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과 조직사이, 다시 배운HR(#13)

#13. HR가이드는 왜 무시당하는가: '사고'를 예방하는 기준의 무게

by 사람과조직사이


지난 글(https://brunch.co.kr/@f0cb81dc2d2047b/12)에서

1년 내내 노무 이슈를 붙들고 살았던 해를 돌아보며,
HR은 “사고 터지면 뒷수습하는 조직”이 아니라
기준과 원칙을 세우고, 일관되게 운영해 ‘예방’하는 조직이어야 한다고 적었다.


그런데 문제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기준을 만들고 가이드를 정리하는 것까지는 HR이 한다.

그 다음 단계에서, 조직은 종종 이렇게 말한다.


“알겠어요. 근데 우리 조직은 사정이 좀 달라요.”
“일단 뽑아야 돼요. 지금 사람이 없어요.”
“현업이 다 알아서 할게요. HR은 이후 처리해주시면 됩니다.”


그리고 그 순간부터
가이드는 문서로만 남고, 현업과 경영진은 각자도생을 시작한다.

그 결과는 생각보다 정직하다.


사고가 난다.


그 뒤에야 HR이 호출된다.


오늘은 이 질문을 붙잡아 보려고 한다.

“HR 가이드는 왜 무시당하는가?”
그리고 그 무시가 어떤 ‘사고’를 만들어내는가.




1. HR이 모르는 채용이 돌아가고 있었다


내가 인하우스에 들어와 처음 놀랐던 장면 중 하나는
HR이 모르는 채용이 각 본부 단위로 굴러가고 있었다는 사실이었다.


채용이 진행되고, 처우 협의가 오가고,
입사 일정이 잡혀서 HR에게 내려오는 순간은 대개 이런 형태였다.

“이 분 입사하실 건데요, 입사 처리 부탁드려요.”


그때 깨달았다.
우리 조직에서 HR은 ‘채용을 설계하고 기준을 세우는 조직’이 아니라
‘행정 처리’로 인식되는 조직이었다.


채용은 이미 끝난 뒤였다.


HR이 할 수 있는 건
계약서 만들고, 시스템 등록하고, 입사 안내를 하는 것뿐이었다.


그런데 채용
그 자체가 “조직 운영의 시작점”이다.
여기서 기준이 흐트러지면, 그 뒤는 연쇄적으로 무너진다.




2. 본부별 색깔만 강해지면, 회사는 ‘한 회사’가 아니게 된다

각 본부가 채용을 독자적으로 진행하기 시작하면 무슨 일이 벌어질까.


각 본부별로 특정 리더가 원하는 구성원만 뽑게 된다.

그 자체로는 자연스러운 듯 보이지만,

전사 관점에서 보면 이런 질문이 생긴다.

“이 회사는 하나의 회사가 맞나?”


공통된 인재 기준이 없다 보니 본부별 ‘색깔’만 강해진다.

그러면서 회사는 또 이런 메시지를 낸다.

협업을 강화합시다.”


그런데, 될 일이 없다.


협업이란 서로 다른 조직이 공통의 언어와 목표를 갖고 움직일 때 가능하다.

애초에 같은 회사 구성원으로서 정렬되지 않은 사람들을 모아놓고 협력하라고 하는 것은,
이미 기울어진 판 위에서 균형을 잡으라는 말과 같다.


사람이 다르고, 기준이 다르고, 방향이 다른데
협업을 하라고 하면 결국 고생은 “협업하는 사람”만 한다.


더 문제는
협업을 하더라도 보상·평가 제도에서 정렬이 안 되어 있으면
힘들게 협업한 것에 대한 인정 구조가 만들어지기 어렵다는 점이다.


그때부터 협업은 “미덕”이 아니라 “손해”가 된다.
조직문화가 아니라, 구조가 그렇게 만든다.




3. “회사 기준을 왜 신경써야 하죠?”라는 본부장들


더 답답했던 건
회사에서 요구하는 조건을 왜 신경 써야 하는지 모르겠다는 본부장들을 봤을 때였다.


물론 본부장에 대한 인사권은 경영진, 대표이사에게 있기에
그들이 원하는 성과만 내면 된다고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회사에는 ‘룰’이 있다.


그리고 HR의 역할은 그 룰을 “지키자”고 말하는 것을 넘어서
룰이 왜 필요한지, 룰이 없을 때 어떤 사고가 나는지
조직이 학습하게 하는 데 있다.


문제는, 애초에 HR적 관점을 고려하지 않고
채용해버리면 이 학습이 시작조차 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룰은 늘 “불편”한 사람에게 무시당한다.
그리고 그 불편함은
대개 단기 성과라는 이름으로 포장된다.




4. ‘처우 협상’에서 룰이 무너지면, 사고는 예정되어 있다


내가 가장 자주, 그리고 크게 체감했던 장면은 ‘처우 협의’ 과정이었다.

원래 HR 조직의 룰은 이런 흐름에 가까웠다.

시장 수준을 약간 상회하거나

현재 연봉 대비 일정 수준 상회하는 범위에서 기본급을 합의하되

정말 성과가 크게 나오면, 그에 맞춰 성과급으로 크게 보상하는 구조를 설계한다.


