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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인생 17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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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vankorwriter Sep 09. 2024

숭늉같은 시

시가 있는 에세이 (17)

숭늉 같은 시詩


 아내는 내 시詩가 숭늉 같다고 했다.


 그럴지도 모른다. 숭늉은 

 뜨겁지도 차갑지도 않아야 한다. 그저

 뜨뜻미지근한 것이 좋다.


 청춘의 시절에는 한 잔에

 가슴을 불태우는 위스키 같은 시를 쓰고 싶었다.

 그랬다. 그때는 

 사랑도 인생도 스트레이트로 하여 곧 취하였었다.


 세월이 흐르면서, 삶은

 그런 것이  아니라는 걸 느꼈다. 그래서

 답답한 가슴 시원스레 적셔 줄 생맥주 같은 

 시詩를 쓰고 싶었다.

 그랬다. 그때는

 실연도 좌절도 오백 씨씨면 다 흘려보낼 수 있었다.


 세월이 더 많이 흐르고

 쓴 맛 , 단 맛 다 겪은 지금

 더 이상 가슴 불태울 정열도 없고

 더 이상 답답해질 가슴도 없고

 다만 하루 세 끼니 밥

 먹고 나서 목 막히지 않을 

 삶을 위하여


 그저 뜨뜻미지근하고 심심한

 숭늉 같은 시詩를 담담하게 쓰고 있다.


 아내는 그런 시詩를 좋아한다. 

 나는 그런 아내를 사랑한다.



밴쿠버에서 나는 시인이라는 소리를 듣는다. 내게는 그 칭호가 참 어색하게 들린다. “이 시인님” 하고 누가 부른다면 나는 틀림없이 다른 사람을 부르고 있구나 생각한다. 글을 쓴지는 참 오래 되었다. 초등학교부터 썼으니까. 그러나 내가 썼던 글은 산문이었다. 중학교 때 백일장이 있어 참가했었는데 산문을 쓰면 거의 장원, 못해도 3등은 했었다. 그런데 시, 시조 등으로 분류되는 운문을 어쩌다가 써 낼 양이면 백발백중 낙선이었다. 아. 시는 내가 아니구나. 그리고 시 쓸 욕심을 가슴에 가두었다.


 그런데 등단은 시로 했다. 동남은행 중계동 지점장 시절, 순전히 은행 영업에 필요한 인맥 넓히려고 당시 광화문 세종문화회관 안에 있는 찻집에서 매주 토요일 열리는 ‘사랑방 시 낭송회’에 참가하게 되었다. 처음에는 그저 시인들의 시 낭송을 듣기만 했었는데 나중에는 눈치가 보였다. 소위 ‘문인’ 이라며 참석해 놓고는 발표한 번 안하니 받기만 하고 주지 않는 인색한처럼 여겨졌다. 

 

 그래서 숙제하듯 시 몇 편을 끄적거려서 낭송했더니 동인들이 등단을 권유했다. 

한사코 만류하다가 마지못해 ‘문학공간’사에 보냈더니 지금은 작고한 조병화 시인이 “이원배씨의 시 작품을 읽어보면서, 이분은 삶을 살면서 상당한 철학이 있는 분이라고 생각이 되었고, 작품들도 간결하면서 매력을 지니면서 호소력도 있는 아주 훌륭한 솜씨라고 생각이 되었다.”라고 하시면서 1996년 9월호에 신인 추천해 주셨다.


 그래도 나는 시인이라는 소리를 듣기 민망해 했다. 내 생각으로 그때까지 시인이란 ‘맑은 영혼을 가지고 있는 고매한 인격체’로서 아무나 시를 쓸 수는 없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특히 직업상 금전을 취급하는 은행원이 맑은 영혼을 갖기란 쉽지 않다고 생각했었다. 또한 시어라는 것은 아이스와인처럼 포도 한 알에서 한, 두 방울의 와인을 추출하듯이 짧은 시 구절에 달콤하고 향긋하고 취하는 듯한 감흥이 배어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노 시인의 생각은 달랐다.


 “그냥 사는 이야기 쓰세요. 돈 이야기, 손님 이야기, 부모님 이야기--- 쓸 것 많잖아요? 없는 것 꾸며내려 하지 말고 보는 것, 듣는 것, 느끼는 것 들을 있는 그대로 써 내려가요. 그 다음에는 가지치기 하듯 불필요한 언어들을 잘라내고, 꼭 필요한 말들을 음률에 맞추어 정제해 나가세요. 그럼 그게 시가 되지요. 단, 남이 보아서 무슨 소리인지 못 알아들을 정도로 횡설수설 하지 말고---”    


 그래서 나는 우선 내가 자신 있는 산문을 머릿속에 쓰고는 그것을 줄이고, 줄이고, 줄여서 시어를 뽑아낸다. 산, 강, 바다, 숲 등 아름다운 자연을 미학적으로 구사하는 서정시를 쓰는 사람이 진짜 시인이라는 생각에는 지금도 변함이 없지만 내겐 그런 재능이 없으니 어찌하랴. 그래서 그냥 넋두리처럼 사는 이야기 밖에 쓸 수 없는데 시인이라는 호칭을 듣기는 거북하다.

 그러나 누군가 한 사람이라도, 삶에 목마를 때 한 모금 숭늉처럼 내 시로 갈증을 풀 수 있다면 비록 제대로 된 시인 소리 못 듣더라도 나는 계속 시를 써 나가 볼 작정이다. 


<되돌아 보니>

애시당초 내게 시를 쓴다는 작업은 무리였다. 시는 은유(Metaphor)의 산물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데 내 시는 그런 게 없이 그저 차지도 뜨겁지도 않고 미지근하기만 했다. 그냥 살아온 넋두리를 쓴 것이었다. 


어느 날 내가 소속된 캐나다 한국문협의 한 시인이 나더러 ‘선생님은 시 보다 수필이 더 나은 것 같아요’라고 조심스럽게 말했다. 시도 좋고, 수필도 좋다고 하면 어디가 덧나나? 해서 유명시인들의 작품을 살펴보니 과연 부끄럽다. 시로 승부할 수 없는 처지니 에세이로 덧칠하는 꼼수(?)를 부렸다.


그러나 말거나 이 나이에 요란뻑적지근하게 노벨 문학상 받을 것도 아니고 시집 팔아 돈 벌 능력도 되지 않으니 남은 인생 그저 밍밍한 시라도 쓸 수 있을 때 까지 쓰다가 가야겠다. <2024년 8월 31일 토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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