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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잎의 노래

나의 애송시 감상노트 6

  

                 엄마야 누나야

                            김소월     

엄마야 누나야 강변 살자,

뜰에는 반짝이는 금모래 빛,

뒷문 밖에는 갈잎의 노래

엄마야 누나야 강변 살자.    

 

 처음 이 시의 감상 노트는 사실 따로 쓰려는 생각이 없었습니다. 너무나 우리에게 친근하고 아름다운, 그 무엇을 더 첨가하고 해석하고 할 것이 없는 동요 같은 시이니까요. 

 그런데 우리나라의 한 유명한 논객(論客)이 쓴 책을 보다가 이 시에 대한 그의 해석 또는 논리가 도무지 받아들이기에는 무리로 보여 이를 좀 다루어 보려는 것입니다.     

 먼저 시인 김소월(1902-1934)의 어린 시절을 보면, 평안북도 구성에서 태어나서 아버지를 시인이 두 살 때 어떤 사고로 일찍 여의게 됩니다. 그리고 광산을 경영하던 할아버지에게로 들어가 살게 되고, 정주의 오산학교에 다닐 때인 14세에 할아버지의 주선으로 결혼을 합니다. 그리고 이 시는 그가 20살인 1922년에 ‘개벽’에 발표되었습니다.

 ‘소월(素月)은 그의 필명으로 '하얀 달'이라는 뜻인데, 어찌 보면 그의 생애가 한낮에 파란 하늘 한쪽 구석에 떠 있는 하얀 반달같이 그렇게 빛도 없이 살다 간 것처럼 보입니다.     

 이 시에서 화자는 어린 소년입니다. 그리고 지금 살고 있는 곳은 도회지 이거나 산속이지 않을까요. 시 속의 화자를 시인과 꼭 결부할 필요는 없지만, 아마도 할아버지가 광산을 경영했다고 하니 혹시 소월의 어린 시절의 집이 산 가까이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시 속에서 이 소년은 엄마 누나에게 떼쓰듯 강변에 가서 살자고 합니다. 그런데 그 강변의 전경 묘사는 좀 이런 어린 소년의 그것으로 보기에는 아주 구체적이고 감성적입니다. 

 이렇게 하나의 수채화같이 곱고 고운 시를 이제 어떻게 거꾸로 어렵고 난해한 시로 만드는지 한번 보겠습니다.


  위에서 말한 논자(論者)는 먼저 ‘아빠야 형아야’ 하지 않고 왜 ‘엄마야 누나야’라고 하는지 묻고 이렇게 말합니다. 

 “‘엄마야 누나야’의 그 여성 공간은 겉으로 드러난 텍스트요, 아빠와 형은 뒤에 숨은 텍스트이다. 시를 모르는 사람들은 겉의 말만 읽고 그것과 대립된 숨은 공간을 보지 못한다.”(1) 그리고 '야‘\'라고 부른 것을 또 다음과 같이 해석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뭘 부른다는 것은 바로 현존하는 공간이 아니라는 것을 암시한다. 눈앞에 함께 있으면 부르겠는가? 그 대상이 자기 앞에 없거나 멀리 있거나 함께 있어도 자기에게 관심을 주지 않을 때 부른다.(중략) (시의 화자의) 현존하는 공간은 아빠와 형님으로 상징되는 비자연적 공간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위의 말은, 시 속의 어린 소년이 이렇게 ’\'엄마야 누나야' 하고 부른 것이, 이 소년은 지금 아버지와 형으로 대표되는 남성 공간에 있고 어머니와 누나는 지금 여기 없거나 소년에게 무관심한 것으로 풀이하려 합니다. 그러니까 이 시를 이러한 대립적인 요소를 바탕으로 두고 읽어야 한답니다.      

 이렇게 이 소년이 있는 공간이 엄마 누나와는 먼, 아빠 형의 공간에 있다고 주장하는 이유를 '야'라는 호격어를 붙여서 부른 것에서 그 근거를 찾고 있습니다. 그러나 ‘엄마, 누나 강변 살자.’는 ‘엄마야 누나야 강변 살자’와는 느낌이 전혀 다릅니다. 이 시를 처음 읽는 독자는 전체적인 시에서 어떤 아름다움을 느낍니다. 그것은 이 시가 노래하는 시각적 전경의 아름다움 뿐만 아니라 시의 음악적 운율에서 오는 부드러움이 겹쳐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소월의 다른 시, 예를 들면 ‘산유화’를 보아도 그가 얼마나 시의 음악성을 중시하는 시인인지 알 수 있지 않나요, 그리고 우리나라 지역에 따라서, 특히 예전에는 ‘어매요, 아배요,’ 또는 ‘형아야, 누이야’하고 부르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이런 호칭이 더욱 친근감 있게 들린다는 것은 우리나라 사람이면 대부분 공감하실 것입니다.

