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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코니 Jan 07. 2022

그 집 앞

부산시 서구 토성동 3가 4번지 1통 3반...

어릴 적부터 결혼 전까지 25년가량 살았던 곳의 주소지이다. 그곳을 떠난 지 20년도 더 지나는 동안 생각조차 아니 생각할 필요조차 없었던 그 주소지가 어느 날 문득 내 입에서 아무런 막힘없이 흘러나오기 시작한다.




지난해 말 나훈아의 부산 공연이 언론 여기저기에서 기사화되었다.  시국에 많은 사람들이 몰리다 보니 방역문제도 있고 게다가 워낙 대단한 가수이기에 공연 상황까지 제법 자세히 나와 있다. 다행히 별 탈 없이 공연은 마무리된 것 같았다. 기사를 읽는 도중 나의 시선은 자연스레 어느 한 곳에서 멈춰진다.

'부산시 동구 초량...'

고향에서 하는 뜻깊은 공연이란 걸 어필하고 싶은 건지 가수는 관객을 향해 자기가 태어난 곳의 주소지를 읊조린다. 어라, 나하고 같은 부산사람이었어? 같은 사투리를 쓰고 있다는 것만 인지했지 그의 고향이 어딘지 한 번도 궁금해 한적은 없다. 내 나이 오십이 넘었지만 90학번이라 이래 봐도 90년대 문화를 즐긴 세대다. 대학 3, 4학년 때쯤 서태지가 자기로 인해 가요계의 판도가 바뀔 걸 다 안다는 듯 '난 알아요'란 곡으로 혜성처럼 등장했다. 여하튼 수감번호 같은 요즘의 도로명이 아닌 익숙하고 정겨운 번지수를 보니 갑자기 어린 시절부터 결혼 전까지 쭉 살았던 그 집이 떠올랐다. 나도 한번 읊어 볼까? 중간에 막히면 어떡하지? 조심스레 입 밖으로 뱉어 본. 정말 20년 이상 동안 단 한 번도 생각한 적이 없는데 신기하게도 막힘없이 술술 입에서 나온다.






그 집은 참 특이한 구조를 가진 곳이었다. 한 기와지붕을 옆집과 나란히 나누고 있었는데 도대체 왜 그리 지었는지 도통 모르겠지만 같은 지붕에 벽 하나로 가구수만 분리해놓은 형태였다. 집을 단독으로 어떻게 할 수도 없다. 누군가 두 집을 동시에 사서 다시 새로 짓는 것 말고는 아무런 방법이 없었다. 아마 그래서 더 싸게 구입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정면에서 바라보면 마치 두 채의 단층 양옥집이 붙어 있는 것처럼 보였다. 집 외관은 지금 생각해보면 화강암 같은 재질로 마감되었고 지붕보다 훨씬 높이 올렸다. 덕분에 위에서 내려다보거나 뒤에서 보지 않는 이상 아무도 그 집 지붕이 기와로 엮어졌다는 걸 알 수가 없었다. 아주 드물게 부산에도 눈이 와 쌓일 때면 기와가 깨어지든 말든 엄마 몰래 지붕 위로 올라가 눈이 쌓인 기와 미끄럼틀을 즐기곤 했다. 그 일로 엄마에게 맞은 기억이 없는 걸 보면 한 번도 들킨 적은 없는 것 같다. 왜냐하면 그곳은 식구들 아무도 올라오지 않던 장독간, 즉 당시 나만의 비밀의 화원을 통해서만 들어설 수 있는 곳이었기 때문이다.




지금이야 높은 천장을 선호해 기와집의 대들보와 서까래를 그대로 드러낸 집도 많지 당시 대부분 그곳을 합판으로 다 가렸다. 간혹 합판 위를 쥐들이 우당탕탕 달리는 소리들이 소름 끼치게 들려올 때가 있다. 한두 마리가 아니다. 무슨 패싸움이 났는지 떼거리로 몰려서 달리는 소리다. 그러면 엄마는 빗자루를 들고 신경질적으로 천장을 마구 찔려댔다. 지금 바로 밑에는 이 집의 진짜 주인들이 쉬고 있으니 더부살이 너희들이 설칠 시간이 아니라는 걸 알리기 위해. 아직도 이 세상에서 쥐가 제일 무섭고 싫은 이유 중 하나가 어린 시절 날 그렇게 소름 끼치게 만들던 쥐들의 달음박질 소리 때문이기도 하다. 천장엔 군데군데 쥐오줌의 얼룩도 보였다. 덕분에 그다지 깔끔하지 않던 엄마는 정기적으로 도배 작업은 해야 했다. 그녀가 밀가루 풀을 쑤고 빗자루로 벽에 벽지를 싹싹 문지르는 동안 옆에서 조수 역할을 담당했던 건 4명의 자녀 중 항상 나였다.




