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인이 되어 사회활동을 하다 보면 지인들이 생기고 필수적으로 애경사가 뒤따른다. 오래전에 고향에서 살 때에는 시골이라서 주변 사람들이 함께 자라온 선, 후배들과 친구들이 많았기 때문에 품앗이라고 하더라도때가 되면 들어가는 애경사 비용이 만만치가 않았었다.
도시로 이사 와서 직장생활과 테니스 클럽활동이 사회생활의 전부가 되었는데
그 외 인적 교류가 적어지다 보니 애경사로 지출되는 비용이 시골 생활에 비해 훨씬 적어졌다.
몇 년 전이었던가 기억도 희미하다. 클럽의 친한 회원의 아들이 예식을 올렸다. 혼주는 평소 원만한 성격이고 처세도 좋았는지 하객들이 많이 왔었고, 클럽에서도 많은 회원들이 참석을 하였는데 친하다고 여겼던 한 사람이 빠져서 의아했다. 바빠서 못 왔지만 축의금은 냈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하지 않았다고 한다.
애경사에 대한 그 사람의 지론은 "본인이 먼저 받지 않으면 내가 먼저 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아니 어떻게 저런 생각을 할 수가 있지?' 인정과는 먼 도시 생활의 일면을 본 듯했지만 솔직히 이해가 되지 않았다.
엊그제 고향 후배로부터 메시지를 통해 부고를 전해 받았다. 부모님과 장인어른을 저 세상으로 모실 때 장례를 고향에서 치렀지만 조문은커녕 조의금도 보내지 않은 후배여서 메시지를 받고서 잠시 생각했다. 결론은 연락을 받고도 하지 않으면 서운함의 순환은 계속해서 이어질 것으로 보고 문상은 못 가더라도 조의금은 상주 계좌로 보냈다.
이렇게 마음을 먹게 된 먹게 된 것은 어떤 계기로 인해서 이다.
어릴 적에 다퉈서 사이가 좋지 않게 되어 더 이상 왕래가 없는 고향 친구가 있는데 고향에 가도 다른 친구들처럼 찾을 일이 없는 친구였다. 몇 년 전에 큰 딸을 시집보냈다는 얘기를 뒤늦게 다른 친구를 통해 알아듣게 되었다. 직접 연락이 오지 않아서 축의금도 보낼 수가 없었고 크게 미안한 마음도 들지 않았다. 몇 해 후 아들을 장가보낸다는 소식이 들려와서 이번 역시 메시지를 받지는 않았지만 기꺼이 편부를 하였다.
나중에 고맙다는 인사 메시지를 받고 늦었지만 축하 전화도 하고 왕래의 물꼬가 터지니 50여 년 동안의 서먹함도 차츰 풀렸고, 장인어른 상을 당했을 때는 빈소까지 찾아와 애도를 표하고 갔다.
우리는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수많은 사람들과 인연을 맺으면서 살아갑니다. 기본적으로 가족, 그리고 고향의 친구와
선, 후배 학창 시절 친구들, 직장 동료들과 사회에 나와서 취미생활을 같이 하는 벗들입니다.
이렇게 모두와 잘 지내다가도 어떤 계기로 인해 서로의 관계가 갈등을 빚어 소원해지기도 하고 다시 좋아지기도 하는 반목과 화해의 과정이 삶의 여정 속에 놓여 있습니다.
어떤 관계든지 한 번 틀어지면 영원히 회복이 안 될 수도 있지만 다시 관계를 이어가려면 이왕이면 내가 먼저 손을 내밀어서 푸는 것이 좋습니다. 쉽지 않고 용기가 필요합니다. 어쩌면 그 순간 상대도 "내가 먼저 마음을 풀려고 했는데" 하면서 손을 꼭 잡을 수도 있습니다.
내가 먼저 네가 먼저 시작하여 엉킨 마음이 풀린다면 순서는 자존심이거나 거절의 두려움일 뿐 별 의미가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