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목길

by 레오

어스름한 저녁노을이 깔리면, 나는 고무줄놀이에 푹 빠져 시간 가는 줄 몰랐다. 짓궂은 오빠들이 고무줄을 끊으면 언니들과 깔깔거리며 추격전을 벌였고, 소독차가 나타나면 뿌연 연기를 뿜으며 골목을 누볐다. 새까매진 발과 헝클어진 머리로 집에 돌아오면 엄마의 잔소리가 쏟아졌지만, 나는 길가에서 꺽은 들꽃을 내밀며 '선물'이라 외친다. '고등어'라는 별명처럼 나는 연탄불에 구운 고등어와 김치찌개라면 사족을 못 썼다. 밥이라도 안 먹겠다하면 엄마는 그렇게 스모크향을 머금은 윤기나는 구운 고등어를 갓지은 햐얀 쌀밥 위에 얹어 입에 넣어주셨다.

"내년엔 학교 가야 하는데." 아빠는 지난해 달력을 꺼내 그 뒤에 매직으로 '가나다라'를 써주셨다. 나는 애써 연필을 붙잡고 글씨를 쓰려 노력했지만, 온종일 뛰어다닌 탓에 그 자리에서 꾸벅꾸벅 잠이 들고 말았다.


거짓말처럼 조용하다. 재잘거리던 소리, 고무줄놀이하면서 노래하는 소리, 술래잡기하며 뛰어다니던 발소리까지 모두 사라지고 골목길은 텅 빈 고요만이 남았다. 언니들은 모두 학교에 갔다. 나는 괜히 시무룩해져 집 주변을 어슬렁거렸다.

대문 앞 장독대 옆에 피어난 사루비아 꽃을 하나 따서 조심스럽게 빨아보았다. 끄트머리에 맺힌 달콤한 물방울이 혀에 닿을 때마다 세상 모든 시무룩함이 녹는 것 같았다. 그때, 저 담벼락 모퉁이에서 어슬렁거리는 고양이 한 마리가 보였다. 회색 털에 눈을 가늘게 뜬 고양이.

"야옹아, 너도 이거 먹어볼래? 달콤해."

꽃을 흔들어 보았지만, 고양이는 나를 한 번 쳐다보더니 도도하게 꼬리를 세우고 저 멀리 걸어갔다. 역시 고양이는 내 말을 무시하는 게 특기다. '그래도 어쩔 수 없다 지금은 너무 심심해!' 실망했지만 고양이 뒤를 졸졸 따라갔다. 고양이가 멈춰 선 곳은 새로 시멘트 작업을 한 장독대 계단 앞이었다. 반짝이는 회색 시멘트가 아직 물기를 머금고 있었다. 고양이는 망설임 없이 그 위를 성큼성큼 올라갔다. 나도 고양이처럼 올라가고 싶어 발을 디뎠다. 푹신, 발이 시멘트 속으로 폭 들어갔다. 차갑고 물컹한 느낌. 재밌었다. 나도 고양이도 시멘트 위에 발자국을 콕콕 남겼다.

"어머나! 이게 뭐야!"

일꾼 아저씨의 놀란 목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아빠가 나오셨다. 아빠는 시멘트 위 선명한 내 발자국과 고양이 발자국을 보시더니 내게 불호령을 내리셨다. 고양이가 먼저 지나갔다고, 고양이 발자국도 있다고 말했지만 소용없었다. 분명 고양이도 잘못했는데, 왜 나에게만 뭐라 하는 걸까. 눈물이 핑 돌고 억울해서 목이 메었다.


속상함에 눈물 콧물 범벅이 된 나를 엄마가 말없이 안아 목욕탕으로 데리고 갔다. 따뜻한 물에 몸을 담그니 좀 살 것 같았다. 첨벙첨벙 물장난을 치니 기분이 좋았다. 하지만 금세 엄마가 나를 미끌미끌한 비닐 침대 위로 올렸다. 이제부터 제일 싫은 시간이다. 엄마 손에 쥔 빨간색 이태리타월이 내 몸 위를 쓱쓱 지나갈 때마다 살이 밀리는 아픔이 느껴졌다. 너무 아프고 따가웠다.

"엄마, 아파! 살살해줘!"

"아이고, 그래야 깨끗해지지. 조금만 참자."

엄마가 다른 아줌마와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나는 그 미끌한 비닐 침대가 갑자기 미끄럼틀처럼 느껴졌다. 여기서 내려가 볼까? 침대 끝에 앉아 몸을 옆으로 빼려다 그만 균형을 잃고 바닥으로 쿵 떨어졌다.

순간 숨이 멎는 듯했다. 어디가 어떻게 아픈지 모르겠다. 아픔과 놀람에 세상 떠나가라 울었다. 엄마가 깜짝 놀라 달려와 나를 안아 올렸다. 거울을 보니 눈물 콧물 범벅에 빨개진 코, 부은 입술 때문에 정말 못생겨 보였다.

엄마는 노란 바나나 우유를 사주셨다. 얼굴은 여전히 아프고 따끔거렸지만, 시원하고 달콤한 바나나 우유는 정말 맛있었다. 빨대로 우유를 쪽 빨아올릴 때마다 터진 입술 끝이 쓰라렸지만, 그 쓰라림을 달콤함이 부드럽게 달래주는 것 같았다. 빙그레 웃었다. 역시 빙그레!


코끝에 라일락 향기가 실린 바람이 불어왔다. 터벅터벅 엄마 뒤를 따라가는데 저 멀리서 하교를 한 언니들의 모습이 보였다. 얼굴의 아픔도, 시멘트 사건의 서러움도 조금씩 흐릿해지는 것 같았다. 언니들과 고무줄놀이를 할 생각에 벌써부터 마음이 설레고 기대되었다. 오늘은 하얀 소독차가 올것인가 그럼 또 소리를 지르며 따라다녀야지! 언니한테 딸기 쮸쭈바를 사달라고 해야겠다! 빙그레 웃었다.

오래된 사진첩을 펼쳐본다. 빛바랜 사진 속에는 그림 같았던 나의 유년 시절이 담겨 있다. 예쁜 화단을 꾸민 넓은 마당에서 너무나 젊은 아빠와 엄마 사이에 앉아 양 갈래로 곱게 땋은 머리에 체크무늬 원피스를 입은 어린 나. 시멘트 바닥에 넘어져 한쪽 무릎에는 빨간약이 발려져 있다. 발그레한 홍조를 띤 통통한 볼, 그리고 곰돌이 인형을 팔에 끼고 앞니 빠진 얼굴로 해맑게 웃고 있는 나. 그 시절, 더없이 행복하고 아름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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