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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이 도른도른 숨어 있는 곳

나의 애송시 감상노트 23

by kacy



1

김영랑


내 마음의 어딘 듯 한편에 끝없는

강물이 흐르네


돋쳐 오르는 아침 날빛이 빤질한

은결을 돋우네


가슴엔 듯 눈엔 듯 또 핏줄엔 듯

마음이 도른도른 숨어있는 곳


내 마음의 어딘 듯 한편에 끝없는

강물이 흐르네


여기 시의 제목 자리에 웬 번호 1이 있습니까?

영랑은 두 권의 시집, ‘영랑시집’과 ‘영랑시선’ 모두, 시의 제목 없이 일련번호를 붙이고 있습니다. 이 시가 그의 첫 시집인 ‘영랑시집’에서 첫 번째로 실린 시입니다. 우리가 영랑 시 중에서 가장 많이 애송하는 시, ‘모란이 피기까지는’도 이 시집의 45번째 시로 올라와 있을 뿐입니다. 이렇게 영랑은 자기의 각각의 시에서 독자에게 시를 지은 사람으로서의 어떤 별도의 의미 부여를 의도적으로 하지 않은 것으로도 생각됩니다. 그러므로 그의 시에서는 시인의 의도된 입장이 아닌, 독자 스스로 어떤 의미를 찾거나 상상의 나래를 마음껏 펼처 볼 수 있으리라 생각됩니다.


이 시를 읽고 여러분은 어떤 감정을 느끼시나요. 설마 슬픈 마음이 들지는 않으시겠지요.

시인의 마음 어딘가에는 끝없이 강물이 흐릅니다. 이 강물에는 아침의 솟아오르는 햇살이 비치어 은빛 물결이 돋는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강물에는 그의 마음이 ‘도른도른’ 숨어있습니다. ‘도른도른’은 ‘도란도란’으로 보이지만, 어쨌든 이 표현은 어떤 정겨운 사물들이 가까이 모여서 서로 몸을 비비고 있는 듯한 모습입니다.

이렇게 이 시는 밝고 정겹기까지 한 시인의 마음을 그리고 있습니다. 그의 마음 어딘가에 반짝이는 강물이 흐르고 그 강물 속엔 또 그의 마음이 오밀조밀 숨어있습니다. 이렇게 마음이 강물이 되고 또 그 강물이 마음도 되는 그런 정경이 연상되는 표현입니다.

이 시의 전체적인 분위기는 이 밝음 가운데서도 무언가 애틋한 듯, 외로운 듯한 느낌도 함께 가지고 있습니다. 이렇게 영랑의 시는 이 강물이 품고 있는 마음에서, 아니 마음이 품고 있는 강물에서 그의 시가 솟아 나오는 것이라고 말해도 시인이 부정하지는 않겠지요.

그리고 마음속의 강물은 ‘끝없이’ 흐릅니다. 이렇게 그의 시도 마음속에선지 강물 속에선지 끝없이 흘러나왔을 것입니다.

이 시를 그의 첫 시집 맨 앞에 놓은 것도 그의 시의 원천을 밝히려는 것이 아니었을까 짐작해 봅니다.


그리고 이 시는 반짝이는 은빛 물결, 병아리때 처럼 모여서 도른도른 거리는 마음들이라는 표현에서 또 무언가 아름다운 모습, 사랑스러운 분위기도 느낄 수 있습니다.


‘영랑시집’의 표지 안쪽, 그러니까 이 1번 시의 오른쪽 페이지에는 존 키이츠의 말이 단 한 줄만 영어 원문으로 실려있습니다.

‘A thing of beauty is a joy for ever.’ (아름다운 것은 영원한 즐거움이네.)

이 시구는 키이츠의 시에서 따온 것으로, 영랑이 좋아하고 공감하는 구절이 분명해 보입니다. 그래서 이것을 두고 영랑이 유미주의자(唯美主義者)라고 말하는 평자도 많고 이를 전제한 영랑 시 읽기를 시도하는 경우도 많이 보입니다. 그러나 영랑이 시 쓰기의 정신으로는 그렇다 할지라도 이것을 그의 삶 속에서 오직 아름다움만을 추구했다고 하기에는 무리가 있어 보입니다.

그러나, 영랑은 그의 시작(詩作)의 태도에서는 순수하고 아름다운 감각을 추구하는 유미주의적 서정시인임은 분명합니다. 그의 시구의 아름다움, 운률의 아름다움은 위의 시를 기점으로 그의 시 전체에서 느낄 수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한편의 영랑 시에서 우리는 정겹고 애틋하고 외롭고 아름다운, 우리 삶에서 갖게 되는 많은 서정적 정서를 새록새록 느끼게 됩니다.

우리는 영랑 시집의 어디를 펴서 그의 시를 읽어 보아도 이러한 한결같은 정서를 느끼게 됩니다.

‘영랑시집’ 2번의 시도 같이 읽어 볼까요.


돌담에 속삭이는 햇발같이

풀아래 웃음 짓는 샘물같이

내마음 고요히 고은 봄 길우에

오늘하루 하늘을 우르르고십다.


새악시 볼에 떠오는 부끄럼같이

시의 가슴을 살프시 젓는 물결같이

보드레한 에메랄드 얇게 흐르는

실비단 하늘을 바라보고십다.


이 시도 앞의 시와 같이 고요하고 온유하고 고운, 영랑 특유의 서정성을 맛볼 수 있습니다.

미당 서정주 시인은 영랑의 서정시를 다음과 같이 평하고 있습니다.

“영랑의 시는 또 순전한 조선산(朝鮮産)의 모시나 명주 삼팔(올이 고운 명주)이다. 눈에 선뜩 그 기교가 드러나진 않지만, 이 가늘게 짜인 명주는 충분히 올과 날이 바르고 보드랍고 윤기가 있고 또 뜨시기까지 하다.”(1)


여기서 '한국의 슈베르트'라 불리는 이수인이 작사 작곡한 가곡 '내 맘의 강물'을 들어 보시기를 권합니다.

'내 맘에 끊없는 강물이 흐르네'


서정주. ‘영랑의 서정시’. ‘문예’ 1950. 3. 12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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