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철 몸을 가진 여인

by 코니

드디어 첫 수업의 날이 밝았다. 무엇이든 시작과 처음은 사람 맘을 두근거리게 만든다. 자전거를 타고 약속된 장소로 가는 내내 기분 좋은 설렘이 날 가볍게 흥분시키고 있다. 그러나 지도에서 미리 찾아봤던 동네에 들어서자 어느새 스멀스멀 올라오는 걱정으로 조금씩 긴장되기 시작한다. 그 이유를 나는 정확히 알고 있다. 왜냐하면... 난 정말 태생부터 철저한 몸치 그 자체이며 운동신경이라곤 눈을 씻고 찾아보려야 찾아볼 수가 없는 일인이다.




이제껏 체육, 무용은 성적을 제대로 받은 적이 단 한 번도 없다. '빳빳'과 '뻣뻣'은 절개 있는 내 몸과 가장 잘 어울리는 단어들이다. 녹이 잔뜩 슨 양철 나무 꾼의 몸이다. 예전엔 고등학교 진학을 위해 연합고사와 함께 체력장이란 관문이 있었다. 100m 달리기와 멀리 던지기, 제자리 멀리 뛰기, 매달리기, 오래 달리기, 윗몸일으키기 등 종목은 꽤 많았지만 절대 평가였기에 어느 정도의 기록만 나오면 통과될 수 있었다. 하지만 그 어느 정도의 기록이란 게 나 같은 몸을 소유한 자들에겐 범접하기 힘든 것이었다. 나의 100m 달리기 최고 기록은 18초 9. 정확하게 기억할 수 있다. 난생처음으로 18초대에 들어선 것이다. 하지만 그때 단 한 번을 제외하면 아무리 죽을 듯 말 듯 달려도 19초 7, 19초 8이었다. 그렇다고 모든 걸 포기하고 설렁설렁 뛰는 것도 아니다. 매번 전력 질주를 한다. 한 번은 너무 무리한 바람에 결승점에서 심하게 슬라이딩까지 하고 말았지만 그래도 기록은 19초 8. 도대체 뭐가 문제인지 알 수가 없었다. 간혹 반에서 몇 안 되던 20초대의 기록을 가진 친구들이 유일한 나의 위안이었다.


달리기뿐만 아니었다. 고무공을 투포환처럼 던지는 것도 제자리에서 멀리 뛰는 것도 30초 동안 철봉에 매달리는 것도 뭐든 시원찮았다. 게다가 몸치의 진가는 학창 시절에만 드러난 것도 아니었다. 성인이 되어서도 마찬가지다. 운동 신경이 없는 덕에 수영을 배울 때도 배드민턴이나 탁구를 칠 때도 남들이 보통이라 여기는 정도에 쉽게 도달한 적이 없다. 다른 사람과 비교가 안 되는 엄청난 노력 후에야 겨우 보통 수준이라는 지위를 얻을 수 있었다. 그나마 자전거는 수없이 넘어지고 다친 덕에 지금은 나와 거의 한 몸 수준이 되었지만. 2년 전 한창 '아무 노래 챌린지'가 유행할 때 딸애랑 나도 같이 연습해서 동영상을 찍어 두었다. 하지만 그 짧고 간단한 안무가 어찌나 안 외워지고 박자도 못 맞추는지. 어느 순간 잊고 있었던 몸치에 대한 기억이 다시 뚜렷해졌다. 연습하는 내내 뻣뻣한 내 춤사위에 딸애랑 얼마나 웃었는지 모른다. 가까스로 안무를 외워 동영상을 찍었지만 영상을 본 대부분의 사람들은 내 모습엔 모두 말을 아꼈다. 춤 잘 추는 내 모습을 남기려 했던 게 아니라 어차피 딸애랑 추억 만드는 게 주목적이라며 애써 스스로를 위로했다.




이런 지독한 몸치가 지역구에서 진행하는 평생 학습 프로그램의 하나인 '초보자를 위한 당구 수업'을 신청한 것이다. 보다 재미있는 삶을 위해 뭔가 새롭고 활동적인 것이 필요했다. 몸치임이 크게 드려 나지 않으면서 조건에 만족할만한 게 뭐가 있을까 찾아보던 중 마침 당구 수업이 눈에 들어왔고 딱 제격이었다. 게다가 꼭 한 번은 배워보고 싶었기에 온라인 접수 시작 시간이 땡 하고 되자마자 남편까지 동원시켜 결국 수강 신청에 성공했다. 무료 수업이긴 하지만 나중에 구청 관계자분 말씀을 들어보니 10명 정원에 대기자만 27명이며 대기 1번조차 기회를 얻지 못하는 상황이라 했다. 뿌듯했다.




2층에 위치한 당구장의 오래된 풍경은 지난 시절의 희미한 기억을 소환시키기에 충분했다. 담배 냄새와 연기가 가득했던 학교 앞 당구장. 당구에 대해서 제대로 알지 못하는 여자 동기들 앞에서 입에 담배를 물고 폼을 잡던 남자 동기들의 그 철없던 모습이 불현듯 떠올랐다. 하긴, 최신 시설을 갖춘 곳이라면 몇 푼 받고 구청에 흔쾌히 자리를 대여해주진 않았을 것이다. 첫 수업인지라 인사말이 길다. 구청 직원, 지역구 자치 회장 그리고 당구장 오너이자 우리에게 수업을 해주실 사장님까지 차례로 인사가 이어진다. 다음 주엔 구청장까지 온단다. 겨우 2시간에 그것도 4차시밖에 안 되는 수업이라 이런저런 일로 시간을 뺏기긴 싫지만 공짜 수업이라 이 정도는 양해해야 한다.




