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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인생 19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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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vankorwriter Sep 13. 2024

망국병

시가 있는 에세이 (19)

망국병亡國病


내가 화투장을 잡지 않는 이유는

여름인가 하면 어느새 옷깃 추스르는 

세월의 짧음을 한탄하면서도

화투장만 잡으면

다리에 쥐나도록 쭈그리고 앉아 

촌음을 낭비하고

건강한 생명을 단축하면서도

전혀 느끼지 못하는 무지無知가

싫어서이다


내가 화투장을 멀리 하는 이유는  

몇 푼 안 되는 돈 이길 양이면

알량한 우월의식 내세우다 눈총 맞고

몇 푼 안 되는 돈 잃을 양이면

친하던 맞상대 친구 보기 싫어져

돌아서면 야릇한 패배의식에

한달 열흘 기분이 

상해서이다


내가 화투장을 피하는 이유는 

파바로티나 도밍고를 이야기 하다가

달리나 모딜리아니를 이야기 하다가

장콕도나 릴케를 이야기 하다가

화투장만 잡으면 

죽어! 쌌다! 피바가지다! 흔들어라!

다른 얼굴로 변하는 이 시대의 지성知性이

보기 민망해서이다


그러나 내가 정말 화투장을

잡지 않고 멀리하고 피하는

마지막 남은 이유 한 가지는

전 세계 국제공항 어느 곳에서나

퍼질러 앉아

시간을 죽인다며 영혼을 죽이는

의지의 한국인들 등 뒤에서

세균처럼 조선 땅에 이 망국亡國 잡기 퍼뜨렸던

어떤 나라 사람들의 코웃음이

비수匕首처럼 내 가슴 속을 

저며 오는 듯해서이다.


 전두환 대통령 시절에 한 세도가의 부친 장례식장에 참석한 적이 있다. 대한민국 정, 재, 관계 인사들이 모두 다녀가는 바람에 모 종합병원 장례식장은 연일 북새통이었다. TV로만 보아오던 막강한 사람들을 가까이에서 직접 보니 신기하기도 하고, 장례식장 같은 사석에서의 일거수일투족이 한편으로 궁금했다.

 

 그런데 당시 대권후보로 언론에 오르내리는 J 장관이 나타났다. 상주에게 애도의 인사를 마치고 손님 석에 앉자 다른 자리에 앉아있던 거물(?)들이 서로 다투어 J 장관 곁으로 왔다. xx 장관, oo 장관, ** 당 대표, 이름만으로 알 수 있는 중진 여당 국회의원들 --- 그들을 보니 마치 국무회의 석상에 내가 배석한 것 같았다. 혹 나라 일을 걱정하는 이야기를 하는가 싶어 스쳐지나가며 슬쩍슬쩍 대화를 엿들었다. 그러나 골프 이야기, 술 먹다 실수한 이야기, 영감님(?)에게 야단맞은 이야기 들을 하더니 xx 장관이 제안했다. 

 

“J 장관님. 우리 고스톱 한 판 하시지요.”


 고스톱은 화투놀음이다. 어릴 적 기억으로 화투놀이란 제사 끝나고 어른들이 모여 하던 민화투, 육백, 섰다, 도리짓고땡 등의 이름들로 알고 있었다. 그러나 1970년대부터 보급되던 고스톱은 1980년대 들어 급속한 경제적 발전과 정치적 혼탁기를 타고 무섭게 번지더니 이제는 ‘화투천하’를 제패했다. 요즘 한국 성인들 중에 고스톱을 모른다고 하면 ‘간첩’소리도 못 듣고 ‘외계인’소리를 듣는다. 심지어 청소년들도 컴퓨터 게임화 된 고스톱을 즐긴다고 한다.


  그런데 이 화투놀이가 일본에서 건너온 도박놀음이라는 것을 아시는지. 동덕여대 이덕봉 교수의 ‘화투속의 일본문화’라는 글에 의하면 일본의 화투는 1543년 규슈 다네가시마에 표류한 포르투칼인에 의해 전래된 서양의 카드가 240여 년간에 걸친 변형 끝에 18세기에 완성된 도박놀음이라고 한다. 1940년 이후 일본군의 대륙정책의 일환으로 한국과 중국에 적극적으로 수출되었는데 강제 징용 및 군속으로 참여했던 한국인들에 의해 본격적으로 도입되었다고 한다.