즉, 고정급은 통제하고, 변동급으로 성과를 정렬한다.

그래야 조직은 유지되고, 개인은 동기부여를 받는다.
그런데 현실에서는 종종 이런 일이 벌어진다.


무조건 데려와야 한다”는 이유로
성과에 대한 확인 없이 기본급에 다 반영해버리는 것

입사 전에 협상은 끝났고,
이미 돈은 약속되었다.


기대하는 성과가 나오지 않아도
기본급은 매달 고정으로 빠져나간다.


이뿐만이 아니다.
이 불균형은 조직 전체의 피로로 이어진다.


어느 순간 조직은 이렇게 말하게 된다.

“기대만큼 일을 안 해요.”
“왜 이렇게 스스로에 대한 동기부여가 없죠?”


하지만 이건 개인의 태도 문제로만 보기 어렵다.

기본급이 든든한 구조에서
성과와 보상의 연결고리를 약하게 만들어 놓고,
“알아서 잘해줄 거야”라고 기대하는 건 너무 위험한 가정이다.


나는 이 대목이 반복될 때마다 강조했다.

회사는 ‘기대’로 운영되는 곳이 아니다.
회사는 서로의 계약이고,
그 계약은 룰과 시스템으로 관리되어야 한다고.




5. ‘각자도생 조직’이 만드는 균열


여기서 다시 질문으로 돌아가 보자.

HR 가이드는 왜 무시당할까?

내가 경험한 조직에서는 대개 이런 이유들이 겹쳐 있었다.


HR을 ‘일을 더 잘하기 위해 지원하는 파트너 조직’이 아니라 ‘단순 행정처리 조직’으로 보는 인식
→ HR이 룰을 만들고 설계하는 주체가 아니라,
처리해주는 부서로만 인식되는 순간 가이드는 권고사항이 된다.

단기 성과가 룰을 이긴다
→ “지금 사람이 필요하다”, “이번 계약은 예외로 하자”, “일단 데려오고 나서 맞추자”
이 말이 반복되면 룰은 무너진다.

예외가 축적되면, 기준은 더 이상 기준이 아니게 된다
→ 한 번의 예외는 설득될 수 있다.
하지만 예외가 쌓이면 누군가는 반드시 묻는다. “왜 저 사람은 되고, 나는 안 되죠?”


그 순간부터 가이드는 조직을 보호하는 장치가 아니라 갈등을 증폭시키는 문서가 된다.



HR가이드가 현업과 경영진에게 무시당할 때, 조직 안에서 벌어지는 일은 다음과 같다.

첫째, 기준이 사라진다.
어떤 본부는 연봉 협의 시 시장 기준을 따르고, 어떤 본부는 리더의 감에 따라 결정한다.

구성원 입장에서는 같은 회사 안에 다른 룰이 존재한다는 걸 체감하게 된다.

공정성에 대한 신뢰가 무너진다.


둘째, 협업이 불가능해진다.
인사 제도가 정렬되지 않은 상태에서 협업은 '일하는 사람만 고생하는 구조'가 된다.

열심히 함께 해낸 결과물이지만,

기여를 인정받는 방식이 본부마다 달라서 일한 사람이 손해를 보는 경우가 생긴다.

그 경험이 쌓이면 다음 협업을 주저하게 만든다.


셋째, 사고가 난다.
기준 없이 운영되는 조직은 작은 균열을 방치한다.

그 균열이 어느 순간 노무 분쟁이 되고, 조직 갈등이 되고, 리더십 신뢰 붕괴가 된다.

그리고 그제서야 HR이 불려온다. 뒷수습을 하러.




6. 결론: 예방이 훨씬 경제적이다. HR은 청소부가 아니라 가드레일을 설치하는 조직이다


나는 HR의 본질적인 역할을 이렇게 정리한다.

HR은 사고 뒷수습을 하는 청소부가 아니라,

사업이라는 자동차가 안전하게 달릴 수 있도록 도로 옆에 가드레일을 설치하고,
그 가드레일이 사업을 영위하는 데 적절한지 지속적으로 모니터링하고, 필요하다면 조정하는 조직이다.


가드레일은 달리는 것을 막기 위해 존재하지 않는다.
벗어났을 때 더 큰 사고가 나지 않도록 하기 위해 존재한다.

HR 가이드도 마찬가지다.
조직과 구성원이 더 빠르게, 더 안전하게 달릴 수 있는 조건을 만드는 것이 목적이다.

가드레일이 없으면 사고는 ‘언젠가’가 아니라 ‘반드시’ 난다.

그리고 사고(노무 이슈, 핵심 인재 이탈 등)가 난 뒤에는

- 돈이 (많이) 든다.
- 시간도 든다.

- 무엇보다 신뢰가 든다.

일관된 기준이 있는 조직은 다르다.
- 예외가 적고,

- 분쟁이 적으며,

- 불필요한 에너지 소모가 적다.

그 여백에서 진짜 사업이 이루어진다.


가드레일을 세우는 일, 그리고 그것이 제대로 작동하는지 계속 들여다보는 일.
이것이 HR이 해야 할 가장 본질적인 역할이라고 나는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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