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사 할아버지가 손주에게 가르치는 글쓰기』-32

손주에게 보내는 편지(14)

by 현목

순유 순규에게 (26-1)

실재적 관점과 사실적 지각



순유, 순규 잘 있었니. 순유가 COVID-19 양성인 친구와 밀착 접촉했다고 해서 자가격리와 검사하느라고 수고했다. 다행히 음성으로 판명되어 얼마나 다행인 줄 모르겠다. 순규는 새로운 학원에 가서 적응하느라 수고가 많겠다. 용기를 내서 잘 헤쳐나가리라 믿는다.


이번에는 시쓰기에 대해서 이야기하기로 했으니 시쓰기에 대해 다시 살펴보려고 한다. 이미 너희들에게 보낸 편지(2020년 2월 23일, 3월 22일, 5월 25일, 8월 27일)에 자세히 써놓았더라. 귀찮더라도 복습하는 셈치고 한 번 다시 읽어보기 바란다.


시는 왜 쓸까. 공자(BC 551~BC479)가 『시경(詩經)』에서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시경((詩經) 삼백편은 한마디로 생각에 사특함이 없다'(詩三百, 一言而蔽之曰 思無邪/시삼백, 일언이폐지왈 사무사). 시 쓰는 마음은 요사스럽고 악독한 마음이 아니라 순수한 마음이라는 뜻이다.


요즘 내가 읽고 있는 칸트의 『판단력비판』에서 인간의 미적 체험(아름답다고 느끼는 체험. 이걸 ‘취미판단’이라고 한다)이 일어나는 기전(mechanism)을 얘기하고 있다. 우리가 어떤 대상을 보고 상상을 할 때 그 상상이 우리의 지성에 의해 만들어진 어떤 이념 혹은 관념과 맞아떨어질 때 우리는 어떤 쾌감을 느낀다는 것이다. 이것이 모든 예술에 통하는 기전이고 따라서 시에도 적용이 된다. 예를 들어 볼까? “장미의 붉은 꽃잎 계곡을 내려가니 엄마가 웃고 있다”라고 썼다고 하자. 이때 붉은 장미와 엄마의 웃음이 만들어낸 이미지(상상)와 엄마의 사랑(이념)이 합치되는 순간, 우리는 쾌감으로 느낀다. 이것을 칸트는 ’미적 체험‘ 혹은 ’취미판단‘이라고 부른다.


칸트는 『순수이성비판』에서 인간이 무엇을 알 수 있는가라고 하는 것을 인식론(인식: 사물을 분별하고 판단하여 앎)에서 말하고 있다. 사물(대상)을 우리의 감각(감성)으로 시간과 공간의 지평 위에서 직관하면 그 정보는 우리 머릿속에 있는 지성(선험적 범주, 예를 들어 질, 양, 관계, 양태)에 대입하여 그 대상에 대해 알게 된다는 것이다. 이것을 이론이성(theory rationality)이라고한다.(어렵지? 당연하다. 하지만 그런 것이 있다는 정도만이라도 머릿속에 입력해 두기 바란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인간은 이렇게 대상의 표상(감각에 의하여 획득한 현상이 마음속에서 재생된 것)만 알지 사물 자체는 알 수 없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보자. 지금 바위를 본다고 하자. 바위를 보면서 우리의 감각(예컨대 시각)으로 들어온 정보는 시간, 공간의 지평 위에서 본 것이다. 그 정보가 머릿속의 지성(범주)과 결합하여 우리는 ‘바위는 단단하다, 거칠다. 등등’을 알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바위라는 현상(본질이나 객체의 외면에 나타나는 상), 즉 눈에 보이는 것만 알 뿐이지 바위라는 사물 자체는 모른다는 것이다.


어려운 이야기를 왜 하는지 모르겠지. 우리는 모르니까 자꾸 알고 싶어한다. 그러나 언어를 사용하여 설명하면 결국 사물의 외면만 알게 된다. 이때 필요한 것이 시이다. 시는 사물(대상)을 직접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에둘러(에두르다: 바로 말하지 않고 짐작하여 알아듣도록 둘러대다)로 말하여 읽는 사람으로 하여금 스스로 무언가 말로 할 수 없는 것을 느끼라고 한다.