나이가 들면 들수록 난 그 집이 너무 부끄러웠다. 외관도 낡고 초라했지만 양 옆으로 4층 새 건물 사이에 위치하여 푹 꺼진 그 몰골은 더 비참해 보였다. 대문으로 사용하던 문은 좀 어두운 색으로 칠해졌으면 좋았으련만 밝은 레드 브라운 색의 나무로 된 여닫이 문이었다. 엄마가 한 번씩 문에 덧칠을 했던 걸로 보아 그 색은 그녀의 취향일 게다. 문 가운데는 사람의 형태가 뿌옇게 보이는 커다란 불투명 유리가 달려 있었다. 문의 왼쪽 벽엔 집주인의 이름이 한자로 쓰여진 검은색 문패가 떡하니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나는 앞서 '내가? 나를?'이란 글에서도 언급했듯이 골목길을 싫어한다. 왠지 모습을 숨기고 있던 악당이 틈을 노리고 공격할 것만 같아서 무섭다. 하지만 이 집만큼은 사람들 눈에 띄지 않는 골목 안 저 깊숙이 자리 잡고 있길 바랬다. 아무도 그 집과 그 안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존재마저 모르길 바라면서. 그러나 불행하게도 그 집은 2차선 정도의 제법 큰 도로를 물고 있었다. 심지어 40년도 더 전 지하철 공사가 한창일 때는 집 앞 도로가 버스들이 다니는 임시도로로 이용되기도 했다. 집 앞 도로에 서서 바라보면 용두산 타워의 늠름한 자태가 그대로 보였다. 어릴 적 대부분의 불꽃놀이 행사는 용두산 공원에서 행해졌기에 문만 열고 나가면 그 멋진 불꽃놀이를 실컷 즐길 수 있었다. 그렇게 도로까지 물고 서있던 지하철역에서 빨리 걸으면 10초도 안 걸리는 거리에 주변 환경과 전혀 어울리지 않던 그곳. 마치 문을 열고 들어가면 개화기 시대나 6.25 전쟁 당시로 돌아갈 것만 같은 집이 바로 그 집이었다.






술에 취해 이성을 잃고 집 앞 도로에서 고래고래 고함지르던 집주인의 모습과 지지 않고 옆에서 죽을 둥 살 둥 달려들던 그의 아낙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동네 사람들에게 심지어 그 길을 지나는 모든 사람에게 좋은 구경거리가 되었던 부끄러운 장면들은 내가 그 집이 골목 안에 위치하기를 바랐던 가장 간절한 이유였다.

"어떻게 이런데도 아이들이 저렇게 바르게 클 수 있냐고 사람들이 다 그란다"

엄마는 그 말에 숨은 의도를 반만 해석한 채 나에게 종종 자랑삼아 얘기했다. 본인은 다른 사람들이 말하는 '이런데도'란 환경을 만든데 전혀 무관하다는 듯이. 그리고 그런 소리를 들을 수 있는 게 다 본인 덕분이라고 착각하면서. 그러나 모두 바르지도 않았다. 오직 큰언니와 나만 다른 사람들 기준에서 그랬다.




모두들 그 집을 떠나길 바랬다. 큰언니는 한 공기업에 공채시험을 쳤다. 일부러 집에서 가장 먼 경기도 지역을 선택했고 어린 나이에도 전체 수석으로 합격하여 23살 이른 나이에 가장 빨리 그 집을 떠날 수 있었다. 반면 누구보다 그곳을 떠나고 싶었던 난 그러지 못했다. 88년 서울 올림픽 때까지만 살다 죽는 게 늘 소원인 지병이 있던 집주인은 그 목표를 충분히 달성하고도 훨씬 후인 96년에야 이 세상을 하직했다. 하지만 이후에도 난 그 집을 떠나지 못하고 엄마에게 잡혀 있었다. 큰언니처럼 그리 영특한 머리는 아니였기에 떠날 방법이 참 묘연했다. 그러다 그 집을 합법적으로 벗어날 방법인 결혼을 늦게서야 선택하고선 드디어 떠날 기회를 가지게 되었다. 하지만 억울한 게 내가 결혼할 때쯤 그동안 날 모든 면에서 봉으로만 여기던 엄마도 집을 옆집에 팔아버리고 그곳을 떠났다. 내가 결혼할 땐 다른 언니들과 달리 단돈 1원 하나 보태주지도 않고 집 판돈을 그대로 가지고. 집은 볼품없지만 땅값이 제법 나갔음에도  딸이 결혼하는데 숟가락 하나 이불 하나 사주지 않고 오히려 이바지 음식 준비한 돈과 남편과 날 소개해준 사람에게 건네줄 중매비까지 그녀는 당당히 요구했다. 곧 그곳은 이웃한 건물들과 어울리게 4층으로 다시 지어졌고 그 집이 사라지자 심지어 동네가 달라 보였다.




