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Naz Nov 15. 2022

기대와는 너무도 달랐던 첫 경기둘레길 걷기 (1)

1일 차 - 41코스 일부

나가기로 결정한 날 아침이 되었다. 하지만 아침잠에서 깨자마자 든 생각은 ‘오늘 꼭 나가야 하나. 새로운 걸 시작하기가 부담스럽고 싫어. 이대로 가만히 있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였다. 즐거움 때문이라기보다는 삶을 이어나가는 것에 대한 의지 표현으로 걷겠다고 마음먹은 것이니, 자리에서 일어나는 마음이 솜털같이 가벼울 리 없었다. 하지만 오늘이 아니면 언제 시간을 낼 수 있을지 확신이 없었기에, 걷겠다는 생각을 아주 접은 게 아니라면 오늘 가야만 했다. 일어나지 않아도 될만한 핑계를 계속 찾는 나를 누르고, 스탬프북에 도장 찍을 생각을 하며 무거운 몸을 억지로 움직였다. 자리에서 일어나는 이유가 스탬프를 찍기 위해서라니 어디 말하기엔 유치한 동기지만, 나를 움직이게 하는 데는 효과가 있었다.


오늘 걸을 곳은 41번 코스로, 금광호수 남쪽 수석정에서 시작해 청룡사에서 끝이 나는 14.6km 길이의 코스였다. 왠지 금광호수를 끼고 첫 걷기를 시작하고 싶었기 때문에, 계획을 세울 때 40번 코스와 41번 코스 사이에서 고민을 하다가 상대적으로 난이도가 낮은 41번 코스를 첫 코스로 삼기로 했다. 국내 둘레길 경험이 전혀 없기 때문에 14.6km가 걷기에 긴 거리인지 짧은 거리인지 감조차 잡히지 않았고 평소 운동을 전혀 하지 않아 체력에 자신도 없었기 때문에, 41번 코스의 완주가 아니라 중간의 마둔 저수지나 석남사 입구까지만 걷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날은 맑고 화창했다. 너무 덥지도 춥지도 않은 기온이 걷기 좋을 것 같았다. 침대를 나와 움직이기 시작하니 시작일을 오늘로 정하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특별할 것 없이 평소에 입고 다니던 편한 바지, 긴 팔 면티 위에 윈드재킷을 걸치고 스포츠 슬링백을 하나 둘러맨 채 집을 나섰다. 워낙 미적거리다 움직인 탓에 정오나 되어서야 집을 나섰지만, 41번 코스를 다 걸을 계획이 아니니 시간은 충분하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시작부터 일이 잘 풀리지 않았다. 일단 주차. 맵을 보며 내가 이용할 버스정류장에 가까운 주차장을 미리 점찍어 두었는데, 막상 가보니 그 주차장이 비싼 민영주차장이었던 것이다. 결국 나는 차를 돌리고 돌려 세 번째로 찾은 공영주차장에 겨우 주차를 할 수 있었다. 예상치 못했던 일에 시간을 많이 지체했다.


약간 조급해진 마음으로 버스정류장을 찾아 길을 건너려는데, 저기 2-1번 버스가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오늘 내가 탈 2번 계열 버스들 중 한 대로 생각되는 버스였다. 아차 하면 버스를 놓칠 것 같은 상황이어서 나는 겁을 먹고 급히 뛰었다. 2번 계열 버스들(2-5번, 2-6번 등)은 배차 간격이 짧게는 320분, 길게는 700분에 달하기 때문에 눈앞에서 버스를 놓치면 곤란해질 터였다. 게다가 사전에 버스시간표를 찾지 못했기 때문에, 이 버스를 놓치면 다음 버스를 타기 위해 얼마나 더 기다려야 할지 알 수도 없었다. 아슬아슬하게 떠나려는 버스의 옆구리를 두드려 세워, 다행히 버스에 올라탈 수 있었다. 운이 정말 좋다 싶었다. 주차로 지연된 시간을 번 것 같아 흐뭇했다. 하지만 시원시원하게 달리는 버스 안에서 확인차 핸드폰 맵을 검색 해보고, 그 흐뭇하던 마음이 싹 가셨다. 내가 탄 2-1번 버스가 금광호수 방향으로 가는 것은 맞지만, 중요한 갈림길에서 내가 원래 타야 했던 버스들과는 반대 방향으로 향하는 버스였기 때문이다. 원하는 목적지로 가려면 나는 2번, 2-5번, 2-6번 중 한 대를 타야만 했는데, 이 번호들을 외우기가 번거로워 두리뭉실하게 ‘2번 계열 버스들’이라고만 기억해 두었던 것이 화근이었다. 결국 나는 갈림길에서 허겁지겁 하차했다.


버스정류장에 서서 핸드폰으로 내가 원래 탔어야 할 2번, 2-5번, 2-6번 버스들의 실시간 위치를 확인해보았지만, 운행 중인 버스는 한 대도 없는 상황이었다. 한편 41번 코스의 시점은 내가 서둘러 내린 버스정류장으로부터 4.4km나 떨어져 있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차라리 시내에서 그냥 택시를 탈 걸, 그러면 돈은 좀 쓰더라도 초반의 시간과 체력을 아낄 수 있었을 텐데. 버스를 제대로 확인하지 않고 서둘러 잡은 나 자신이 원망스러웠다. 답답한 마음에 10분가량 핸드폰의 실시간 버스 정보만 줄창 새로고침 하다가, 결국 목적지까지 그냥 걷기로 마음먹었다. 어차피 걸으려고 나온 건데 어딜 걷는지가 뭐 그리 중요하겠어, 경기도 둘레길에 포함되는 코스는 아니지만 그냥 한 시간 더 걷는다고 생각하자, 라며 억지로 마음을 다독였다.