시는 과학의 대척점(지구 위의 한 지점에 대하여, 지구의 반대쪽에 있는 지점)에 있다. 말하자면 시는 비과학적이라는 셈이지. 과학은 원인과 결과가 이어지는 인과율(모든 일은 원인에서 발생한 결과이며, 원인이 없이는 아무것도 생기지 아니한다는 법칙)의 지배를 받는다. 시는 그런 인과율을 무시한 상상력에 바탕을 두는 것이다. 불교의 선종(참선으로 자신의 본성을 구명하여 깨달음의 묘경[妙境]을 터득하고, 부처의 깨달음을 교설[敎說] 외에 이심전심으로 중생의 마음에 전하는 것을 종지[宗旨]로 하는 종파)에서 말하는 불립문자(不立文字: 불도의 깨달음은 마음에서 마음으로 전하는 것이므로 말이나 글에 의지하지 않는다는 말)와 비슷하다.


그럼, 왜 할아버지는 시를 좋아하고 시쓰기에 매달리지요? 하고 물을 것 같다. 나는 앞에서 말한 심오한 원리보다는 시를 써서 무언가 이미지를 나타날 때 쾌감을 느끼기 때문이다. 비록 잘 쓰지는 못하지만 말이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시쓰기는 이미지를 만들어 에둘러 말하기라고 할 수 있겠다.


지난번 편지에서 수필 쓰기의 체크리스트 다섯 개와 플러스 원을 말했듯이 너희들이 기억하기 쉽게 이번에도 체크리스트 다섯 개와 플러스 원을 만들었다. 아참, 이걸 말하기 전에 반드시 먼저 알아두어야 할 것이 있다. 시쓰기에는 정답이 없다는 사실이다. 시인에 따라서 관념적으로 말기도 하고, 이미지 중심으로 말하기도 하고, 풍자, 패러디, 진술 등등 많이 있다. 노래도 정통 성악도 있고 트롯, 발라드, 락, 팝송, 민요, 등등 많듯이 그러하다. 이 중에 어떤 것이 아니면 안 된다는 법은 없다. 다만 사람들이 주류라고 하는 시쓰기 방식이 있다. 그것마저도 시대에 따라 변해왔지만 말이다.


1) 첫째가 관점(觀點: 사물이나 현상을 관찰할 때, 그 사람이 보고 생각하는 태도나 방향이다. 이건 내가 오규원의 『현대시작법』을 읽고 정리한 생각이다. 시적 대상이 있다고 하자. 그 대상은 구체적 사물(예컨대 튤립)이 있고 추상적 관념(예컨대 희망, 자유)이 있다. 그러한 대상을 어떠한 관점에서 보느냐고 하는 것이다. 거기에 여러 가지 설명이 있지만 핵심만 말한다면 두 가지를 들 수 있다.


①관념적 관점이 있다. 예컨대 시적 대상인 ‘튤립’에 대해 쓴다면 묘사한 글들이 어떤 관념, 즉 튜립을 통해 사랑이나 희망 같은 관념의 방향을 지향한다는 것이다.

②실재적 관점이 있다. 실재(實在)란 실제로 존재함이라는 뜻이다. 말 그대로 실제로 있는 그대로의 대상에 접근하는 방식이다.


a) 이 중에 하나가 ‘사실적 지각’이다. 시적 대상을 있는 사실 그대로 진술(statement)한다. 이 방식은 쉽다는 장점이 있는 반면에 자칫 잘못하면 싱거운 소리, 즉 하나마나한 소리가 되기 쉽다. 역설적으로 그만큼 성공하기가 쉽지 않다. 사유(thinking)가 깊어야 제 맛이 난다. 이런 식으로 쓰는 시인 중에 김광규가 있다. 그의 시 「재수 좋은 날」이라는 시를 소개해줄 게.


오늘은 별다른 일이 없었다

끔찍한 교통 사고도 일어나지 않았고

소매치기나 날치기를 당하지도 않았다

최류탄 때문에 눈물을 흘리지도 않았고

닭장차에 갇히지도 않았다

두들겨 맞거나

칼에 찔리지도 않았다

별일없이 하루를 보낸 셈이다

밤중에 우리집에 불이 나거나

도둑이 들어오지만 않는다면

오늘은 아주 재수 좋은 날이다


여기에는 은유와 같은 수사(rhetoric)가 없이 눈에 보이는 대로 진술(설명)을 할 뿐이다.


b) 다른 하나는 감각적 지각이다. 여기가 내가 말하려고 하는 포인트이다. 시적 대상을 우리의 오감(시각, 청각, 후각, 미각, 촉각)을 통해서 들어온 정보를 상상력을 작동시켜 ‘말도 안 되는 소리(인과율을 깨는 소리)‘를 하여 어떤 이미지를 만들어 내어 우리의 감정이나 개념에 일치시키는 작업이다. 이런 류가 현재 주류를 이룬다고 할 수 있다. 물론 이것보다 더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해서 시를 쓴 당사자만이 알아들을 수 있고 웬만한 독자는 일부분만 이해할 뿐인 시를 (가장 최근의)‘현대시’라고 하는데 이건 너무 어려워 너희들이 대학생이 되어 관심이 있으면 더 공부해도 될 것이다.