 

 화투에 담긴 용어와 그림은 모두 일본인의 풍류와 민속을 묘사하고 있다. 그런데 예전에 비행기를 갈아타기 위해 동경의 나리타 공항에서 잠시 대기고 있을 때 한 무리 한국 관광객들이 공항 한 구석에서 신문지 깔고 퍼질러 앉아 고스톱을 치는데 지나가는 일본인들이 그것을 보며 히죽히죽 웃으니 내가 창피해서 얼굴이 달아올랐다. 

 

 물론 각종 모임이나 행사가 잦은 한국 사회에서 함께 모여 즐길만한 적당한 오락이 없다는 것이 화투애호가들의 변명이 될지 모른다. 그러나 화투가 일제 때의 전통놀이 탄압과 함께 권장되었던 한국문화 말살정책의 하나인 망국적 놀이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특히 고스톱의 경우 상대를 철저하게 골탕 먹이는 속성상 친목도모, 또는 심심풀이를 위해 시작한 놀이가 털고 일어 설 때는 적대감과 상실감만 남긴다는 것을 기억하여야 한다. 민족 상호간 분열. 그것이 일본이 노렸던바 아닌가. 작금의 일본은 강대국 대열에 합류하면서 동아시아의 지주행세를 하려는 이때 우리는 그들이 남긴 쓰레기 같은 놀이를 하면서 살아야겠는가. 8.15광복절에 즈음하니 세삼 생각이 더해진다.  


 세도가들의 고스톱 이야기가 궁금하신지? 국사에 바빠야 할 중차대한 시간을 무려 세 시간 가까이 허비하면서 경쟁하듯이 한 사람을 밀어 주었다. 누구겠는가. 나중에 대권후보에서 밀려나 별 볼일 없게 된 J 장관이지. 그날 모두 괜한 헛 공들을 들였다. 지금 생각하면 호랑이 담배 먹던 시절 이야기처럼 느껴진다.   


<되돌아보니> 세월이 많이 흘렀다. ‘망국병’이라는 시는 기억하기로 1980년대 중반인가에 쓴 작품이다. 그때는 해외여행 나가려면 장충단 공원 부근의 모 정부기관에서 반공교육을 받고 나갔다. 해외에서 북한사람들을 만나면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가를 가르쳤다.

당시 김포국제공항에서 미국 뉴욕의 시티은행에 3개월간 업무 연수차 출국하였는데 부모 형제자매 등 온 가족이 환송 나왔었다. 


2024년 9월 9일 현재. 나는 지금 서울 하늘아래 와 있다. 시급히 해결해야 할 일이 있어 한 달 동안 머무르게 되었다. 인천국제공항 제2터미널에서 내렸는데, 퍼질러 앉아서 화투치는 사람은 눈을 크게 뜨고 보아도 없다. 크고 화려하고 편리한 공항 규모에 어깨가 펴진다.


작년만 해도 해외교포는 ‘외국인’ 창구에서 출국신고를 했는 데, 고맙게도 법이 바뀌어 이제는 ;내국인‘ 창구에서 출국수속을 할 수 있다. 나날이 커가는 모국을 보니 가슴 뿌듯하다.


이제 정치인들만 제대로 잘 했으면 좋겠다. 경제발전은 제트기를 타고 수직상승하는 데 정치상황은 예전이나 지금이나 리어카 타고 내리막을 가고 있다. 


우리는 개인소득도 일본을 제친 선진시민이다. 걸맞은 국제적 에티켓을 가져야 하겠다. 택시기사는 여전히 눈치 봐서 현지인 아닌 듯 하면 한 바퀴 돌리고 목적지로 간다. 50년 이상을 살아서 빤히 아는 길인데 왜 돌아 가냐고 말하면 무서운 얼굴로, ‘그쪽 길은 교통이 너무 많이 막혀서 안돼요.’하고 싸울 기세다. 아이구 무서워라.


그래도 모국행이 기분 좋다. 맛있는 것, 입에 맞는 것 싫건 먹고, 그리운 친구 반갑게 만나 약간은 과장된 삶의 무용담을 쐬주 한 잔에 주고받고, 그리고 무엇보다 희로애락을 시원히 한국말로 할 수 있으니 얼마나 좋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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