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이 깊었다. 커피를 내려 서재에 갈까 고민했다. 토요일 같은 월요일 밤이니까 부담 없이 마셔도 되겠지. 커피가 식기 전에 뭐라도 쓰고 나가야 겠다. 내일 이 시간엔 여유가 없을 테니까.
연휴 전날에는 H와 M이 왔다. M은 제수씨에게 특별 외박허가도 받았다. 족발을 빌미로 추억을 팔았다. H를 데려다주는 고단한 하루 끝에서 M은 졸았고, M이 추천한 인터스텔라 나이트 플랜은 무산되었다. 인터스텔라는 다음에 심심할 때 봐야지.
나는 관음 예능에 흥미를 못 느낀다. 고 생각했다.연휴 첫날을 맞이해서 동생과나는 솔로 16기를 보았다.신나게토론까지 했다.역시 인간은 망상과 환상에 빠져 산다. 나도 깨어나지 못하겠지.나는 관음 예능을 잘 보는 사람이었다. 한 번끊고 2배속으로 다 보다니.얼른 마지막 회 했으면.하지만 연예인들이 리얼인 척 대본을 읊는 리얼 예능은 대중을 기만하는 것이다. 라는 사견에는변함이없다. 설정 위에대놓고 연기하는 픽션 장르가 낫다.
닮고 싶은 글을 쓰시는 배대웅 작가님 추천에 힘입어 추석에오펜하이머를 보았다. 세 시간짜리라서망설였다. 괜한 망설임이었다. 고전물리학에서 양자물리학으로 힘이 이동하는 과학사나, 전후 세계사 흐름을 몰라도 큰 줄거리를 이해할 수 있지만, 배경지식이 있다면 두 세배는더 재밌게 볼 수 있는 영화다. 아는 만큼만 보이고 보는 만큼 더 알게 된다. 나도 그랬겠지. 전후에 수소폭탄의 무서움을 피력했던 오펜하이머가 과거로 돌아가면 다른 선택을 했을까. 무튼 나는 세 시간짜리 영화도 잘 보는 사람이었다. 세 시간에서 두 시간으로 줄일 만한 부분이 딱히 떠오르지 않는다.
추석 다음날에는 사촌동생 부부가 들렀다. 산미 있는 파푸아뉴기니 원두로 커피를 내린 것은 처음이었다. 파푸아뉴기니는 나라 찾기 게임에서 고난도 국가였다. 사회과부도 세계지도 속 파푸아뉴기니는 책의 가운데 접힌 부분에 숨어 있어 쫙 펴지 않으면 보이지 않았다.
낯선 카페에서 산미 있는 커피를 굳이 고르지 않는 이유는, 산미만 유독 튀어 오르기 때문이다. 바이핸 커피 원두로 내린 커피는 고소한 산미가 일품이었다. 산미 있는 원두도 종종 사 와야지.저녁으로 닭도리탕을 해 먹었는데 설탕을 덜 넣고 후추를 조금 더 넣었으면 나을뻔했다. 오랜만에 설거지거리가 좀 나왔다.
무빙 정주행을 시작했다. 나에겐 소문만큼 재밌는 드라마는 아니었다. 6회를 앞두고 하차를 고민했다. 희수를 놔두고 하차를 고민할 정도면, 나랑 안 맞는 드라마 아닌가 싶기도 하고. 다음에 심심할 때 마저 보면 돼. 희수는 마음 또한안다칠 수도 있어. 괜찮아. 라는 망상을 한다.
언젠가 찜해뒀던웬즈데이를 오늘에야 보기 시작했다. 팀 버튼 특유의 채도 낮은 버건디 분위기가 마음에 든다. 시즌 2가 확정되었다는 것을 보니 중-후반부도 괜찮나 보다. 주인공 웬즈데이는 INTJ, 룸메 이니드는 ENFP임에 틀림없다.또 과몰입하네. 라는 생각이 들었다. 3화를 보는 와중에 이번연휴 동안 주로 읽는 폴 오스터의 산문집이 눈에 띄었다.작품에드러난 폴 오스터와 팀 버튼의 세계관을 계속 단순화, 추상화하면 둘의 접점을 찾을 수 있을까? 있다면 어느 층위까지 올라가야 만날까?를 생각하다가 굳이 왜?라는 물음과 함께 역시 나는 N이맞다는 답이 나왔다.
커피가 식었다. 고소한 산미가 일품이고 정신이 또렷하다. 일요일 같은 화요일에 고마워하며 산문집을 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