우리가 중점적으로 공부하고 있는 감각적 지각의 시의 예를 들어 볼 게. 오래된 시인이지만 김광균(1914~1993)의 「추일서정(秋日抒情)」을 보자.


낙엽은 폴란드 망명 정부의 지폐

포화(砲火)에 이지러진

도룬 시의 가을 하늘을 생각게 한다.

길은 한 줄기 구겨진 넥타이처럼 풀어져

일광(日光)의 폭포 속으로 사라지고

조그만 담배 연기를 내뿜으며

새로 두 시의 급행열차가 들을 달린다.

포플라 나무의 근골(筋骨) 사이로

공장의 지붕은 흰 이빨을 드러낸 채

한 가닥 구부러진 철책(鐵柵)이 바람에 나부끼고

그 위에 셀로판지로 만든 구름이 하나.

자욱한 풀벌레 소리 발길로 차며

호올로 황량(荒凉)한 생각 버릴 곳 없어

허공에 띄우는 돌팔매 하나

기울어진 풍경의 장막(帳幕) 저쪽에

고독한 반원(半圓)을 긋고 잠기어 간다.


어때 멋있지. 아름다운 은유가 얼마나 많으냐. 김광균 시를 주지주의적(主知主義: 감정이나 정서보다는 지성 또는 이지(理智)를 앞세우는 경향이나 태도) 서정시라고 한다. 그는 “시는 회화(picture)다”라는 모더니즘을 실천했다. 이 시가 내가 학교 다닐 때 교과서에 나왔던 같은데 기억이 가물가물하네.


그 다음에는 현대 시인으로 여기 속하는 시인을 들어볼 게. 길상호(1973~) 시인의 「감자의 몸」을 살펴보자.


감자를 깎다 보면 칼이 비켜가는

움푹한 웅덩이와 만난다

그곳이 감자가 세상을 만난 흔적이다

그 홈에 몸 맞췄을 돌멩이의 기억을

감자는 버리지 못하는 것이다

벼랑의 억센 뿌리들처럼 마음 단단히 먹으면

돌 하나 깨부수는 것 어렵지 않았으리라

그러나 뜨거운 하지(夏至)의 태양에 잎 시들면서도

작은 돌 하나도 생명이라는

뿌리의 그 마음 마르지 않았다

세상 어떤 자리도 빌려서 살아가는 것일 뿐

자신의 소유는 없다는 것을 감자의 몸은

어두운 땅 속에서 깨달은 것이다

그러고 보니 그 웅덩이 속에

씨눈이 하나 옹글게 맺혀 있다

다시 세상에 탯줄 될 씨눈이

옛 기억을 간직한 배꼽처럼 불거져 있다

모르는 사람들은 독을 가득 품은 것들이라고

시퍼런 칼날을 들이댈 것이다


김광균 시인하고는 분위기가 또 다르지. 감자(potato)에 생긴 홈에 대해서 길상호 시인은 ‘말도 안 되는’ 상상을 하여 쓰고 있다. 물론 은유를 많이 구사하고 있지.


내가 좋아하는 송재학(1955~) 시인의 「담쟁이 등(燈)」도 한번 읽어보자.


수피와 겹치는 민물고기 등을 보았다

서어나무 안에서 헤엄쳐 나온 담쟁이 단풍이다

서어나무 등[椎]이 환하졌다라고 적었다가 등(燈)을 바꾸어 달았다

등을 켜니까 서어나무 주변의 민물고기 떼들,

공기에 물을 채우고 있다

등의 심지를 올리는 손길이 여럿이기에

서어나무에서 자란 팔처럼 나, 고요하련다

숲의 요기(妖氣)를 따지자면 초록불이겠지만 붉은 등불이란다

등뼈를 곱씹으면서 하나둘 켜지는 붉은 등이란다

그렇다면 내가 저 등의 오한에 물들리라

눈동자 찾아가는 물고기가 시린 내 등뼈를 지나면서 불을 켰다

자잘한 역광의 지느러미 가졌던 송사리 떼 금붕어 떼 담쟁이,

지금상춘등(地錦常春藤)이다


지금상춘등은 담쟁이덩굴 이름이란다. 서어나무를 타고 올라가는 담쟁이를 등불이라 보고 상상하여 썼다. 수피는 나무의 껍질이란 뜻이고, 등(椎)은 한문으로는 ‘추’자인데 등골이란 의미이다. 요기는 요사스러운 기운이라고 한다. 순유, 순규, 서윤, 서우는 이 시들 중에 어느 것이 마음에 들까 궁금하네.