60대 후반쯤 되어 보이지만 사장님은 키도 크고 늘씬하며 머리숱까지 많다. 이번이 구청과 연계해서 하는 첫 수업이라 그런지 넥타이까지 매고 와서는 당구는 신사들이 하는 게임임을 강조한다. 곧 본격적인 수업이 시작되었고 언제나 그렇듯 단 한마디도 놓치지 않을 거라 눈을 부릅뜨고 설명을 듣는다. 사장님은 자세의 중요성에 대해 계속 강조하며 처음부터 제대로 된 자세를 몸에 익혀놓지 않으면 나중에 정말 고치기 힘든 거라 한다. 지당한 말씀. 뭐든 기본이 제대로 갖춰져야 한다. 요즘 그림을 그리거나 피아노를 칠 때 뼈저리게 느끼고 있다. 기본이 제대로 안되어 있기에 할 때마다 헤매고 있다. 허나 기본기를 갖추는 일은 언제나 지겹고 재미없고 시간까지 많이 소요된다. 그래도 어릴 때 뭘 배우면 타의에 의해서도 그 과정들을 차곡차곡 밟아가게 된다. 하지만 성인이 되어 무언가를 배우게 되면 다른 사람 말에 귀를 닫고 자기 고집대로 기본 과정을 무시하고 바로 본론으로 들어갈 때가 많다.



아니나 다를까 생각했던 일들이 여기서도 벌어지고 있다. 한 테이블에 2명씩 자리를 잡고선 포즈 연습과 목표지점에 공을 똑바로 보내는 연습을 해야 하는데 몇 번 연습하는가 싶더니 대부분 딴짓을 한다. 가장 큰 문제는 한 할아버지다. 분명 초급자를 위한 수업인데 초급자도 아닌 분이 수강신청을 한 것도 그렇지만 테이블마다 다니면서 강사 역할을 자처하고 있다. 포즈도 제대로 안 나오는 사람들에게 공 맞추는 걸 설명하고 다니고 나이 많은 아주머니들도 거기에 호응하며 어느새 기본 동작 연습은 패스하고 바로 공들을 맞추고 있다.

"전 그 수준이 못 됩니다."

내 의사를 정확히 밝힌 후 할아버지는 두 번 다신 내 주위엔 어슬렁거리지 않았다. 그래, 난 내 수준을 너무도 잘 안다. 이 타고난 몸치가 남들을 따라가려면 이 기본 동작에 몇 배나 더 많은 정성을 들여야 된다는 걸. 다행히 사장님이 설명도 잘해주시고 다니면서 자세 교정도 많이 해주신다. 하지만 안 쓰던 근육을 움직이다 보니 어깨며 손가락이며 모두 힘들다고 난리다. 그래도 배울 때 제대로 배워야 하기에 그것들의 소리 없는 아우성을 무시한 채 계속 기본 포즈만 연습해나간다.




"진짜 열심히 한다. 가만 보니깐 잠시도 쉬지도 않고 계속 연습하네"

바로 옆 테이블의 한 나이 많은 아주머니가 나를 향해 한마디 한다. 그러자 옆에 서 있던 구청 직원까지 나보고 열심히 한다고 칭찬을 한다.

"제가 타고난 몸치라서요. 남보다 몇 배 더 하지 않으면 따라갈 수가 없어요"

그러자 그분이 내 말에 이렇게 응수한다.

"나는 그 반대예요, 정반대. 그래서 너무 재미있어 무리할까 봐 일부러 쉬어 쉬어합니다"

그러고는 나보고 포즈가 이쁘다는 소리를 서비스로 덧붙어 준다.




그렇다. 타고난 재능이 있는 사람은 쉬어 쉬어해도 되지만 선천적 재능이 결핍된 나 같은 사람은 그들보다 훨씬 많은 수고를 들여야 된다. 즐기며 배울 겨를이 초반엔 없다. 다 타고난 재주가 다른 걸 어쩌겠나. 대신 나는 또 다른 곳에 재주가 있다 믿으니 그리 억울해 하진 않는다. 하긴 그것도 재주란 단어를 사용해도 부끄럽지 않게 된 이유가 뒤에 숨은 엄청난 연습량과 학습량 때문이다. 본인의 수준을 직시하고 기본기를 하나하나 내 속도에 맞춰 익혀 나가는 게 나 같은 지독한 몸치가 학습하는 방법이다. 주위 분위기에 아량곳 하지 않고 수업이 끝나는 마지막 순간까지 똑같은 동작을 연습하고 또 연습한 뒤 집으로 돌아왔다. 어깨가 약간 묵직한 게 분명 하루 지나고 나면 근육통이 올 거란 느낌이 든다. 그러나 다음날 자고 일어나도 생각보다 말짱하다. 그렇담 이 정도의 연습량에는 충분히 내 몸이 견딜 수 있다는 거다. 사장님 말씀이 1년은 지나야 초급 딱지는 뗄 수 있다 했다. 그러니 몇 번 안 되는 수업 동안 욕심부리지 말고 기본기만 제대로 배워가자 생각하기로 했다.






스포츠를 배우는 건 영어나 그림 같은 다른 수업을 듣는 것과는 확실히 다르다. 몸에서 뭔가 에너지가 뿜어 나오는 느낌이랄까. 그래, 몸이 좀 녹슬었으면 어떻고 당장 재미를 못 느끼고 힘들면 또 어때. 반복적인 꾸준한 연습으로 녹슨 몸에 기름칠을 좀 하고 시간이 지나 어느 수준에 도달하게 되면 저절로 따라오는 게 재미인데. 남들 속도에 신경 쓰지 않고 오로지 내 속도에만 집중해서 나아가는 것 그게 바로 녹슨 양철 몸을 가진 나의 삶의 방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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