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그것'으로 고된 비행조차 낭만으로 만들었다.
오늘 이 글을 읽기 위한 레시피 : 이 글을 읽으며 들을 노래를 선정해 주세요.
당신이 어딘가로 떠나기 위해 가방에 짐을 차곡차곡 넣는 상상을 해본다면
당신의 가방 속에 든 것은 무엇인가?
그 가방 속에 낭만이 가득한가?
그 낭만은 어떤 형체로 어떤 향기를 품고 있는지.
승무원이 되어 다른 나라로 떠날 때 들고 다니는 캐리어가 있다. 그곳에서의 체류는 24시간이 될 수도 많게는 72시간이 될 수도 있겠지. 항공사마다 다를 테지만 더 긴 레이오버도 있을 것이다. 그 시간들 속에 낯설게 던져질 나를 견디게 할 가방 속 몇몇 물건들이 있다.
지구를 돌다 보면 일주일 안에 여러 가지 날씨들을 경험할 수 있다. 뜨거운 여름도 습한 여름도 느낄 수 있다. 그러다 지구의 반대편에서 일어나는 겨울 소동을 맞이하게 될 수도 있다. 그래서 나의 옷장은 계절의 구분이 없다. 짧은 민소매 티셔츠부터 손등을 다 덮을만한 두꺼운 니트까지 조화를 이룬다. 비행을 가기 전마다 나의 짐들은 그곳의 계절에 따라 비워내지고 채워지기를 반복한다. 그것들을 반복하다 보니 언제나 함께하게 된 것들을 발견했다. 나는 그것을 나의 또 다른 목적지로 데려다 줄 '낭만'이라고 표현하고 싶다. 점점 커지는 지구를 내 손이 아닌 곳으로 벗어나게 하지 않도록 버티게 해주는 나만의 낭만 조각들에 대하여.
'운동화'를 가방 안에 넣었다. 어느 나라를 가던지 식당에 들어가는 것 보다도 날이 저물어 밤이 될 때까지 걷는 것을 좋아해서다. 보통은 2만 걸음 많게는 4만 걸음까지도 걸어본 적이 있다. 7시간의 비행동안 수없이 걸었으면서도 난 다시 걷는 것을 갈망했다. 나의 걸음들이 쌓인다는 건 그곳의 풍경들이 쌓인다는 것이다. 그 풍경들은 나의 기억 저장소에 고스란히 담긴다. 인터넷에 돌아다니는 유럽의 풍경들을 '어떤 화면'이 아닌 나의 '눈'으로 본다는 건 진귀한 것이다. 그래서 나는 걷는다. 그렇게 걸은 후 그곳의 풍경을 가방에 넣어 집으로 가져온다.
'책'을 가방 안에 넣었다. 예뻐 보이는 카페나 혹은 사진으로도 담기지 않는 풍경을 가진 곳 어디에서나, 앉은 후 책을 펼친다. 요즘은 내 생각이 난다며 친한 언니가 선물한 책을 가지고 다니는 중이다. 너무 소중한 나머지 한 번에 읽어버리면 책장 어딘가에 묻힐까 천천히 읽고 있다. 지구의 어떤 점으로 향할 때마다 그 점에서 편 책의 한 부분은 나를 감동시킨다. 활자들이 풍경을 삼켜버린다. 옆에서 들리는 그 나라의 언어들이 노래가 되어 울려 퍼진다. 아주 더운 프랑스 리옹의 여름날, 그늘진 테라스에 앉아 책을 읽었다. 난 그 책을 아주 먼 미래에 다시 읽게 된다면 '리옹의 순간'을 함께 읽게 될 것이다. 그렇게 나의 낭만은 멈추지 않겠지.
'이어폰'을 가방 안에 넣었다. 나는 글을 읽고 쓰는 것만큼이나 음악을 좋아한다. 예전 나의 취미가 작사작곡이었을 만큼 사랑한다. 지구를 돌 때마다 음악을 달리하여 듣는다. 결국 시간이 지나게 되면 그 음악은 그 나라의 향기가 되어버린다. 햇살 내리쬐는 바르셀로나의 봄, 대중교통을 이용하지 않고 시내에서 해변까지 걸어갔다. 지도를 보지 않고 발걸음 닿는 데로 가보자는 나의 고집에 이끌려 가게 된 골목들이 생각난다. 하지만 그때의 감정을 안겨주는 건 결국 '음악'이었다. 여전히 그때 들었던 음악을 틀고 눈을 감으면 마치 유체이탈을 한 듯, 나의 영혼은 바르셀로나에 도착해 버린다. 그렇게 나의 여행은 다시 시작된다.
모든 것을 포기하고 사라지고 싶을 때가 있었다. 나의 존재를 모르는 어딘가로. 그게 지구 안은 아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어딘가 멀리 우주를 유영하기를 소망했었다. 그러다 어떤 날은 하루 종일 햇볕아래 있다가, 또 어떤 날은 수없이 걸었다. 아주 작은 것들이라도 해보고 싶은 것을 했고, 나의 것들을 채워갔다. 승무원이 되어 지구의 어딘가로 향하기 위해 가방에 나의 낭만 조각들을 채우는 것처럼, 나의 삶에도 무언가가 채워지고 있었다.
지구를 여러 번 돌았고, 가방에 나의 조각들을 채우며 알게 되었다.
이제 나는 승무원으로서가 아닌, '나'로서 내 삶으로 향하기 위한 가방을 채울 수 있다는 것.
그 안의 낭만 조각들이 내 손에 넣은 삶에 어떤 기억을 남길지 매일 궁금해하며 말이다.
ps. 이 글을 기억할 여러분의 음악은 무엇인가요? 그 낭만을 소개해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