시 이야기를 하면서 내가 배우고 있는 박종현 선생님의 얘기를 빠뜨릴 수 없네. 그 분이 나에게 가르쳐준 것은 백 년 남짓한 한국의 근현대시의 흐름 속에서 한국시가 어떤 모습으로 발전해 왔는가 하는 것이었다.

간단히 말하면 함축→발견→치환→(가장 최근의)현대시라고 하겠다.


①초기에는 거의 함축적인 시가 많았다. 대표적인 것이 김소월과 박목월의 시다.

김소월의 시 「가는 길」은 이런 식이다.


그립다

말을 할까

하니 그리워

그냥 갈까

그래도

다시 더 한번······

저산에도 가마귀, 들에 가마귀,

서산에는 해진다고

지저귑니다

앞강물, 뒷강물

흐르는 물은

어서 따라오라고 따라가자고

흘러도 연달아 흐릅디다려


박목월의 시 「산은 구강산」을 볼까.


산은

구강산

도원 가는 길가에

길은

초로길

구곡팔절 절벽에

물은

옥류동

봄눈 녹어 흐르는대

사슴은

암사슴

발을 씻고 있었다


순유, 순규야 뭘 느끼지? 시 행 하나하나가 평범한 진술뿐이다. 하지만 여기서 중요한 것은 행과 행 사이를 지날 때 우리 마음에 어떤 정서(emotion)을 느낀다는 점이다. 시인은 그걸 노린 것이다. 이 시에는 어려운 단어가 많네. 도원(桃源)은 이상향이라는 뜻이다. 초로길은 좁은 길이라는 의미이고, 구곡팔절(九曲八切)은 길이 아홉 번이나 구부러지고 여덟 번이나 끊어졌다는 뜻이다.


②발견은 앞에서 말한 감각적 지각과 비슷한 것이다. 앞에서 말한 김광균, 길상호, 송재학의 시에서 그들이 발견한 것을 한 번 찾아 보아라. 튤립에서 순유가 발견한 것은 ‘기지개, 예배, 막대사탕’이었다. 순규가 바다에서 발견한 것은 ‘바다가 무서워 떠는 것, 돌이 바다를 때려 바다가 떤다, 바다가 바위에게 주는 먹이는 미역. 조개, 랍스터다, 바다는 닭살이 돋는다’, 등이 었다. 다시 말하면 상상을 해야 한다. 진술하고 은유(상상)과 다른 것이 뭐지. 진술은 인과율에 맞게 설명한다. 반면에 은유 또는 상상은 인과율을 깨버리고 엉뚱한 것끼리 연결한다. 읽는 사람에게 어떻게 될까. 당연히 읽는 사람의 ‘말도 안 되는 소리’ 즉 이치에 맞지 않는 소리를 보니 긴장을 하게 되지. 이걸 시적 긴장이라 한다. 어쩌면 시를 읽는 재미는 바로 이 시적 긴장일지도 모른다.


③치환(replacement)은 바꾸어 놓는다는 뜻이다. 제목에 속한 속성을 본문에서 바꾸어 놓는 것이다. 예를 들어보자. 송재학의 「피아니스트」가 머리에 떠오른다.


사자가 여우를 덮치자 기다렸다는 듯이

검은색 휘장이 내려졌다

열 개의 발톱이 탐스런 살을 파헤치는 과정은

너무 잔인하기에 실루엣으로 처리되었지만

흰 뼈가 부르짖은 비명은 객석마다 꽂혔다

휘장 안이어서 분명하진 않지만

발톱은 제각기 따로 움직이며

여우의 털을 뽑고

두개골은 나뭇가지에 걸었다

군침을 삼키는 허기는 재빨랐다

어린 여우족들은 정수리에 박히는

얼음의 냉정을 짐작해야만 했다

두려운 건 피가 아니라 피가 없는 짐승의 표정이다

가장 높은 음이 들리는 걸 보니 드디어

여우의 심장이 도려졌나 보다

휘장이 찢어진 곳에

단정한 입을 가진 피아노가 있다


이 시를 다 읽고 나면, 제목은 ‘피아니스트’인데 시의 본문에는 피아니스트 얘기는 없고 사자와 여우 얘기뿐이다. 피아니스트와는 아무 상관 없는 소리를 했다. 결국 피아니스트는 사자로, 여우는 피아노로 ‘치환’시켜서(바꾸어서) 시를 전개시켰다는 것을 알 수 있겠지. 사자의 열 개의 발톱은 피아니스트의 손이고, 어린 여우족들은 피아노 건반들이다.