그곳은 마음만 먹으면 쉽게 찾아갈 수 있는 곳이다. 지금 살고 있는 아파트도 지하철역 인근이기에 환승 없이 35분 정도만 지하철을 타고 가면 바로 그곳에 도착할 수 있다. 물론 집은 없어졌지만 그 동네는 근 30년을 살면서 좋든 나쁘든 나의 많은 흔적과 기억들이 남아 있는 곳이다. 하지만 난 그곳을 마주할 자신이 없었다. 그 동네에 들어서면 어릴 적 여기저기 마구 뛰어다니며 놀던 천덕꾸러기 못생긴 어린 소녀의 모습이 너무나 뚜렷이 보일 것 같았다. 그 아이를 보는 순간 그동안 마음속에 꽁꽁 묻어온 세상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한 온갖 서러운 감정에 나 자신을 주체할 자신이 없었다.






2년에 한 번씩 는 건강 검진의 결과를 듣기 위해 대학병원을 찾았다. 모든 용무가 끝나고 병원을 나온 후 지하철 입구에서 한동안 망설였다. 지하철 입구 저 넓은 도로만 건너면 바로 그 동네다.

'시간이 이렇게 많이 지났는데 이젠 괜찮겠지? 아니, 과연 그럴 수 있을까?'

마음이 복잡하다. 하지만 이미 난 도로를 건너고 있는 중이다. 두려움과 설레임이 반반 섞인 미묘한 마음으로 그 동네에 들어선다. 집 바로 앞 중학교는 외벽이 한층 멋스러워졌고 예전 변호사 소유였던 마당 넓은 집은 4층 건물로 변해 있었다. 어릴 적 적십자 회관이었던 건물은 용도는 달라졌지만 옛 모습 그대로 자리를 지키고 있었고 당시 기독교 사회관이란 이름으로 유치원 운영과 여러 다른 복지 업무를 담당했던 건물도 그대로였다. 엄마는 집에서 남동생만 유일하게 그 유치원에 보냈다. 유치원복을 입고 내 앞에서 뻐기고 서있던 남동생을 부러워할 수 조차 없었다. 그걸 당연시 여겨야만 했다. 난 그냥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못난이 가시나였으니깐.




변해버린 것과 변하지 않은 것이 묘하게 섞인 옛 동네를 천천히 둘러본 후 난 그 집이 있던 곳의 맞은편에 걸음을 멈추었다. 그 블록은 이제 모든 건물이 다 4층으로 나란히 맞춰져 있어 옛 흔적을 찾아보기란 힘들었다. 하지만 집이 있던 그곳은 왠지 똑바로 쳐다볼 수 없었다. 휴대폰을 꺼내 그래도 옛 건물들이 남아 있는 곳의 도로들을 찍기 시작했다. 언제 다시 여기 올 지 모른다. 한 번씩 문득문득 떠오를 때면 사진이나 볼 생각이었다. 거기까진 괜찮았다. 하지만 유치원 옆 도로로 들어서자... 갑자기 눈앞이 흐려지는 게 느껴진다. 곧 언니들과 배드민턴을 치고 있는 어릴 적 내 모습이 눈에 보인다. 내 안 깊숙이 숨어 있던 상처 입은 어린아이가 옛 동네에 들어선 걸 알아채고는 밖으로 뛰쳐나와 예전처럼 활짝 웃으며 동네 여기저기를 뛰어다닌다. 그렇게 한참을  한쪽에 서서 코를 훌쩍이며 어린 소녀의 흔적을 더듬어 갔다.




길을 시작으로 해서 깡통시장을 거쳐 국제 시장까지 어린 시절 다니던 길을 그대로 따라갔다. 길을 걸으며 이제 더 이상 슬퍼하지도 아파하지도 말자 다짐한다. 누굴 원망하지는 않는다. 다 지난 일들이고 무엇보다 지금 난 잘 살고 있으니깐. 내 아이들에겐 내가 어릴 때 느꼈던 두려움, 아픔을 하나도 느끼지 못하게 하고 있으니깐. 그러나 한 번쯤 내 속의 그 아이를 마주 할 시간이 필요했다. 아이는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밝은 모습으로 꿋꿋이 잘 견디고 있었다. 기특하고 사랑스러웠다. 더 이상 가엾이 여길 필요가 없는 쾌활하고 씩씩한...






지금 이 글을 쓰면서도 자기 연민에 빠져 계속 코를 훌쩍이고 있다. 옆에 휴지가 쌓여간다. 그래, 그게 내게 주어진 복이었는 걸 뭐 어째. 지금 누구보다 편안한 50대를 보내고 있지 않은가. 나이 들수록 점점 더 날 챙겨주는 원수 같았던 남편과 공부 잘하고 밝고 선한 아들, 딸... 그럼 됐지. 하지만 무엇보다 지금 이 순간,  그동안 누구 탓 없이 열심히 정말 열심히 살아준 나 자신에게 따뜻한 위로의 말을 건네며 안아 주고 싶다.

'코니, 넌 정말 멋진 사람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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