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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사회 속 승무원들의 세계

단 한 번의 만남으로 만들어지는 팀원들과의 비행에 관하여

by 이가은
그러니, 당신도 누군가의 곁이 되어주세요.


팀원.

하나의 비행을 위해 모인 사람들.

그 비행의 시작과 끝을 만들어내는 사람들이 가진 인간의 본성.

지구의 여러 점으로부터 모인 사람들의 만남이 독이 될 수도 어쩌면 약이 될 수도 있는 우리들만의 세계에 대하여 쓴 글이다.


승무원의 삶은 언제나 스케줄에 맞춰 움직인다. 그 비행에 함께 할 팀원들도 매번 비행을 갈 때마다 달라진다. 비행의 끝자락, 모두의 이름을 겨우 기억했다 싶으면 다시 만나기 힘든 사이가 되어버린다. 어색하고 싸늘했던 첫 만남이 비행의 시작과 함께 하나의 '정'이 되어버린다. 그 '정'은 마치 존재하지 않았다는 듯 비행이 끝남과 동시에 없어지는 것도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단시간에 만들어내는 우리들의 이야기는 짧지만 깊이가 있다. 잠깐 스쳐간 동료의 말 한마디가 나의 삶을 바꾸기도 하고, 나를 깨닫게 하기도 하며 때로는 약해진 마음을 단단하게 만들기도 한다. 비행기에서의 만남은 승객과 승무원만이 있는 게 아니었다. 인생의 단 한 번이 될지도 모를 동료이자 팀으로 만난 '우리'들의 세계가 있었다.


새벽 3시 브리핑을 하는 비행이 있다. 애매하고도 너무나 이른 시간의 출근은 밥을 챙겨 먹기도 망설이게 만든다. 그날 오후까지 깨어있기 위해 부랴부랴 커피 두 잔을 들이켜본다. 그렇게 도착한 브리핑 룸에서 마주한 사람들이 앉아있다. 누군가는 인사를 건네기도 하고, 또 누군가는 고개를 들고 쳐다보지도 않는다. 차가운 에어컨 바람이 만든 브리핑 룸의 공기가 점점 차가워지는 기분이다. 이번 비행의 정보들을 노트에 기록하고 비행을 가기 위해 필요한 서류들을 체크한다. 그 체크를 시작함과 동시에 모두가 한 번도 어색한 적이 없었다는 듯 농담을 시작한다. 마치 로봇의 전원 버튼을 킨 후 드디어 작동을 하는 기분이랄까. 서류 검사를 시작하게 되면 브리핑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는데, 아마 그 서류를 체크하기 전은 '일이 시작하지 않았음'이라고 생각했을 테지. 하지만 모두의 전원을 켜고 나면 '우리의 스쳐갈 인연'이 시작된다. 그게 미운 인연이 될지 혹은 따뜻한 인연이 될지는 아무도 모르게 말이다.

비행기에 올라탄 후 그제야 서로의 이름을 다시 묻는다. 분명 비행을 오기 전에도 봤을 테고 브리핑을 시작하며 자기소개도 했지만 한 번에 기억하기는 어렵다. 이전 비행에 함께했던 동료들의 이름과 국적을 잊고 새로운 사람들의 국적과 이름을 기억해야 한다. Korean(한국인)이라는 나의 소개에 K-드라마 팬들이 들뜬 표정으로 이것저것 묻기 시작한다. 한국 문화에 대해 아예 모르는 친구들과는 '삶'에 대한 고민을 늘어놓으며 친해진다. 어떤 말을 하든 쉽게 웃지 않는 친구도 있고, 작은 말에도 웃음이 많은 친구들이 있다. 하지만 여태껏 비행을 하며 깨달은 건 '웃음을 기다리는 사람이 되지 말자'였다. 내가 웃음이 헤픈 사람일 때 그들도 마음을 쉽게 열어줬다. 난 유독 웃음이 많고 말이 많으며 잘 도와주는 사람이라는 말을 자주 듣는다. 난 굉장히 내향적인 성격임에도 이런 말을 들을 수 있는 건 '내가 누군가에게 바라는 행동을 먼저 하자'라는 생각을 고집하기 때문이다. 물론 예외도 있다. 그 웃음에도 욕으로 답하는 사람들. 사실 그런 인연은 스쳐가도록 두는 편이다. 나의 기억에 자리 잡는 것조차 낭비이기 때문에.

