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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경 Apr 07. 2024

다시 살아도 반복하지 않을 일을 지금 왜 하는가.

Amor fati 보다 와닿 말이다. 다시 산다고 해도 매 순간 몰입하는 삶을 살고 싶다. 언제 끝날 모르는 시간을 한 땀 한 땀 자유의지로 채우고 비우고 싶다. 무의미한 소음과 광경들은 흘려보내고 싶다.


다시 살아도 반복하지 않을 일은 하고 싶지 않다. 피치 못하게 해야 한다면 직접 하고 싶진 않다. 자본으로 외주를 주어 대신 시간을 사고 싶다. 때마침 자본이 많은 서비스들이 상품화되면서 돈으로 살 수 있는 시간이 늘어나고 있다. 즉 자본의 시간 대체율이 극에 달한 시대고 추세는 계속될 것이다. 한병철 역시 신간 오늘날 혁명은 왜 불가능한가에서 이것을 삶의 총체적 상업화라고 정제했다. 그는 자본주의개인을 설죽은 삶을 살게 한다고 덧붙다. 


삶을 죽음으로부터 떼어놓기는 자본주의 경제의 본질적인 요소인데, 이 떼어놓기가 설죽은 삶을, 산 죽음을 낳는다... 자본주의는 삶을 죽인다. 치명적인 것은 죽음 없는 삶을 향한 자본주의의 노력이다. 성과 좀비나 피트니스 좀비, 보톡스 좀비는 설죽은 삶의 모습들이다. 설죽은 자는 어떤 생기도 없다. 오로지 죽음을 받아들여 품는 삶만이 진정으로 생기 있다.

- 『오늘날 혁명은 왜 불가능한가』의 「자본주의와 죽음 충동」 중에서 -


자본주의는 개인을 죽음으로부터 떼어놓기 때문에 본래적 삶을 살 수 없도록 만든다. 하이데거가 말한 본래적 삶이란 죽음을 염두에 두고 삶의 유한함을 명심하여 개인의 고유 가치를 추구하는 방식이다. 한병철이 말한 죽음을 받아들여 품는 삶이 오히려 생기 있는 이유다. 하이데거의 본래적 삶, 한병철의 죽음을 받아들여 품는 삶, 니체가 말한 다시 살아도 반복할 삶 모두 한 맥락이다.


하이데거는 본래적 삶과 대비되는 삶의 방식세인적 삶이라고 말했다. 인적 삶은 남의 시선과 세론에 끌려가는 것이다. 이는 한병철이 말한 현대 사회의 설죽은 삶과 유사하다. 자본주의의 설죽은 삶은 마치 삶이 무한한 듯 사는 것이다. 설죽은 삶이 만연한 사회에서는 삶에 개인 고유의 과정은 없어지고 성과만 남는다. 설죽은 삶에인간의  철저히 기능에 춰진다. 기능에서 중요한 것은 과다. 데이터와 숫자로 이루어진 성과만 남는다. 성과 원칙은 인간을 기계에 가깝게 만들고, 자신으로부터 소외시킨다. 설죽은 삶이 산 죽음인 이유다. 한병철은  『피로사회』에서부터 성과주의에 매몰된 된 현대인들의 자기 착취를 경계해 왔다.


어쩌겠는가. 취할 것은 취하고, 피할 것은 피해야 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시간을 내주고 자본을 지만, 자본으로 시간을 살 수도 있다. 이 점을 활용해야 한다. 동시에 설죽은 삶을 사는 자본주의 사회 풍토는 피해야 한다. 그렇기에 돈을 버는 법과 쓰는 법 둘 다 중요다. 나를 착취해 가면서 돈을 벌지 말아야 하고, 설죽은 삶의 양식에 휩쓸린 소비는 하지 말아야 한다. 하지만 이 둘은 모두 시간을 풍족하게 벌어서 현명하게 쓰기 위한 수단일 뿐이다. 목적을 시간에 둔다. 그게 본래적 삶에 가깝고, 세인적 삶을 피하는 길이다. 죽은 삶이 아닌, 죽음을 품는 삶이다. 다시 살아도 반복할 삶이다.


밥상에서 무의미한 소음들이 들리지 않게, 침대에서 마주한 천장에 헛된 고민이 떠돌지 않게 순간에 몰입해야 한다.



* 표지 사진 : unsplash의 Tirza van Dijk

* 영감을 준 영상 : 니체가 말하는 자유인과 노예 - 지식의 취향

https://youtu.be/uhgYykX4z5Y?si=KMk54g15FQuIrHbb

내가 진짜로 원하는게 무엇이고, 나는 내 인생의 주인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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