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같은 오늘, 오늘 같을 내일을 산다는 건 과연 따분한 삶일까 아님 참 다행스런 일일까? 얼마 전 재미있게 읽은 소설 '달라구트 꿈 백화점'의 한 구절을 인용해보면 인생은 99.9%의 일상과 0.1%의 낯선 순간이라 했다. 물론 정확한 답이 있을 수 없는 수치이긴 하나 완전히 생뚱맞은 소리는 아닐 테고. 어쨌든 인생의 대부분이 그저 평범한 일상이라니 그러고 보면 모두들 다 그날이 그날 같은 하루를 보내고 있는 가 보다. 나만 쳇바퀴 돌리는 다람쥐마냥 사는 줄 알았는데 살짝 위로가 된다.
'세상 풍경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풍경, 모든 것들이 제자리로 돌아가는 풍경'
들을 때마다 기분 좋아지는 '풍경'이란 곡에 나오는 노랫말이다. 정말 모든 것들이 제자리에서 굴러가는 지극히 평범한 일상이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평화롭고 아름다운 풍경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매일 똑같은 시간에 일어나 똑같은 하루를 시작하고 똑같은 거리를 지나 똑같은 사람들을 만나 똑같은 일을 해야 하는 그런 반복된 나날 속에서 그 소중함을 느끼기란 나에겐 참 쉽지 않은 일이다. 아주 드물긴 하지만 평범한 이 하루가 너무나 감사하다는 사람을 만날 때가 있다. 물론 그 속사정이야 내가 알턱이 없지만 시련 같은 큰 일을 겪지도 않은 사람 같은데. 세상을 달관한 듯한 모습에 살짝 신기한 맘이 앞서는 게 그 말이 정말 진심인지 의아하기도 하다.
가끔 일탈까지는 아니어도 너무나 몸에 익어 모든 게 자동반사 같은 일상에서 벗어나고 싶은 때가 있다. 편안하고 익숙한 그 울타리 안을 벗어나 0.1%의 낯선 순간으로 기꺼이 성큼성큼 걸어 들어가고 싶다. 불안, 우울, 근심, 초조 이런 회색빛 두려움이 아닌 기분 좋은 오렌지 빛 설레임을 친구 삼아. 바로 여행이란 매력적인 문을 통해서 말이다.
앞만 보며 끊임없이 달려 지치고 힘들 때 잠시 나를 불러 세워 숨을 고르게 할 시간이 필요하다. 더 이상 쥐어짤 에너지가 얼마 남지 않아 내 몸 여기저기서 요란한 경보음이 울리 때 다시 그 일상을 헤쳐나가기 위한 충전을 해야 한다. 나에게 이 모두를 가능케 해 주는 건 바로 여행이다. 일상에서 한걸음 벗어나 천천히 스스로를 들여다보면 날 지치게 만든 그 무언가가 좀 더 객관적으로 보이기 시작한다. 그리고 하나씩 정리해 나간다. 놓아야 하는 것과 다시 잡아야 하는 것, 좀 더 기다려야 하는 것 그리고 과감하게 돌아서야 하는 것들을. 그렇게 꽉 찬 내 안의 방들을 청소하기 시작한다.
낯선 곳, 낯선 시간에서 다른 사람들의 평범한 일상을 바라보는 것도 여행의 또 다른 재미이다. 여행지에서 마주하는 이른 아침 풍경은 더욱 그러하다. 분주히 목적지를 향해 발걸음을 서두르는 사람들과 달리 아침부터 여유로이 주위를 두리번거리는 나 자신을 보면 뭔지 모를 짜릿함이 느껴지기도 한다. 새로운 나를 찾기 위해, 어제와 다른 나를 꿈꾸기 위해, 이 여행의 끝에서 무언가 깨달음을 얻기 위해 그렇게 여행을 떠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다소 부담스런 목적을 두지 않더라도 일상을 떠나 걷다 보면 나 자신도 모르게 많은 걸 얻게 된다.
여행을 계획하고 준비하는 과정 역시 날 설레게 만든다. 사실 좀 번거로운 부분도 없진 않지만 모두 여행이란 여정에 포함된 하나의 부분 집합이라 생각한다. 그리 충동적이지도 모험적이지도 못한 우리 부부의 여행에서는 좀 귀찮더라도 제대로 준비가 필요하다. 가만 보면 그 과정이 귀찮아 은근슬쩍 한걸음 물러서 있다 나중에 남이 다 차려놓은 밥상에 숟가락만 슬쩍 올리려는 얌체들도 간혹 눈에 띈다. 콕 집어 말은 안 하겠지만 우리 집에도 비슷한 사람이 한 명 있다.
