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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코니 Jan 28. 2022

익숙해지길...



제법 오랜만에 스케치북과 연필을 꺼내본다. 언제든 그림을 그릴 수 있게끔 붓과 여러 도구들을 식탁 바로 옆에 놓아두지만 항상 그렇듯 시작은 쉽지 않다. 꺼져가는 열정을 어떻게든 살리기 위해 특단의 조치로 파브리아노 스케치북을 큰맘 먹고 한 권 샀다. 하지만 두 달 넘게 비닐도 뜯기지 않은 채 뒷베란다에 그대로 방치되어 있다. 이번엔 꼭 저 종이를 사용하고 말 테다 단단히 맘을 먹고 우선 그림 그릴 만한 사진부터 고른다. 사진을 선택할 땐 무엇보다 실력이 부족한 내가 그림으로 표현할 수 있을지를 판단하는 게 중요하다. 이상과 현실은 언제나 괴리가 있기 마련, 아무리 멋진 사진도 내가 감히 표현할 수 없음 과감히 포기해야 한다. 한참 휴대폰을 들여다보다 한 사진에 시선이 오래 머문다. 눈 내리는 뉴욕의 풍경이라... 도시의 풍경도 사진 구도도 모두 멋지다. 게다가 다 그린 후 흰색 물감을 뿌려 눈 내리는 모습을 연출하고 나면 겨울 풍경이지만 굉장히 포근하고 따뜻한 느낌이 들 것 같았다. 무엇보다 뿌려진 눈 때문에 부족한 내 스킬도 많이 가려질 수도 있고.







미술을 전공한 것도 아니고 그냥 혼자서 취미로 그리는 거라 완성도는 많이 떨어진다. 그래도 꼬박꼬박 나름 열심히 그려왔었다. 2년 전 어느 여름 갑자기 왼쪽 눈에 비문증이 찾아온 이후에도 그림을 멈추지 않았다. 하지만 작년 봄 나머지 오른쪽 눈마저 비문증이 생기는 바람에 무언가 자세히 들여다보는 게 예전보다 힘들어졌다. 게다가 안구 건조증도 덩달아 심해져 집중해서 무언가를 보고 있음 종종 앞이 뿌옇게 보이기 시작했다. 눈이 빠질 듯한 통증과 피로감이 느껴져 수시로 인공 눈물을 찾게 다. 결국 길게 보기로 했다. 앞으로 몇십 년을 더 사용해야 되는 소중한 나의 눈을 위해 잠시 쉬어 가는 게 나을 듯했다.






처음엔 눈에 떠다니는 이상한 물방울 같은 것들을 안과에 가면 쉽게 없앨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요즘 의학이 얼마나 발달됐는데 이까지 것쯤이야 그냥 레이저로 쏘면 순식간에 흔적도 없이 사라질 줄 알았다. 하지만 처음 찾은 병원에서 이건 치료도 안 되는 거고 평생 이렇게 살아가야 한다는 말을 듣고는 이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몰라 당황했다. 예민한 성격이다 보니 안경에 묻은 작은 얼룩도 못 견디고 수시로 닦아야 하는데 평생 양쪽 눈에 이런 얼룩들이 둥둥 떠다니는 채로 세상을 바라봐야 하다니... 나는 믿기지 않는 사실에 충격을 받아 어쩔 줄 몰라하고 있으나 의사는 처음부터 끝까지 내가 무슨 잘못을 하여 야단치는 선생과 같은 쌀쌀한 태도로 아무렇지도 않은 듯 얘기를 이어갔다. 그러고는 이 증상 때문으론 다신 병원을 오지 말라는 말을 덧붙이며 행여나 내가 질문이라도 더 할까 봐 비문증에 대한 설명이 적힌 인쇄물을 얼른 하나 던져줬. 나만 몰랐지 도대체 얼마나 흔한 병이면 설명하기도 귀찮아 아예 이렇게 인쇄물을 준비해놨나 싶었다. 하지만 환자의 충격과 슬픔도 헤아릴 줄도 모르는, 형식적인 따뜻함 조차 없는 냉혈의 의사라니. 그 후론 두 번 다신 그 병원을 찾지 않았다. 대신 더 좋은 신형 진료장비가 있으며 보다 규모가 큰 다른 병원에서 정기적으로 검사를 받고 있다.







