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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경 Oct 06. 2024

성산 일출봉에서 5초 만에 내려오는 방법

낭만과 야만의 시절이었다.

고등학교 제주도 수학여 학교 당국은 우리에게 성산일출봉을 오르라고 시켰다. 긴 코스 같아 보였고, 막상 모르니 예상보다 더 길었다. 이렇게 긴 줄 알았으면 오르지 않았을 텐. 일출 시간이 아니 그런지 감흥없었다. 무엇보다 이만큼 다시 내려가야 한다니 까마득했다. 오르라고만 시켰는데 내려가는 것까지 자동이라니 왠지 분하다. 하산하기도  진이 빠졌다. 어차피 내려갈 산을 왜 힘들게 올라야 하는지 모르겠다 말이 생각났다. 시트콤 <남자 셋 여자 셋>에서 신동엽의 대사였나 아님 사견이었나? 암튼 성산일출봉을 올랐는지 아니면 오르다 말았는지 아니면 오르고 내려가는 길이었는지 기억은 안 나지만 고개를 돌리니 잔디 덮인 비탈면이 보였다.


가끔 판단이 흐려질 때가 있다. 무엇엔가 홀 어처구니없는 행동을 한다. 재밌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면 뒷 일을 떠올리지 않다. 모기차 연기로 앞이 안 보이는 내리막길을 자전거 페달을 마구 밟아 쫓아 내려가다 트럭 뒤에 박는다거나, 일 년쯤 뒤에는 아예 브레이크 없는 자전거를 타고 내려가다가 공포에 떨거나 하는 일 말이다.



바로 옆 잔디 경사면에 살포시 누웠다. 옆으로 자연스럽게 구르면 신속하고 안전하게 하산할 수 있을 것 같. 김밥처럼 살짝 누워 팔로 살짝 언덕을 밀었다. 경사가 생각보다 급했 번개같이 가속도가 붙었다. 팔로 멈추고 싶은데 불가능했고 소리 지르기 외에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브레이크 없는 자전거를 타고 내리막길을 빨듯 내려갔던 공포가 다시 떠올랐다. 인간이 위기에 처하면 과거가 주마등처럼 스친다는 건 사실이다. 짧은 순간 많은 장면이 떠오름과 동시에 많은 생각을 할 수 있다. '속도로 내려가면 분명히 어딘가에 부딪혀 다칠 텐데 다치면 학년부장 선생님한테 크게 혼나겠구나. 나는 남은 일정에 함께할 수 없겠구나. 입원은 제주도에서 하는 건가?'


구르기 시작해서 평지까지 다다르는데 5초 정도 걸린 거 같다. 내가 멈춘 곳에서 20m 떨어진 곳에 검은 조랑말들이 있었고 근처에 말똥들이 보였다. 내가 무슨 짓을 한 거지 생각이 잠시 들었지만 다치지 않았고 기민한 선택을 했다는 사실에 뿌듯했다. 잔디 비탈면에 뾰족한 돌이나 깨진 병이라도 하나 있었으면 다쳤을 수 있다는 생각을 못 했다. 관광버스에서 한참 쉬고 있는데, 돌아온 애들이 내 등에 있던 잔디들을 떼주었다. 왜 이렇게 잔디가 묻었냐고 했다. 주머니에 잔디가 나왔다. 


오는 비행기에서는 같이 탔던 단발 스튜어디스 누나가 이뻤다. 아직 디카가 대중화되기 전이었기 때문에 카메라를 가져온 애들이 몇 없었다. 나도 없었다. 필름 카메라를 가져온 애에게 이따 누나랑 사진 찍자고 했다. 우리는 애들이 다 내릴 때까지 기다렸다가 누나에게 사진을 찍어 달라고 했다. 우린  사진을 찍었다. 저 아래서 학년부장 선생님이 우리를 올려다보았다. 기합을 받을 거라는 예상과 달리, 아무 일 없이 넘어가주었다. 그때는 사나이 간의 의리인가 했는데, 선생님도 수학여행 막바지라 지쳤던 것 같다. 누나도 지쳤던 것 같다. 철이 없었다.


철 지나 마른 잔디를 볼 때 철없던 시절오른다. 어렸을 때 귓불도 찢어지고 손바닥도 찢어지고 이 깨진 것 우연 아니다. 사고보다 사건에 가깝. 그런 내가 가을이 오면 등산을 한다. 음악 없이 산소리와 산공기를 느끼며 떠오르는 생각들을 놔둔다. 지금은 얼마나 철있나. 이제 옆 구르기로 산을 내려오 않는다. 사진 찍자고 지 않는다. 어차피 안 찍어 거자너.


가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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