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과 조직사이, 다시 배운 HR(#12)

#12. 1년 내내 노무 이슈만 했던 해가 남긴 것

by 사람과조직사이

그 해, 내 캘린더는 이상했다.


정기회의, 제도개편 미팅보다
징계위원회, 사실관계확인, 변호사·노무사 자문, 고용노동부 출석이 일상이었다.


어느 순간 이런 생각이 들었다.

왜 늘, 사고 난 뒤에 치우는 역할일까.
이슈 생긴다고 설명했던 사안들인데…
도대체 어디서부터 실마리를 풀어야 할까



이전 글에서 나는 HR을
‘해달라는 일 처리 부서’가 아니라
조직의 문제를 정의하는 부서여야 한다고 게시했다.


1년 내내 노무 이슈에 매달렸던 그 해는,
여기에 한 줄을 더 보태게 만든 경험이었다.


HR은 “사건 터지면 뒷수습하는 조직”이 아니라
기준과 원칙을 세우고, 일관되게 운영해 예방하는 조직이어야 한다.

이를 위해 최선을 다했음에도 이슈가 발생하면,
그때 비로소 수습의 역할이 시작된다.




1. “사고는 현장에서 치고, 뒷수습은 HR이”라는 구조

그 해의 패턴은 늘 비슷했다.
(세부적인 이슈 내용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못하는 점 양해 부탁드립니다.)


“어느 부서에서 이런 일이 있었다는데, 사실관계 확인 및 필요한 대응 해주세요.”

“팀장님, 고용노동부에서 진정서가 왔습니다.”

“소송이 제기됐습니다. 대응 방안 검토 바랍니다.”


사건은 늘 현업 조직에서 벌어졌다.
하지만 조직 안에서는 자연스럽게 이렇게 정리되곤 했다.

“HR에서 해결해 주실 거잖아요?”


물론 HR의 역할 중 하나는 뒷수습이다.
누군가는 갈등을 정리하고, 제도를 손보고, 절차를 챙겨야 한다.


그런데 실제 사건들을 하나씩 톺아보면
대부분은 이런 공통점이 있었다.

과거에 기준이 없었거나 혹은 모호했거나,

기준이 있었지만 모든 구성원에게 제대로 설명되지 않았거나,

사람마다 다르게 적용되는 예외가 관행이 되어버렸거나.

다시 말해,
사건 그 자체보다 과거부터 이어져 온 “기대 수준의 불일치”가 반복해서 불을 붙이고 있었다.
그것도 점점 더 큰 불을 만들어 내면서.




2. ‘기대 수준의 불일치’가 만드는 노무 이슈의 패턴

그 해에 마주했던 이슈들은 형태는 달랐지만,
근원지는 거의 동일했다.

조직의 성숙도를 동시에 고려하기보다, 이상적인 모습만을 그리며 Y이론에 입각해 설계된 제도

“이 정도는 당연히 해도 되는 줄 알았다”는 구성원의 기대

“회사 입장에서는 이렇게까지 했는데 왜 성과가 나오지 않느냐, 왜 악용을 하느냐”는 경영진의 기대


각 HR 제도 별로 살펴보면 더 선명해진다.


채용 단계에서는
경영진 간 커뮤니케이션 미스로,
처우 협의까지 모두 완료한 입사 예정자에게 갑작스럽게 입사 취소를 통보해야 했고,
또 다른 케이스로는,
한 면접관이 면접장면에서 연봉을 약속한 일이 있었다.



평가·보상 측면에서는
“기준없이 평가가 이루어지고, 보상은 차별한다”는 말이
구성원 사이에서 공공연하게 돌고 있었다.



근무시간과 휴가 측면에서는
“원래 이렇게 해왔으니 이번에도 그렇게 해달라”는
합리적이지 못한 요구가 너무 당연한 것처럼 등장했다.



퇴사 측면에서는
회사의 중요한 자산이 그대로 유출될 수 있을 정도로
정보보안과 관련된 기준이 부재한 상태가 오래 방치되어 있었다.



외형적 성장에 너무 집중한 나머지,
미처 챙기지 못한 내형적 성장(조직 내 규칙, 제도, 정렬 등)의 부채가
소송’이나 ‘진정’의 모습으로 돌아오고 있었다.

(그것도 하필이면, 왜 내가 입사했을 때 부터였을까…)



특히 채용 장면에서의 두가지 사례는 지금도 선명하다.


하나,

지금 당장 필요한 인재냐,

조직의 변화에 기여해줄 인재냐


상시 인원 300명을 바라보는 시기였다.
보다 단단한 성장을 위해서는
기존 구성원들이 보유하지 않은 역량을 보유한 새로운 구성원이 필요했다.

대표이사는 이를 고려해
“당장 필요한 사람”보다

“미래에 변화를 이끌 인재”를 중심으로 채용하라고 강하게 주문했다.

하지만 특정 본부장은
지금 눈앞의 업무 공백을 메울 수 있는 인력을 충원하는 데 판단의 무게를 두었다.

HR 역시 새로운 역량을 가진 후보자에 집중하고 있었기에,
해당 본부장을 수차례 설득했지만 결국 실패했다.
(새로운 역량을 보유한 후보자들의 서류 및 평판을 확인한 자료를 제공했음에도 처참히 실패했다)


그리고 이 실패가 사단의 시작이 되었다.