그런 예외에 대해 말해보려 한다. 어떤 비행에서 내내 웃음도 많고 착한 친구가 있었다. 일도 열심히 하는 데다 다른 동료들도 많이 도와주는 성실한 친구였다. 하지만 돌아오는 비행에서 그 친구를 많은 동료들이 만만하게 보기 시작했다. '내가 굳이 안 해도 쟤가 하겠지'라는 마인드를 가지고 있는 듯했다. 서로 눈치를 보며 앉아서 놀기 바빴고 그 친구의 땀방울들이 나를 마음 아프게 했다. 결국 그 비행을 시작하고 마무리 한 승무원은 그 친구와 나였다. 비행기가 랜딩 하기 전, 그 친구는 울상이 되어 나에게 말했다.

"네가 나를 이렇게 도와줘서 고마운데 너무 싫어. 나를 도와주는 사람이 너라서 마음이 자꾸 아파. 제발 좀 쉬면 안 될까?'

우리가 서로를 이렇게 다독이는 동안 놀고먹기 바빴던 직속 상사는 그 친구의 흠을 잡아내며 다그치기만 했다. 함께 게으르기만 했던 동료들의 흠은 알아보지도 않으려 하면서, 그 친구의 웃음은 무엇보다도 만만하게 대했다. 다행인 건 이 비행이 끝나면 다시는 보지 않을 사람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서로를 마주 보며 안도했다. 우리 둘의 승무원 의자가 떨어져 있었음에도 서로를 끌어안고 있었다.


'외국 회사는 오픈 마인드야'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다. 하지만 내가 느낀 건 어디든 '사회'는 냉정 하다였다. 직급의 책임감을 인지하지 못하는 무지한 사람들이 많다. 그건 한국이든 외국이든 그런 사람들이 존재하는 건 똑같다. 그런 무책임한 사람들 옆에 붙어 편히 일 하려는 사람들 또한 많다. 열심히 일 하는 사람들이 허무해지도록 만들 때도 있다. 그때 목소리를 높여 정정하려는 사람은 결국 낙오가 된다. 좁은 비행기 안, 서로가 서로에게 처음임에도 불구하고 마치 상대방을 잘 안다는 듯이 대하는 사람들도 있다.


어떤 비행에서 하나의 실수로 욕받이가 된 적이 있다. 그 실수는 그리 큰 것이 아니었다. 어려운 일을 막내인 내가 맡을 수 있게 허락만 해준다면 해보겠다는 나의 제안에 나보다 사번이 높았던 선배는 입을 씰룩였다. 그렇게 13시간의 비행 내내 내가 없는 곳 어디서나 나의 이야기를 떠들어댔다. 비행이 끝난 후 호텔로 향하는 버스 안 그들의 언어로 이야기함에도 불구하고 단번에 '나의 험담'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들이 나에 대해 말하는 이유는 내가 미워서가 아니었다. 그저 장시간의 비행의 심심함을 달래고플 뿐이었다. 하지만 그 사이에서도 나의 편을 들어주는 '그들'이 있었다. 그들은 조용히 나를 다독일 뿐이었는데 어느샌가 험담은 멈추고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조용해졌다. 그 후로 나는 누군가의 이야기가 오갈 때 그 동료를 달래주는 사람이 되었다. 그 사람의 변호인처럼 목소리를 높일 수 없어 부끄러웠던 적도 많았다. 그래서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 그 동료가 기가 죽지 않게 해 준다. 모두가 너를 싫어하지 않는다고, 못난 마음들 사이에 사랑도 존재한다고 말해준다.


짧디 짧은 만남에 사건 사고가 정말 많다. 스쳐갈 인연이라 신경도 안 쓸 것만 같지만, 그들과의 만남은 평생 기억에 남게 된다. 그런 기억들의 조각을 붙여서 들여다본 적이 있다. 그랬더니 발견한 것이 있다.

'사람 사는 건 다 똑같아'


외국이든 한국이든 '다정함의 여유'가 없는 사람들은 나빠지는 것에 몰두했다. 누구나 쪼잔함을 가진 마음들은 존재했고 그 사이에서 피어난 사랑도 존재했다. 그래서 오늘 글의 제목의 맨 앞에 '외항사'라는 말을 붙이지 않았다.

사실 이 글은 이 사회를 살아가는 모두에게 주는 선물이다.


가끔 사회는 18도로 낮춰버린 에어컨처럼 쉽게 머리가 지끈거리고 몸을 움츠리게 한다. 하지만 그 사이에서 27도로, 적정 온도로 맞추려 노력하는 사람들의 목소리들 또한 존재한다. 이 사회가 언젠가 27도의 적정온도에서 살아갈 수 있기를 바라며.

그 목소리가 묻히지 않고 사랑으로 받아주는 사람들이 많기를 바라며.

못된 말들을 던질 때 상대방이 언젠가 당신에게 사랑을 줄 수도 있는 소중한 사람이란 걸 생각하기를 바라며.


이 글을 선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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