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부야역에서 한 생명을, 그러나 내 가족은,,
2000년, 도쿄 시부야역.
그날의 장면은 지금도 선명하게 떠오른다.
아홉 살이던 아들과 함께 지하철 플랫폼에 서 있었다.
혼잡하기로 유명한 야마노테선이지만, 그날 아침만큼은 유난히 한산했고, 우리 앞에는 날씬한 일본 여성 한 명이 서 있었다.
열차가 들어오고 문이 열리려는 순간, 갑자기 그녀의 몸이 기차와 플랫폼 사이의 틈으로 빠져버렸다.
그곳은 유난히 간격이 넓은 구간이었고, 조심하라는 안내 방송이 자주 나오는 곳이었다.
순간, 생각할 겨를도 없이 나는 아들을 밀어 지하철 안에 태운 뒤, 본능적으로 그 여성을 두 팔로 끌어올렸다.
어디에서 그런 힘이 나왔는지 모르겠다. 그저, 사람을 구해야겠다는 마음뿐이었다.
기차는 바로 문을 닫고 출발했고, 정신을 차려보니 아들이 나를 보며 말했다.
“엄마, 괜찮아?”
그제야 나는 주변을 둘러볼 수 있었다.
구한 여성은 얼굴이 하얗게 질려 있었고 온몸을 떨고 있었다.
괜찮냐고 물었더니,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그리고 우리가 내릴 때쯤, 그녀는 조심스럽게 다가와 나를 안았다.
“정말 감사합니다.
오늘 당신이 아니었다면, 저는 지금 저 하늘에 있었을 거예요.”
그 순간, 나는 늘 외국에서 하던 습관처럼 한마디를 덧붙였다.
“저는 한국 사람이에요.”
외국에서 한국인으로서 좋은 행동을 할 때면,
나는 꼭 이 말을 남기곤 했다.
왜냐하면 외국에 있는 우리는 모두,
‘작은 외교관’이니까.
그러나 10년 뒤,
나는 내 가족을 지켜주지 못했다.
남편은 내 눈앞에서 심장마비로 쓰러졌다.
나는 덜덜 떨면서도 승무원 시절에 수없이
훈련받았던 CPR을 시도했지만,
정확히 기억나지 않았다.
곁에 있던 아들과 나는 당황해서,
심지어 응급차를 부르는 번호조차 제대로 떠올리지 못했다.
도착한 구급요원이 최선을 다했지만,
남편은 결국 돌아오지 못했다.
한창나이인 54세,
그는 우리에게 한 마디 인사도 남기지 못한 채 떠났다.
나는 오랜 시간 죄책감에 시달렸다.
‘내가 CPR을 좀 더 정확하게 했더라면?’
‘그때 더 침착했더라면, 그는 살았을까?’
영화를 보다가 누군가가 인공호흡으로 생명을 구하는 장면만 나와도
며칠을 우울해하며 스스로를 탓했다.
시간이 흐른 지금은, 그것도 운명이었음을 받아들이려 한다.
하지만 그 시간이 얼마나 고통스러웠는지는 말로
다 설명할 수 없다.
나는 생면부지의 외국인을 구했지만,
가장 사랑하는 사람은 지켜주지 못했다.
그러나 나는 쓰러질 수 없었다.
그가 남긴 두 아이가 있었고,
나는 그들을 지켜야 했다.
지금도 나는 매일 기도한다.
그가 나를 지켜보고 있을 거라고 믿으며,
내가 잘 살아가고 있다고 말해주고 싶다.
삶은 늘 예상치 못한 순간에 우리를 시험하지만,
나는 끝까지 이겨내며 살아갈 것이다.
그가 내게 남긴 사랑과 책임을 안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