41번 코스의 시점까지는 시원하게 뚫린 왕복 이차선 도로의 귀퉁이를 따라 걸어야 했기에, 걷는 길이 그리 쾌적하진 않았다. 게다가 요전에 차를 타고 북쪽을 돌아 금광호수로 접근했을 때와는 길의 분위기가 사뭇 달랐다. 금광호수 남쪽 도로에는 운영을 언제 멈췄는지 알 수 없는 음식점이나 카페들이 중간중간 방치되어 있었고, 운영되고 있더라도 유행이 지나고 쇠락한 느낌이 나는 곳들이 대부분이었다. 길가에 호수를 바라보는 방향으로 놓여있는 벤치들도 파손된 것이 많았고, 멀쩡하다 하더라도 그 주변에는 빈 컵라면 용기나 담배꽁초가 지저분하게 버려져 있는 경우가 많았다. 낚시 왔던 사람들이 버리고 간 것 같았다. 시작부터 틀어진 계획과 예상했던 것과는 조금 다른 풍경 때문에 걸으면서 살짝 시무룩했지만, 단풍이 우아하게 물든 풍경과 파란 하늘이 조금이나마 내 마음에 위안이 되어주었다. 완만한 경사로를 계속해서 걷다 보니 약하게 숨이 차오르고 땀도 조금 났다.


그렇게 약 3km쯤 걸었을까. 마침 버스 정류장이 눈에 띄길래 실시간 버스 도착 정보를 다시 열어보았다. 2번 버스가 15분 떨어진 거리에서 내 쪽으로 다가오고 있다고 했다. 1.5km 정도 남은 41번 코스 시점까지는 걸어서 약 25분, 버스를 타면 3분 남짓. 나는 다리도 쉴 겸 기다렸다가 2번 버스를 타기로 했다. 새로 지은 듯 보이는 중대 버스 정류장에 혼자 앉아서 다리를 쉬고 있자니, 말벌 한 마리가 정류장 지붕 밑으로 들어와 웅웅거렸다. 나에게 시비를 걸 것 같지는 않았지만 날갯짓 소리가 위협적으로 들려 나는 말벌에게 정류장을 슬그머니 내어주고 길에 나와 버스를 기다렸다. 햇볕이 이마에 따갑게 내리쬤다.


중간에 타고 내리는 사람이 없었는지, 버스는 15분이 채 못 되어 도착했다. 그리고 기다린 시간이 허망하게도, 버스는 2분도 걸리지 않아 나를 목적했던 하룩동 정류장에 데려다주었다. 하룩동에서는 나 외에 다른 아주머니 한 분도 같이 내리셨는데, 버스는 움직임이 느리신 그 아주머니가 두 다리를 땅에 다 내려놓기도 전부터 빨리 움직이라며 경고음을 빼빼 울려댔고, 결국 내가 아주머니의 뒤를 이어 내리기 무섭게 뒷문을 후려치듯 닫고는 다음 목적지로 내쳐 가버렸다. 세게 밟은 액셀레이터가 만든 엔진의 굉음이 버스의 짜증같이 들렸다.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경기둘레길 리본과 스티커들이 눈에 띄기 시작했다. 우여곡절은 조금 있었지만 드디어 시작인가 보다, 하는 생각에 살짝 설렜다. 수석정 근처 스탬프함을 찾아 스탬프를 성공적으로 찍고 인증사진도 찍으니, 이제 60코스 중 하나를 걷는다는 것이 정말 실감 났다. 그런데 41번 코스의 방향을 알기 위해 핸드폰의 지도를 보니, 아까 내가 버스를 탑승했던 중대 정류장까지 되돌아가야 한다고 했다. 버스를 타고 와서 다행이지 만약 걸었던 길을 또 걸어 되돌아가야 했다면 뭔가 억울할 뻔했다.


수석정에서 중대 버스 정류장까지는 단순하고 완만한 내리막길이어서 지도도 보지 않고 쉽게 되돌아왔다. 그 사이 말벌은 정류장에서 보던 일을 다 보고 제 갈 길 갔는지, 다시 들른 중대 정류장은 조용했다. 그 지점부터는 마을을 지나 갈림길이 많아져 핸드폰의 지도와 둘레길 표식을 맞춰보며 주의해서 길을 찾아야 했다. 큰 도로에서 차들의 소음과 매연을 받으며 걸을 때도, 작은 마을의 농가들 담 너머를 훔쳐보며 걸을 때도, 둘레길의 안내 리본은 충실하게 안내자 역할을 해주었다. 처음에는 핸드폰에만 의지해서 걸었지만, 걷다 보니 리본을 찾는 요령이 생기고, 그 덕에 핸드폰을 점차 드문드문 들여다보게 되었다. 얼마 전 박두진문학길의 숲길을 걸을 때는 서낭당 리본 같아 눈에 거슬렸던 리본 색상이, 삼거리 사거리마다 눈에 잘 띄는 색으로 든든한 안내자 역할을 해주니 무척 든든하고 고맙게만 보였다. 마치 형체 없는 누군가가 나를 안내해주는 느낌이었다.


(이어서)




매거진의 이전글 경기둘레길 패스포트 도착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