매사 계획적인 성격 탓에 여행 전 준비하고 정해야 할 것들로 몇 주전부터 혼자 마음이 바빠지기 시작한다. 특히 남편과의 여행에선 내가 해야 할 일들이 그의 것보다 훨씬 많다. 일단 어디로 향할지 큰 방향을 잡은 후 디테일하게 가볼 만한 곳을 정한다. 입장료나 주차비, 이동 거리, 숙소 위치, 취향 등을 고려하여 나름 효율적으로 스케줄을 잡아 본다. 여행의 기억을 새록새록 떠오르게 해 줄 사진을 위한 준비도 필요하다. 있는 옷 없는 옷 죄다 끄집어내어 코디하는 것은 내가 해야 하는 일들 중 꽤나 머리 아픈 일이다. 남편과 나 둘 다 사진 찍기는 좋아하나 옷은 잘 사지 않기에 사진들을 들여다보면 매번 그 옷이 그 옷이다. 이젠 좀 변화가 필요한 때이다. 젊음이란 마술 망토도 사라진 지 오래니 다른 것들의 도움이 절실하다. 내가 신경 써야 할 부분은 아직 많이 남아 있다. 집에 혼자 남아 있을 고등학생 딸아이의 식사와 간식도 부족함 없이 준비해놓아야 맘 편히 여행을 떠날 수 있다.
맛집 탐방을 전혀 즐기지 않는 우리 부부가 끼니를 해결할 방법도 생각해야 한다. 물론 식당도 들르긴 하지만 준비해 가는 먹거리들을 이용하는 걸 훨씬 좋아한다. 경제적인 건 말할 것도 없고 일단 식당의 푸짐한 음식량이 내겐 다소 부담스럽다. 남기기 아까워 꾸역꾸역 먹다 보면 여행 내내 속이 편치 않다. 무엇보다 내 입엔 직접 준비해 간 음식이 어느 음식점보다 맛있다. 며칠 전 정선 아우라지에서 반짝이는 강물을 바라보며 끓여 먹은 구수한 아침 숭늉과 커피는 정말 잊을 수 없는 맛이었다. 그게 바로 여행의 또 다른 즐거움이라 생각된다. 날짜가 잘 맞아떨어지면 재밌는 오일장 구경도 할 수 있으니 각 지역의 장날과 상설 시장 등도 빠짐없이 확인해봐야 한다.
앞에서 언급한 것들 모두 소홀히 해선 안 되지만 가장 중요한 준비과정은 따로 있다. 사실 캠핑이나 여행을 앞두고는 최대한 남편과 사이좋게 지내려 하는 편이다. 평소에 꼴 보기 싫던 남편의 행동들도 이때만큼은 좀 너그러이 봐줘야 하며 말 한마디도 다정히 건넨다. 이제껏 쌓인 게 많으니 결코 쉽지 않은 일이지만 최대한 성격을 죽여가며 남편을 말캉말캉하게 녹여 놔야 한다. 그렇게 시동을 미리 걸어놔야 여행 내내 사이좋은 부부로 둔갑이 가능하다. 평소엔 앞서거니 뒤서거니 앞뒤로 일렬로 걷던 것도 어느새 옆에 바짝 붙어 나란히 팔짱을 끼고 걷거나 한 번씩 손도 잡아 본다. 겉보기만 그렇게 달라지는 게 아니다. 둘의 합도 잘 맞아 여행 내내 별 대단한 게 아니어도 같이 웃고 같이 즐거워하게 된다. 여행을 그리 달가워하지 않는 무뚝뚝한 남편이기에 이러한 준비 과정이 없음 오히려 여행까지 가서 속만 더 뒤집어져 올 수 있다. 때론 이 모두가 귀찮기도 하지만 일상을 벗어나 낯선 세계로 들어서는 즐거움에 비하면 너무 보잘것없는 거라 여기고 즐겁게 하려 한다. 근데 이상하게 이번 여행을 앞두고선 그리 흥이 나지 않는다. 4박 5일이란 제법 긴 남편과의 여행을 앞두고 있지만 좀체 마음의 동요가 일어나지 않는다.
여행의 동지가 될 남편의 모든 것이 곱게 보이지 않는다. 사사건건 입을 대고만 싶어 진다. 나 자신의 모습도 참 낯설다. 아무리 요즘 무기력한 상태라지만 여행까지 이리 썩 내키지 않을 줄이야. 해야 할 일은 많은데 아무것도 하기 싫다. 이럴 땐 뒷짐만 지고 내가 다 계획하길 기다리는 남편이 더 얄미워진다. 어차피 남편이야 내가 안 간다 하면 땡큐 하고 끝낼 사람이다. 슬슬 걱정이 된다. 여행까지 가서 그게 내 모습이 될지 남편의 모습이 될지 알 수 없지만 여행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을 낯선 모습들을 마주하게 될까 봐. 과연 이 여행의 끝에서 남편과 나는 흐뭇한 미소로 지난 시간을 떠올릴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