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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눈부신 햇살 Jan 08. 2024

문 앞을 서성인다.

바람이 분다. 차가운 긴 기운이 볼을 스쳐 지나간다. 그녀는 문 쪽을 향한다. 남편을 생각한다. 오직 친절한 순간만을 기억한다. 사납고 폭력적인 시간들은 생각의 기억에서 지워야만 했다. 어둠을 뚫고 뾰족한 칼바람이 창문에 금을 긋는다. 금방이라도 유리 조각들이 문틈을 비집고 들어올 것 같다.


아무도 찾아오지 않는다. 자녀들은 문밖 앞에서 손짓한다. “잘 있어요. 또 올게요. 더 이상 엄마를 모실 수 없어요. 엄마 미안해요.” 그녀 때문에 일상이 깨어지고 있었다. 시간이 정지된 채 유리문만을 응시한다. 찾아오지 않는 이들을 기다리는 마음을 누가 알아주겠는가.


과거를 생각한다. 행복이라는 이름 아래 단란했던 순간 떠오른다. 온 식구들이 밥상에 모여 앉아 눈 감고 손 모으며 기도하고 있다. 늦은 저녁을 먹는 다섯 명의 가족들의 마음에는 결핍을 넘어선 따스함이 있었다. 가난했지만 버틸 수 있었던  사랑이 있기 때문이다. 사랑이 서로를 단단히 결속시켜 주었다.


남편은 작은 유리 공장을 다녔다. 천육백 도의 가마솥에서 유리를 녹이고, 고정 틀에 유리를 넣어서 만드는 일을 하였다. 매일 지옥 같은 불길에 서서 작업하였다. 물을 먹지 않으면 견딜 수가 없는 공간에서 일하였다. 뜨거운 용광로와 싸우는 치열한 일이었지만, 모든 환경을 견딜 수 있는 이유는 가족 때문이었다.


남편은 세계에서 하루가 가장 늦게 시작되고, 가장 추운 곳인 알래스카를 가보고 싶어 했다. 뜨거운 유리를 녹이는 온도와 반대인 곳에 극한의 추위를 느껴보고 싶었다. 새하얀 설경과 빙하의 풍광을 보고 싶어 했다. 더위보다는 추운 얼음 나라를 동경하고 있었지만, 한낱 꿈일 수 있다는 생각이 스쳐 지나간다.


아이들도 잘 자라주었다. 공부는 잘하지 못해도 성실히 학교에 다녔고, 집안일도 도우며 지냈다. 그녀도 남편 벌이가 변변치 않아 가까운 식당에서 설거지하였다. 사장 눈 밖에 나지 않으려고 신경 쓰며 꼼꼼히 그릇을 세척하였다. 주방장 아주머니가 그녀에게 요리를 알려주며 만들도록 하였다.


설거지에서 조리하는 일로 자리를 옮겨 갔다. 주방 후드의 모터가 돌아가고 가스레인지 불꽃이 점화되며, 청국장을 끓이기도 하고 김치찌개를 요리하기도 했다. 자신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했다. 그녀는 이제 음식 잘하는 아주머니로 입소문이 나 있었다.


삶의 여정이 행복이라는 정지선에 도달하려는 무렵 남편이 직장의 자동화로 인해 실업자가 되었다. 천육백 도의 뜨거운 불길도, 판형에 넣어서 꿈틀대는 유리를 차가운 물로 식히는 작업도 기계가 사람을 대처하게 되었다. 상심과 낙망은 모르는 사이에 창틈으로 밀고 들어와 슬픔이라는 거대한 어둠을 토해놓고 지나간다.


그즈음 남편이 알코올에 의한 폭력이 시작되었다. 살아가야 했기에 아이들이 있었기에 그녀는 모진 인생을 견뎌왔었다. 남편은 몇 년 전에 세상을 떠났다. 미안하다는 말을 남기고 가벼운 깃털처럼 하늘로 돌아갔다.


그녀는 왼쪽 편마비로 더는 걸을 수 없게 되었다. 휠체어를 탄 채 요양원에 오게 되었다. 자녀들이 떠나간 유리문을 한없이 바라보며 더는 찾지 않는 가족들을 기다린다. 그녀는 기다림에 익숙해지며 오늘도 문 앞을 하염없이 서성인다.


가고 오지 않는 그들을 마음으로 그린다. 젊은 남편의 구릿빛 얼굴과 귀여운 아이들의 눈동자만은 그녀의 가슴에 흑백 필름처럼 새겨져 있다. 세월은 지나고 추억만 남겨지는 인생이기에 나쁜 기억은 저 먼발치에 묻어두고, 좋고 행복한 기억만을 가지리라 생각한다.


요양원 생활실에는 밝은 불빛이 하나둘 켜진다. 그녀의 꺼져 있던 마음의 불빛도 이곳에서 아름답게 켜져서 노년을 평안하게 지내기를 조용히 신께 기도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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