비문증이라 하면 생소해서 다들 증상이 어떠냐고 물어본다. 사람에 따라 보이는 모양은 다 다르지만 쉽게 말해 본인 눈에만 무언가가 둥둥 떠다니는 게 보인다. 일반적으로 작은 점이나 가는 실 같은 게 떠다니는 것처럼 보이는데 비문이란 명칭도 '날 비'에 '모기 문'을 사용해서 모기가 날아다니는 듯한 상을 나타낸 것이다. 나의 경우는 어릴  즐겨 보았던 만화 속 캔디의 눈망울을 떠올리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반짝이는 그 이쁜 눈망울을 만화표현하기 위해 눈동자 안에 그리는 작은 원들 같은 게 내가 눈동자를 움직일 때마다 끊임없이 같이 따라 움직인다. 이게 다른 사람에게도 내 눈이 그리 보이면 순정 만화 여주인공처럼 반짝거려 이쁘게 보일 텐데 오직 나에게만 보일 뿐이니 참으로 안타깝다.







병원에서는 그냥 신경 쓰지 말고 무시해라 한다. 이것 때문에 시력이 나빠지지도 않고 눈 건강에 아무런 해도 끼치지 않는단다. 안구 건조증 하고도 아무 연관이 없단다. 허나 부피 큰 올챙이 알 같은 게 하나도 아니고 여러 개가 양쪽 눈에 떠다니는데 신경이 안 쓰일 수가 없다. 게다가 그림을 그릴 땐 주로 휴대폰에서 사진을 캡처해서 보고 그리는데 그 작은 걸 최대한 확대한다 해도 떠다니는 물방울들 때문에 자세히 보기 힘든 부분이 많다. 정기 검진을 위해 병원을 찾으면 담당 의사는 이젠 좀 신경이 덜 쓰이는지 매번 물어본다. 언제쯤 되면 이 물방울들이 내 의식에서 사라질 수 있을지 나 자신도 너무 궁금하다.

"차츰 익숙해질 겁니다"

익숙해질 거라니... 차츰 나아지는 게 아니라 차츰 익숙해질 거라니...




슬프다. 다 알면서 혹시나 하고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있다. 하지만 의사의 말대로 조금은 익숙해진 것 같기도 하다. 아침에 숲 산책을 가서 뭔가 골똘히 생각하며 걷다 보면 눈앞에 펼쳐진 숲의 모습에서 그 물방울들이 간혹 자취를 감출 때가 있다. 요즘은 그 빈도도 잦다. 혹시 자고 일어나니 기적처럼 이 모든 증상들이 사라진 건 아닌지 다시 자세히 사물을 들여다보면 역시 이것들이 날 놀리는 양 둥둥 떠다니고 있다. 잠시 내 의식에서 사라졌을 뿐이다. 그렇게 나도 비문증을 가진 눈으로 바라보는 세상에 조금씩, 물론 아주 더딘 속도로 익숙해지고 있는 중이다.



 




최대한 현 상태에 익숙해지려고 노력하고 있다. 달라질 수 없는 상황이라면 현실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하루빨리 적응하는 게 답이지 싶다. 그래서 그림도 다시 시작해보기로 했다. 이것 때문에 그림 그리는 걸 멈춰버리기엔 그동안 그림에 쏟은 시간과 노력들이 너무 아깝다. 눈에 많은 무리가 가지 않는 선에서 조금씩 그려 보기로 했다. 하지만 그동안 많이 쉬었기에 혼자 그리기가 쉽지 않다. 기초가 튼튼하지 못하여 내공이 없기에 한동안 그림을 멈춰버리면 다시 시작할 때 막막하다. 중간중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막히기 시작한다. 하지만 절대 중간에 멈추면 안 된다.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어떻게든 완성을 시켜야 실력이 조금이라도 향상된다. 잘 보이지 않는 건 보이지 않는 데로 그냥 놔둬 버린다. 비문증을 가진 눈으로 바라보는 세상에 익숙해져야 한다.







양쪽 눈에 비문증이 생기고 안구 건조증으로 수시로 시야가 뿌옇게 된 이후 처음으로 완성한 그림이다. 성에 차지는 않지만 오랜만에 그린 그림치고는 게다가 시원찮은 눈으로 그린 것치고는 나름 만족한다. 어차피 내 만족으로 그리는 거니깐.






살다 보면 뜻하지 않는 일들에 부딪혀 어쩔 수 없이 그 상황그대로 받아들여야 하는 때가 있다. 어떻게 해도 달라질 수 없는 것이고 아무리 노력해도 안 되는 라면 그럴 땐 그냥 받아들이고 상황에 적응하는 게 삶을 살아가는 또 하나의 방식인 것 같다. 아직 난 비문증에 완전히 익숙해지지 않았으며 이것 때문에 여전히 스트레스도 많이 받고 있다. 예민한 성격 탓에 새로운 환경에 익숙해지는데 남보다 더 많은 시간이 요구되지만 언젠가는 나도 비문증에 완전히 익숙해지는 날이 오긴 올 것이다. 그땐 오히려 맑고 깨끗한 기억 속 세상보다 물방울이 둥둥 떠다니는 지금의 세상이 익숙하겠지. 그날이 얼른 찾아와 좀 더 편안한 맘으로 세상을 바라볼 수 있길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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