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와 게임기
한때 대한민국의 부모를 표현하는 말로 정말 흔하게 쓰였던 표현이 하나 있죠.
‘엄격하신 아버지와 자상하신 어머니’
저희 집도 저런 표현을 쓰기에 무리가 없는 그런 집안이었습니다.
어려서 할아버지와 사별을 하고, 홀어머니를 모시며 동생들까지 돌봐야만 했고, 맨몸으로 상경해서 처자식 포함 열명이 넘는 가족의 생계를 책임져야만 했던 아버지는 여러 가지 의미에서 거칠고 엄격한,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분이셨습니다.
그런 아버지와 함께 가정을 지키며, 자식들을 보살피고 쉽지 않은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이런저런 부업까지 했었던 어머니는, 풍요롭지는 못했지만 자녀들이 항상 깨끗한 모습으로 지낼 수 있도록 애정으로 돌봐주시는 분이셨죠.
이러한 부모님 밑에서 무탈하게 성장… 했으면 참 좋겠지만, 화목해 보이는 대부분의 가족들이 흔히 그러하듯이 우리 가족들 사이에서도 정말 ‘많은 일’들이 있었습니다.
특히 ‘거친 인생’을 살아왔던 제 아버지는, 주변에서 허세 부리다가 사고 치는 남자들을 너무나도 많이 봤었고, 저 또한 그렇게 될까 봐 걱정을 많이 하셨죠. 그리고 그 우려는 아들을 좋게 표현해서 ‘엄하게’ 키우는 것으로 표현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런 엄한 아버지 밑에서 자란, 게임을 좋아하는 자녀라면 대부분 한 번쯤 겪게 되는 이벤트 같은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게임기 파괴’죠.
사실 이건 취미의 종류와는 상관없이 과하게 자녀를 통제하는 부모들이 자주 저지르는 대표적인 실수 중 하나입니다.
이딴 것에 빠져있으니 공부는 안 하고 매일 뻘짓이나 하지. 이렇게 해야 니가 정신을 차릴 거다, 이게 다 니가 자초한 일이다, 뭐 이런 메시지를 주려고 자녀가 애지중지 모은, 또 아끼는 취미 물품(게임, 만화, 아이돌 굿즈 등등)을 박살 내는 겁니다.
그런데 이거, 겪어보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부모가 자식에게 절대 해서는 안 되는 일 중에서도 수위를 다투는, 매우 심각한 정서적 학대입니다.
뭐 하는 입장에서는 이 정도 훈육은 부모라면 할 수 있는 거 아니냐, 결국 내가 번돈으로 산 건데 부수는 게 뭐가 문제냐, 이런 말도 하고 싶어질 겁니다.
하지만 자녀 입장에서는 필설로 형언하기 어려운 충격을 받게 되죠. 자신이 가장 아끼는 물건들이 자신을 가장 지켜줘야 하는 존재의 손에 의해 부서진 거니까요. 그것은 존재 자체를 부정당하는 고통이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실제로 이런 일을 겪었던 사람들 중에서, 이후 나이를 먹고 부모와 사이가 원만한 케이스를 최소한 저는 보지 못했습니다. 심한 경우 의절을 했거나 그에 준하는 경우도 제법 있더군요.
그런데 참으로 신기(?)하게도, 제 아버지는 제가 가진 물건들을 단 한 번도 함부로 버리거나 부순 적이 없었습니다. 물론 밤새도록 게임하고 점심때까지 늦잠을 잔다거나 하면 ‘엄하게’ 저를 나무라신 적은 많았죠.
그리고 ‘내 아들이 과몰입하는 물건에 공구를 이용한 물리적 손상을 입힐 필요성을 느낀다’로 해석이 가능한 말도 상당히 자주 하셨습니다. 그렇지만 그걸 진짜로 실행하신 적은 없었습니다.
아마 그래서였던 것 같습니다. 정말 많은, 필설로 형언하기 어려운 많은 일들이 저와 아버지와 사이에 있었지만, 결정적인 틀어짐이 없이 원만하게 정리가 될 수 있었던 것은요.
그래서 저도 너무 늦지 않게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서툴지만 아버지는 자신의 방식으로 저를 아끼고 사랑하고 있었다는 것을.
덕분에 저는 제법 오래전부터 아버지와 함께 웃으며 이야기를 나눌 수 있게 되었습니다. 기쁜 마음으로 손자도 안겨 드릴 수 있었고요. 앞으로도 이런 웃음을 계속 이어갈 수 있도록, 저 또한 아들에게 최선을 다해야겠지요.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