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게 바로 '번데기 앞에서 주름잡기'?
누구에게나 ‘내가 그래도 이건 좀 하지’ 싶은 일이 약간은 있을 겁니다. 저의 경우는 긴 게이머 생활+리뷰 및 관련 글쓰기 경력 덕분에, 게임 포함한 각종 콘텐츠를 빠르게 파악하는 요령이 조금 있는 편입니다. 약간의 글재주와 함께 말이죠.
여기에 더해서 굳이굳이 하나 정도 꼽아보라면 일본어를 조금 할 줄 안다, 정도를 꼽을 수 있겠네요.
예전글에서도 말한 적이 있는데, 기나긴 오덕 생활(?)을 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일본어는 듣고 읽을 줄 알게 되었습니다. 딱히 정규로 배운 적은 없었지만, 무작정 게임을 하다 보니 어느 틈엔가 그렇게 되었더군요.
사실 저 같은 오덕들 사이에서는 그다지 이상한 일이 아니긴 합니다. 좋아하는 것을 많이 접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벌어지는 일인지라, 일본 만화나 게임을 즐기는 사람들 중에는 일본어를 꽤 하는 사람들을 어렵잖게 찾아볼 수 있죠.
그래서 국제 게임행사에서 유럽과 미국, 일본과 한국의 관계자들이 모였는데, ‘그쪽’ 성향이 강한 사람들이 대부분이라 다들 일본어는 할 줄 알아서 국적이 다양했지만 대화에 큰 무리가 없었다는 이야기 심심찮게 들려오는 것이 이 바닥(?)이기도 합니다.
물론, 워낙에 편향적인 언어 학습인지라 정식으로 배운 사람들과 비교하면 여러 곳에서 구멍이 숭숭 뚫려있다는 단점이 있긴 합니다.
50 먹은 남자가 10대 소녀처럼 말한다던가, ‘마왕을 쓰러트리고 망가진 개념을 복구시켜 세계를 멸망에서 구원한다’ 같은 말은 잘만 하면서, ‘날씨가 더운데 창문 열어도 괜찮을까요’는 제대로 말하지 못하는 경우가 속출한다는 것이 대표적이죠.
이렇게 제한적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능력은 능력인지라, 저는 누가 뭐 좀 할 줄 아냐, 라고 물으면 일본어는 조금 할 줄 안다, 라고 대답하곤 했습니다. 취미로 얻은 능력이라 묘한 쾌감도 있었거든요.
그래서 Y양과 만났을 때에도 서로의 특기를 물어볼 때 일본어라면 조금 할 줄 안다, 라고 대답했었습니다.
그 말을 듣더니 Y양은 자신도 약간 할 줄 안다면서, 어떻게 배웠느냐고 묻더군요. 그래서 언제나처럼 그냥 게임 좀 하고 만화 좀 보다 보니 자연스럽게 익히게 되었다, 그렇게 대답했었습니다.
대답을 들은 Y양은 재미있어하더군요. 그러면서 자기도 일본어를 ‘조금’ 할 줄 아니까, 마침 잘 되었으니 일본어로 이야기를 해보자고 하더군요. 서로의 언어능력을 꾸준히 갈고닦을 수 있으니 좋지 않겠냐면서.
딱히 거절할 이유가 없는 좋은 이야기이니, 저는 바로 OK를 하고 잠시 일본어로 대화를 나누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잠시 뒤, 저는 진땀을 흘리게 되었습니다.
알고 봤더니 Y양은 일본어 전공자였던 겁니다. 그것도 유학까지 다녀왔던 데다가 이름만 대면 한국과 일본 양국에서 모두 알만한 고위직의 동시통역 경험도 엄청 많이 가지고 있는 익스퍼트 중의 익스퍼트였던 것입니다.
당연히 저의 야메(?) 일본어는 순식간에 바닥을 드러내고 말았고, 저의 어설픈 외국어부심(?)은 ‘진짜’ 앞에서 완전히 박살이 나버리고 말았습니다.
나중에 안 것이지만, Y양은 일본어 이외에 영어도 당연히 수준급으로 구사하는 사람이었고, 그 외에도 다양한 언어들에 관심이 많은 인재였습니다. 말 그대로 저는 번데기 앞에서 주름을 잡고 있었던 것이죠.
이후 저는 어디 가서 일본어 좀 한다, 같은 소리는 안 하게 되었습니다. 바로 옆에 천상계에서 굽어보시는 분이 계신데 나 따위가 어딜… 이런 생각을 하면서 말이죠.
여러분도 조심하시기 바랍니다. 스스로 자신 있다고 생각하는 분야라고 방심하고 있다가, 예상치 못한 상황에서 진짜 고수를 만나서 진땀을 빼게 될 수도 있으니까요.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