마을이 있었으며, 혹 있었다 하여도 이런 감상적 시가 무슨 효용이 있는가 하고 비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당시 우리 민족은 어떻게 보더라도 온 국민이 그저 이 시의 나그네와 같은 신세로서 그 힘든 시기를 견디어 낼 수 있었던 것 중에는 이러한 ’술 익는 강마을의 저녁 노을‘도 포함될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바라보는 저녁노을과 그 힘든 시기의 저녁노을이 주는 감회는 분명 다르지 않았을까요.


이 시에는 ’木月에게‘라는 헌사가 붙어 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바와 같이 지훈과 목월은 박두진과 함께 ’청록집‘이라는 시집을 발행합니다. 지훈 시인은 1942년 박목월 시인을 목월 시인의 고향 경주에서 처음 만나서 여러 날을 같이 지내며 우정을 돈독히 했다고 합니다. 이 ’완화삼‘은 이 시기에 지훈 시인이 목월에게 보낸 것으로, 이에 대한 답시로 목월은 ’나그네‘라는 시를 써서 지훈에게 보냅니다.

그럼, 여기서 ’나그네‘도 같이 한번 읽어 보는 것이 좋을 것 같군요.

나그네

술 익는 강마을의 저녁노을이여-지훈

박목월

강나루 건너서

밀밭 길을

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나그네

길은 외줄기

남도 삼백리

술 익는 마을마다

타는 저녁놀

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나그네


이 시는 물론 ’완화삼‘ 시에 대한 답례로 쓴 시이기 때문에 두 시가 주고 있는 이미지는 아주 흡사합니다. 아니 ’나그네‘는 ’완화삼‘의 이미지를 훨씬 명료하고 단순하게 우리에게 전달해 주고 있습니다. 여기서 시의 완성도가 어떤 시가 더 우위에 있는지는 우리가 논할 필요는 없습니다. 다만 두 시인이 당시 한글로 시 쓰는 것 자체가 어려웠던 시기에 이렇게 아름다운 시와 우정을 함께한 것에 찬사를 보내야 하지 않을까요.

지훈 시인은 목월보다 5년 어렸지만, 목월보다 꼭 10년을 먼저 세상을 떠나고 맙니다. 그가 48세 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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