 설사, 가까이 있는 사람을 이렇게 부르는 경우가 없다고 하여도, 스위스의 문예학자인 에밀 슈타이거의 말을 빌리면, ‘시인은 음악적인 요소에 우선권을 부여할 태세를 갖추고 있다. 어조나 각운을 위해서 시인은 기본적으로 의미 지향인 언어의 규칙이나 관습적 어법에서 때때로 벗어난다.’라고 말합니다. 이 말은 더 부연할 필요도 없이 특히 서정시의 경우 더욱 그러한 것입니다.  

   

 이제 시의 2행과 3행으로 들어가 보겠습니다. 위의 평자는 다시 이렇게 말합니다.

 “뜰은 전방성(前方性)과 수평성을 나타내고 있는데 비해서 뒷문은 후방성(後方性)과 수직성을 보여준다. 왜냐하면 뜰은 모래의 묘사를 통해서 흘러가는 강물을 암시해 주고 뒷문 밖의 갈잎은 숲이나 산을 나타내주고 있기 때문이다.(중략) 뜰은 열려있는 트인 공간, 뒷문 밖은 닫혀 있는 막힌 공간으로 구성된다.”(2) 

 그리고 여기서 더 나아가서 '갈잎'을 굳이 사전까지 동원하며 다양한 수종의 나뭇잎 즉 활엽수로 보아야 이 시의 전체 맥락에 맞는다고 강조하면서 “'엄마야 누나'는 일종의 '집터 고르기'이며 그가 지으려고 하는 집을 그림으로 그려놓으면 우리가 흔히 보아온 한국의 옛 산수화가 된다. 그렇다, 그것이 바로 한국인이 수천 년 살아온 배산임수(背山臨水)의 집터이다.”(3)      

 어떤 논리를 만들어 놓고 그 틀에다 억지로 구겨서라도 집어넣으려다 보면 뻔히 보이는 것까지 보이지 않고 자기 환상에 빠지는 것 아닌가요. 여기 첫 행과 마지막 행에 두 번씩이나 시의 화자는 '강변 살자'고 말합니다. 물론 강변이라도 산이 바로 옆에 있는 곳도 있지만, 시에서 말하는 그대로 앞에는 강물이 흐르고 모래가 있고 뒤에는 갈대숲이 있는 곳이라고 묘사하고 있음에도, 굳이 여기서 산수화(山水畵)가 나오고 급기야는 '배산임수', 즉 뒤에는 산이 있고 앞에는 물을 바라보는 그런 곳으로 해석을 해야 한다고 하는지 참 이해 불가합니다. 

'갈잎의 노래'만 보더라도 강가의 갈대숲이 내는 소리가 분명하지 않나요. '갈대의 노래'라는 시나 노래는 많이 있어도, '산의 활엽수의 노래'는 도무지 들어 본 적이 없으니까요. 

    

 시의 내용을 이미지화하는 것은 좋지만 이를 전방성, 후방성, 수직성, 수평성 등으로 굳이 쪼개고 나누어서 봐야만 하는 당위성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런 것을 생각하면서 시를 쓰는 서정시인이 있을까요? 

 이렇게 번쩍이는 칼날이 시를 난도질하는 것을 보면서, 이 고운 시가 지르는 비명 소리가 들리지는 않으신가요. 소월이 그의 시에 대한 이 유명한 평론가의 글을 읽고 과연 어떤 말을 할지 참 궁금할 따름입니다.


 지금까지 한 평론가의 '쉽고 고운 시, 어렵고 복잡하게 읽기'의 사례를 보았습니다. 물론 시는 다의성(多義性)의 문학 분야로 얼마든지 한 사람의 독자 또는 비평가로서 텍스트를 다르게 읽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평론이 이론과 그 도구의 그물에 걸려서 시를 비명 지르게 하는 사태만큼은 꼭 절제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입니다.


 이제 우리는 다시 본래의 시, 가만히 속으로 읊조려 보면 가슴 한가운데가 따뜻해지고, 어린 소년이 갈잎의 노래를 들으며 금모래를 바라보는 그런 모습의 한 폭의 수채화를 그려 볼 수 있는 시가 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이 시를 가사로 한 김광수 작곡의 ’엄마야 누나야‘를 사알짝 율동을 하면서 가만히 불러 보시면 더욱 좋지 않을까요.          

1. 이어령. 언어로 세운 집. 아르테 2015. 14쪽

2. 위의 책. 22쪽

3. 위의 책. 2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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