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이머 남편과 계약직 공무원 아내-24

홋카이도 이야기(06)

by 글쟁이게이머 L군


예전에 모 희극인이 이런 말을 하더군요.

‘자고로 남자는 인생에서 세 여자의 말을 잘 들어야 한다. 하나는 엄마고, 하나는 아내고, 하나는 내비게이션이다’


농담이긴 합니다만, 남자들이 여자들 말 무시하면서 허세 부리고 억지 부리다가 쓴 맛을 보게 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을 생각하면 은근히 날카로운 조언이기도 하죠.


저는 여기에 해당사항이 없다고 생각하면서 살아왔습니다. 위로 누나들이 줄줄이 있었고, 누나들 말 잘 들으면 자다가도 떡(?)이 나오는 상황이었으니까요.


하지만 연애라는 것을 하다 보면 남자들은 소위 ‘맨스플레인’이라고 부르는, 여자들 앞에서 있어 보이는 척을 하려고 들고 또 가르치려고 드는 모습을 자주 보이곤 합니다.


저도 그것에서 100% 자유롭지 못하다는 것을 깨닫게 된 사건 하나가 바로 홋카이도 여행 중에 터지게 됩니다.


001.jpg 여자들 앞에서 폼 잡고 싶어 하는 것은 남자들의 유전자에 새겨진 본능일까요?(사진은 ‘리그 오브 레전드’의 세트)


사건은 운전 중에 벌어졌습니다.


이리저리 홋카이도를 돌아다니면서 즐거운 시간을 보내다 보니 차량의 기름이 슬슬 바닥을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제가 보기에는 오늘 하루 보내기에는 큰 문제가 없을 것 같아서 그냥 가려고 했는데, Y양이 지금 주유를 하는 편이 좋지 않겠느냐고 말하더군요.


홋카이도 외곽에서는 주유소 찾기도 어려우니 미리미리 기름은 넣어두는 편이 좋을 거라면서요.


저는 이 정도는 오늘 하루 충분할 거다. 그리고 중간에 설마 주유소 하나 없겠느냐, 경로 보니까 휴게소도 중간에 있더라, 여차하면 거기서 넣으면 된다, 나 이래 봬도 카센터집 아들이고 운전병 출신이다. 차에 대해서는 나름 안다.

대충 이런 소리를 늘어놓으며 그냥 출발을 해버렸습니다.


002.jpg 진짜 왜 그랬을까요 제가? 평상시에는 절대 안 그러는데…


그리고 사건은 터졌죠. 제 생각은 사실 딱히 틀린 것이 아니긴 했습니다. 어디까지나 평범한 도로를 달린다는 전제하에서 말이죠.


홋카이도의 거친 도로 사정과 접지력을 위해 공기압을 낮춰둔 스노 타이어는 차량의 연비를 제 예상 이상으로 나쁘게 만들었습니다.


더해서 한국인의 상식으로는 휴게소=주유소 포함이지만, 사람이 띄엄띄엄 사는 홋카이도는 그 상식을 거부했습니다. 네, 중간중간에 있던 휴게소는 어디까지나 화장실과 자판기 정도만 있는 졸음쉼터 수준이었던 거죠.


그 결과, 저희는 눈보라가 휘날리는 바람찬 홋카이도에서, 언제 기름이 떨어질지 모르는 차를 타고, 반경 수십 킬로 내에는 사람이 살지 않는 고속도로를 달리게 되었습니다.


진짜로 ‘조난’이라는 단어가 머릿속을 빙글빙글 돌기 시작했을 때, 간신히 발견한 톨게이트를 빠져나와서 주유소에 들어갔을 때에는 한 겨울인데도 온몸이 땀으로 흥건히 젖어있더군요.


그리고 무엇보다 무서웠던 것은 Y양이 무언으로 던지는 시선이었습니다.

…대놓고 뭐라고 했으면 그나마 나았을 겁니다. 눈빛으로 사람이 어찌 될 것 같다는 느낌을 받은 건 진짜 오랜만이었거든요.


그래서 그때 이후로 저는 Y양의 말은 잘 듣고 있습니다.

특히 지금 당장 해두는 것이 딱히 무리가 아닌 일들은 바로바로 처리하고 있죠.


…바보짓은 한 번이면 족하니까요.


003.JPEG 혹시 홋카이도에서 차량 여행을 생각하고 계신 분은 잊지 마세요. 기름이 ⅓ 정도 되면 바로 주유를 하는 것이 안전하다는 것을. 그렇게 안 하면 저처럼 되는 수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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