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번지점프를 하다>
어느 날 그녀가 내 우산 속으로 들어왔다.
1. 등장 登場
사랑은 언제나 예고 없이, 여름날 갑작스러운 소나기처럼 시작된다. 김대승 감독의 2001년 작 <번지점프를 하다>는 여름날의 소나기로 시작한다. 남자 주인공 인우(이병헌)가 혼자 빗속을 걷는데 한 여인(이은주)이 불쑥 그의 우산 속으로 들어온다.
죄송하지만, 저기 버스 정류장까지만 씌워주시겠어요?
한쪽 어깨가 흠뻑 젖는 줄도 모른 채 인우는 그녀를 정류장까지 데려다준다. 단 몇 걸음의 동행. 그러나 그 순간, 그의 마음은 송두리째 그녀에게 사로잡힌다. 버스를 타고 떠난 그녀의 이름조차 묻지 못한 채 남겨진 자신을 원망한다.
누구나 짝사랑의 경험이 있을 것이다. 짝사랑이 연애보다 좋은 이유나 짝사랑의 법칙 같은 것이 한창 유행하던 시절이었을 것이다. 짧은 단발머리에 상큼한 미소, 흰 셔츠와 까만 스커트가 유난히 잘 어울렸던 그녀. 대한민국이 목이 터져라 '대한민국'을 외치며 국가대표 축구팀을 응원할 때 난 짝사랑의 열병을 앓고 있었다.
2. 웅장 雄壯
'가슴이 웅장해진다'는 말은 문법적으로 맞지 않을지 모른다. 그러나 엄청난 존재 앞에서 느끼는 이 벅찬 감정을 이 말 말고 제대로 표현할 수 있는 말이 있을까? 그 감정은 단지 자연의 신비나 예술품 앞에서만 느껴지는 게 아니다. 인간이 인간에게서 느끼는 가장 원초적이고 순수한 감정, 설명할 수 없는 거대한 힘. 그녀를 보는 순간, 내 존재는 한없이 작아지고, 대신 가슴 가득 전율이 차오른다. 그것은 논리로 설명할 수 없는 기운이며, 나를 압도해 버리는 살아 있는 경이로움이다. 사랑 앞에서 인간은 누구나 한순간 작은 티끌이 되고 만다.
3. 가장 假裝
우연을 가장한다는 건 사실 운명을 스스로 만들고 싶다는 몸부림이다. 인우는 그날 이후 매일 같은 버스 정류장을 찾아가 그녀를 기다린다. 이름도 모르는 여인을 다시 만날 수 있을까 하는 기대로, 빗방울보다 조심스레 마음을 이어간다.
나도 누군가를 그렇게 기다린 적이 있었다. 우연을 가장해 '앗! 여기 무슨 일이야? 너무 반갑다. 여기서 널 다 만나고.' 라며 인사말을 건네는 상상을 하며 여러 번 어색한 인사말을 고쳐 연습했던 적이 있었다.
우연은 절묘한 타이밍과 자연스러운 가벼움이 있어야 빛난다. 짝사랑하는 마음이 커질수록 실패할 확률이 높아지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그녀와의 만남이 무위로 끝나고 오늘도 진전 없이 시간만 갈 때 가슴속 웅장함은 함정으로 미끄러져 간다. 바로 '비장'함이라는 늪으로.
4. 비장 悲壯
비장해진다는 건 마음을 억누른 채 씩씩해지려 애쓴다는 뜻이다. 넘쳐흐를 듯한 고백을 누르고 담담히 굴어보려는 몸짓. 그러나 그런 자세는 오히려 사랑의 독이 된다.
어깨에 잔뜩 힘을 준 투구 같은 말투. 스트라이크 존에 곧장 들어갈 줄 알았던 말들이 엉뚱한 방향으로 튀어나가고 실없는 농담은 실수로 이어진다. 들키고 싶지 않은 마음이 결국 더 서투르게 드러나버린다.
사실 '비장'함은 슬픔을 품고 있다. 슬픈 감정을 누르고 씩씩해진다는 것. 그것은 실패와 패배의 예감을 누르는 행위이다.
5. 전장 戰場
비 오는 거리, 태희(이은주)는 홀로 빗속에 서 있고, 인우는 자신의 진심을 몰라주는 그녀에게 서운한 나머지 우산을 공중전화 부스에 내던진다. 사랑의 전장은 늘 이런 식이다. 화살은 빗나가고 마음은 다치기 쉽다.
비장함의 가장 큰 약점은 웃음과 여유가 없다는 데 있다. 술자리 귀동냥으로 얻은 충고를 따랐다가는 짐승취급을 당하고 헤어질 위기에 쳐하기 십상이다. 그럴 땐 '항복'할 수밖에 없다. 전장에서 기술과 전략이 바닥났다면 항복하여 백기 같은 진심을 내보여야 그나마 승산이 있다.
화가 나 달아났던 인우는 다시 돌아와 태희에게 고백한다.
제발 가지 말고 있어 주라. 그럼 내가 시키는 대로 다한다.
고백은 메아리처럼 돌아와 둘은 맺어진다.
6. 합장 合掌
합장은 두 손바닥을 모아 한결같은 마음을 나타내는 몸짓이다. 침대도 없는 낡은 모텔 방안. 어쩔 줄 모르는 인우(이병헌)와 어색해하는 태희(이은주).
긴장하면 딸꾹질 하는구나?
그렇게 조심스럽게 합장하듯 서로의 몸을 맞닿아 마음을 확인한다.
내게도 그런 밤이 있었다. 보고 싶은 마음을 이기지 못해 여자친구 집 앞으로 달려가, 잠옷 차림의 그녀와 함께 택시를 타고 시내로 향했던 날. 문 닫은 가게들 틈에서 겨우 찾은 낡은 노래방, 찢어진 소파와 지저분한 테이블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서로를 끌어안은 채 짧고 아쉬운 시간을 나눴다. 사랑은 장소의 화려함보다 그 순간의 마음에 의해 빛난다는 것을 알게 해 준 밤이었다.
7. 퇴장 退場
나, 마음 변하기 전에 빨리 돌아와야 해. 알았지?
인우는 얼마 안 있으면 군대를 가고 태희는 그를 기다리려 한다. 이어지는 키스 장면은 영화 속 가장 애틋한 순간이다. 여자가 남자의 얼굴을 살며시 붙잡고 마치 호흡을 불어넣듯 부드럽게 하는 입맞춤. 두 사람의 입맞춤은 카메라 줌 인의 촌스러움마저 압도한다. 그러나 사랑의 절정에는 언제나 그림자가 드리워진다. 태희는 사라지고 남겨진 건 공허한 하늘뿐이다.
사랑의 입장은 늘 벅찬 설렘으로 채워지지만 퇴장은 언제나 번개처럼 날카롭다. 그 뒤를 따라오는 천둥소리, 그것이 바로 이별의 무게이다.
8. 단장 丹粧
우리가 이별 후 새로이 몸과 마음을 단장해야 하는 이유는 꼭 새로운 사랑을 위한 것만은 아니다. 그 이전에 내 앞에 놓인 많은 날들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사랑의 끝맺음으로 한층 더 단단해진 마음으로 나를 껴안아야 한다. 늘 내 앞의 누군가에게 빼앗겼던 온 마음과 신경을 이제는 온전히 주인에게로 돌려주어야 한다. 그렇게 자신을 다시 세운 사람만이 언젠가 찾아올 또 다른 계절을 담담히 맞이할 수 있다. 이별은 끝이 아니라 새로운 나를 길어 올리는 시작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