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녀는 나중에 알고 보니 사장님의 조카로 사장님을 큰아빠라고 불렀다. 긴 겨울 방학 동안 서울에서 큰아빠가 계신 이곳 완도에서 머물기로 한 모양이다. 조카에게 탁구를 가르쳐주기로 했는데 내가 먼저 와 있어서 큰아빠의 멋진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서 탁구라켓을 잡더니 조카보다 먼저 나를 부른다.
나는 소녀 앞에서 사장님보다 더 멋진 폼으로 잘 치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다. 가벼운 근육 스트레칭과 손가락 마디마디를 또도독 소리 나게 푼 후에 라켓을 들고서 사장님과 스트로크를 시작했다. 아저씨는 백핸드로 디펜스를 하며 나는 포핸드 자세를 잡고서 아저씨가 보내온 볼의 방향을 따라서 기계처럼 움직였다.
“따닥따닥 따닥따닥 따닥따닥 따닥따닥,,,
따닥따닥 따닥따닥 따닥따닥 따닥따닥,,,”
랠리가 끊어지지가 않아 아침의 고요한 정적을 깨는 소리는 한판 신명 나게 벌어진 사물놀이처럼 일정한 비트로 울리는 징과 꽹과리 장고와 북소리고 움직이는 동작은 그 소리에 맞추어서 머리를 좌우로 흔들고 뛰면서 상모를 돌리는 사물놀이패의 모습과 흡사하여 시간이 갈수록 난로가 뜨거워진 시간보다 더 먼저 몸은 운동의 열기로 후끈해진다.
손목과 무릎관절이 아플 정도의 스트로크 랠리가 끝나자 아저씨는 오늘은 그만하자고 하여 공을 멈추니 어디선가 박수소리가 들려온다. “짝짝짝 짝짝” 소년은 땀을 훔치면서 소리보다 박수를 치는 예쁜 손으로 눈이 갔다.
“와 너 참 잘 친다 선수니?” 큰아빠와 번갈아가면서 소녀가 묻는 표준말에 소년은 어떻게 대답을 하여야 할지를 몰라서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되도록이면 사투리는 사용하지 않아야 하는 걱정도 생겨 짧게 “어”라고 대답을 했다.
왜 사투리를 의식했을까? 사투리를 쓰면 스스로 촌놈 같아서 창피하다는 생각이 들어서 그랬었는지 아무튼 몸에 배여 편안한 사투리를 자제하려고 애써 노력을 했다. 아저씨는 둘은 나이가 같으니 친구 해도 된다는 허락 아닌 허락으로 “나중에 원준이가 큐미에게 탁구를 가르쳐 주면 되겠다.”라고 하면서 소녀를 데리고 식당으로 나가는 문으로 나갔다.
난로가 벌겋게 달궈져서 실내도 훈훈해지고 시간이 오전 열 시를 넘기자 탁구장 카운터를 보는 여직원도 오고 뒤따라 손님들도 오기 시작한다. 소년은 잠시 흐르는 땀을 수건으로 훔치면서 큰아빠를 따라간 소녀의 뒷모습을 아련하게 그리면서 흐뭇한 미소를 지어본다.
이름이 ‘큐미’랬지. 서울 사람은 이름도 참 희한하다. 그리고 청소년 잡지의 표지모델로도 손색이 없는 얼굴과 핑크빛 앙고라 스웨터를 살짝 덮은 목도리 회색 체크무늬 모직 스커트와 하얀색 스타킹, 깜장 고도방 구두를 신었으니 잡지의 모델이 표지를 뚫고 나온 것처럼 보였다.
점심시간이 되어 점심도 먹을 겸 식당 일을 도우러 탁구장을 나섰다. 골목길 중간은 위 작은 산 공원 골짜기에서 불어오는 바람과 바닷바람이 만나는 지점으로 겨울에 바람은 거세기도 하지만 불순물 하나 없는 맑은 공기였다. 소년은 언뜻 이 바람이 아침에 본 소녀가 소년에게 불어오는 신선한 바람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오늘은 식당이 꽤 분주했다. 곰탕 배달도 많았거니와 식당 내 곰탕과 로스구이 불고기 손님까지 겹쳐서 탁구장을 생각할 겨를도 없이 시간이 오후 3시를 훌쩍 넘었다. 바쁜 시간이 지나니 큐미가 생각났다. 점심으로 그 뜨거운 곰탕 한 그릇을 입 천정이 데든 말든 마파람에 게 눈 감추듯 먹어 치우고 바쁜 일을 도와준 만큼 의기양양하게 탁구장으로 향했다. 당연히 있으려니 했던 소녀의 모습이 보이지가 않아서 소중한 물건을 찾을 수가 없는 거처럼 답답한 심정이 되어 빙 둘러본 탁구장의 탁구대마다 시끄러운 소리가 건성으로 들린다.
집에서 부산을 떨며 탁구장으로 왔던 만큼 소녀가 안 보여서 실망은 했지만 저녁에는 나오리라고 희망을 품으면서 집으로 갔다. 하는 둥 마는 둥 식당 일을 도와주면서 시간이 되기를 기다렸다. 다시 간 탁구장에는 저녁 8시가 넘자 여 직원은 퇴근을 하고 소일거리 삼아서 탁구장을 관리하시는 사장님의 어머니이신 할머니께서 나와 계셨다. 낮의 아쉬움을 넘어서 기대했던 만큼 소녀가 보여서 너무나도 기분이 좋았고 아침나절 잠깐 봤지만 이제는 서로가 인사를 나눌 정도로 오래된 친구처럼 여겨졌다.
“큐미 나왔구나 밥은 먹었니?”
생전 처음 해본 서울말이 왜 이리 어색할까?
“응~ 너 또 왔구나”
사투리 쓰는 것이 은근히 부담되어 말 수를 줄이거나 단답형으로 대답을 해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대화가 다정다감함은 없었지만 그래도 누구보다 먼저 소녀를 안다는 뿌듯함과 으쓱함은 뭘까? 할머니는 둘의 대화를 듣고서 ‘이것들이 벌써...’ 하며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안경 너머로 양쪽을 번갈아 본다.
탁구장은 일찍부터 4대의 탁구대가 찼고 난로를 앞에 두고서 대기 손님들이 작은 칠판에 탁구대마다 시작과 끝나는 시간이 써진 시간표를 쳐다보고 있다. 방학이라서 그런지 이미 붐을 탄 탁구는 탁구장을 찾는 사람들로 더욱 많아졌다.
소년체전에 나갔던 선수들 뿐만 아니라 선발전에 참여했다가 떨어진 학생들, 방학 기간에 타지에서 고향으로 온 선배들, 탁구의 매력에 빠진 일반인들까지 모여 탁구장은 남녀노소의 유일한 놀이터가 돼있었는데 와중에 할머니 곁에 다소곳이 앉아있는 소녀는 까만 밤에 유독 빛나는 샛별처럼 보여 많은 사람들의 눈길을 사로잡았다.
내가 상관할 바는 아니지만 사람들이 탁구를 치다가 볼도 일부러 소녀가 있는 곳으로 떨어트려서 주우러 가기도 하기에 은근스럽게 신경이 쓰이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