처우협의까지 모두 마친 입사 예정자에게
입사 취소를 통보하게 되었고,
입사 예정자는 보상을 강력히 요구했다.


둘,
면접 일정이 확정되면 면접관이 하면 안되는 몇 가지 사항을 몇 번이나 당부를 했다.

역량 검증 이외 사적인 이야기,

회사가 보장할 수 없는 연봉 보증 등


어느 날, 한 후보자가 처우 협의 단계에서
내부 정책상 협의할 수 없는 수준을 요구하게 된 것도
사실 면접장에서의 그 한 마디 때문이었다.

"제가 보장할게요, 그 연봉으로 HR과 말씀나누세요"


예외를 두고서라도 모셔야 할 인재인지,
HR은 다시 점검했고 “아니다”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하지만 해당 본부에서는
“무조건 뽑아야 한다”는 입장을 고수했다.


결론적으로 그는 회사에 적응하지 못하고
매우 이른 시기에 이탈했다.



그리고 이렇게 문제가 터지고 나면,
어김없이 이런 말이 따라왔다.


“HR은 그동안 안 챙기고 무엇을 하고 있었습니까?”


그 해 나는
‘HR의 본연의 역할’과 ‘역할에 대한 브랜딩’의 필요성을 다시 배우게 되었다.

기준을 재정립하고,

그 기준이 실제로 작동하는지 끊임없이 모니터링하고,

모니터링 자체가 “회사의 룰을 지키고,
더 적절한 룰로 성장시키기 위한 HR의 역할”임을 구성원 모두가 알 수 있게 하는 것.


그렇지 않으면,
시간이 흐른 뒤 그 미비함은
“상당히 단단한 분쟁”의 형태로 돌아올 수 있다는 것을.




3. “대응 잘하는 HR” 말고, “예방 설계하는 HR”로


1년 내내 부당해고, 직장 내 괴롭힘 등
크고 작은 노무 이슈에 매달리며
내가 가장 크게 배운 건 이것이었다.


HR의 실력은
“사고 났을 때 얼마나 잘 대응하느냐”만이 아니라,

“같은 사건이 두 번 똑같이 터지지 않게
무엇을 남겨 두느냐”에서 드러난다.



그래서 그 이후로는
사건이 하나 끝날 때마다 이렇게 스스로에게 물었다.


Q1. 이 사건은 어떤 기준이 없어서, 혹은 어디까지가 애매해서 터졌나?
Q2. 다시 겪지 않으려면 HR영역 중 어디에 기준을 남겨야 하나?

Q3. 그 기준을 문장·양식·프로세스 중 어떤 형태로 정리할 수 있을까?


그리고 가능한 한 이런 흐름을 만들고, 조직 안에 계속 공유했다.


1. HR이 기준·정책·가이드라인 초안을 먼저 제안한다.
2. 경영진·현업 리더와 함께 “현실적으로 가능한 수준”까지 조정하고, 합의한다.

3. 구성원들이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공지하고, 예외를 다루는 절차까지 함께 공유한다.

4. 그럼에도 이슈가 터지면,

“누가 잘못했냐” 이전에 사실관계를 통해 “어떤 기준이 비어 있었는지” 다시 짚어본다.


그 해의 경험은
HR이 단지 “법을 잘 알고, 처리해야 하는 부서”가 아니라,


사내에서 요구되는 기대 수준을 미리 정렬하고,
분쟁의 씨앗을 줄이는 구조를 설계하는 부서여야 한다는 걸
아주 아프게, 그러나 단단하게 가르쳐 주었다.




4. 사람과 조직사이, HR이 붙들고 싶은 한 문장


1년 내내 노무 이슈만 하던 해가 끝나갈 즈음,
나는 마음속으로 이런 문장을 적어 두었다.

HR은 사고를 완전히 없앨 수는 없다.
하지만 같은 유형의 사고를 두 번, 세 번 똑같이 겪는 회사가 되지 않게
하는 역할은 반드시 할 수 있다.



그 이후로 나는
사건 하나하나를 “나쁜 해프닝”으로만 보지 않으려 노력했다.


새로운 사람을 맞이할 때, 우리는 동일한 기준과 언어로 설명하고 있는지

평가·보상 기준을 구성원들이 정말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설명하고 있는지

근무시간, 휴가, 퇴사에 대해 회사와 구성원이 서로 어떤 기대를 갖고 있는지


그 해의 수많은 진정·소송은 지난 몇 년간 묵은 빚더미가 몰려온 것이기에 모두 “예방 가능했다”고 말할 수는 없다.


하지만 분명히 말할 수 있는 건 하나 있다.


기준과 합의, 일관성을 조금 더 일찍 준비했다면
그 중 상당수는 ‘사건’이 아니라 ‘대화’로 끝났을 것이라는 사실.


사람과 조직 사이에서 HR이 지켜야 할 자리는
오늘도 여전히 그 지점인 것 같다.


“사고 나면 HR이 알아서 하겠지”가 아니라,
“우리는 이런 기준으로 사람과 일을 대합니다.”

라고
조금 더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조직.


그런 조직이 하나라도 더 늘어났으면 좋겠다.
그리고 나 역시, 그런 조직을 만드는 HR전문가에
조금씩 더 가까워지고 있다고 자부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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