이것도 넓게 보면 은유라고 나는 본다. 은유의 공식이 A=B이지. 여기서는 A는 피아니스트이고 B는 시의 본문 내용, 즉 사자와 여우가 주는 이미지이니까 결국 이것은 은유의 A=B가 되는 셈이다.


④(가장 최근의)의 현대시는 너무 어려워서 할아버지도 잘 모른다. 그래도 시대 풍조는 이런 식으로 써야 대개 시 공모전에서 수상한다고 하더라만. 이건 너희들이 청년이 되고 나서 시에 더 흥미가 있으면 연구해 보도록 하고 우선은 기초적인 것부터 공부해야겠다.


2) 둘째는 시상(詩想/poetic concept: 시를 짓기 위한 착상이나 구상)이다. 수필 쓰기에서 내가 말한 경험에 해당할 것 같다. 시를 한 편 만들려면 재료가 있어야 하지 않냐. 쓸 재료가 없으니 시인이 “시상이 왜 이렇게 안 떠오르지?”하고 이맛살 찌푸리고 고민하는 모습을 우리는 흔히 본다.


①재료를 찾는 가장 흔한 방법은 시적 동기(motive)를 만나는 것이다. 거기에 대해 항상 관심을 가지고 있으면 어느 때 갑자기 영감(inspiration)이 떠오르면서 “아. 이건 시가 되겠다” 하는 감이 생긴다. 그걸 반드시 수첩, 혹은 공책에 적어 놓으면 그것이 자신의 마음 속에서 자신도 모르게 숙성(ripen)되어 언젠가는 한 편의 시를 쓰는 날이 오게 된다.

예를 들어볼까? 텔레비전에서 주현미와 정용화가 부르는 ‘shallow’라는 듀엣을 듣자 나는 요양병원에서 사람이 임종할 때 얕은 숨쉬는 모습(shallow breathing sound)이 생각났다. 수첩 대신에 컴퓨터에 ‘shallow=숨쉬기’라고 적어 두었다. 어느 날 ‘shallow’가 생각나면서 「shallow」라는 시를 한 편 지었다. 졸작이지만 보기 바란다.


시냇물이 반짝이네요

오랜 세월 깊게만 들어가려 했어요

깊이 깊이,

수도 없이 가지를 벋은 어둠속에서

눈물도 한숨도 분노도

깊게 깊게 몸부림쳤지요

하지만

이젠 가지 끝에서 얕게 얕게

팔랑거릴게요

서산 너머 가는 노을도

저를 닮았군요

제가 할 것이라곤

흔적 없이 잦아드는 것뿐이에요


물론 나중에 고쳐쓰기를 더 해야겠지. 써놓고 보니 김소월 시와 분위기가 비슷하다. 고쳐쓰기를 할 때 은유를 더 집어넣어야 할 것 같애.


②다른 한 가지 방법은 시 백일장처럼 어떤 제목을 설정하여 그것에 대해 숙고하여 시를 한 편 완성하는 방법이다. 이때 쓰는 방법이 ‘브레인 스토밍(brain storming)’라는 것이 있다. 브레인 스토밍은 생각나는 대로 마구 아이디어를 쏟아내고, 이치에 맞지 않는 엉뚱한 생각이라도 내놓아야 한다.


이것도 예를 들어볼까. 제목이 「단풍잎」이라고 하자. 그럼 브레인 스토밍을 시작한다. 내 머릿속에서 ‘단풍잎‘에 관한 생각의 가지치기를 한다. 즉 ’붉은 강, 산산이 조각난 이파리, 바람이 달려 온다, 비명, 강물 소리, 산이 꿈틀한다, 놀란 청설모, 발아래 떨어진 솔가리, 솔방울, 그 속에 어둠이 운다…….‘ 하나의 생각에서 가지를 자꾸 펼치는 것인데 처음에는 ’단풍잎‘에서 시작했더라도 항상 ’단풍잎‘에서 출발한 생각만 사용할 필요는 없다. ’단풍잎‘이 아니라 ’강물 소리’에서 출발한 ‘산이 꿈틀거린다’라고 하는 가지치기를 해도 된다. ‘단풍잎’에 직접 상관되지 않는, 전혀 의외의 생각이라도 상관없다. 다 쓰고 나서 내가 의도한 이미지에서 벗어나는 것은 버려야 한다. 왜냐하면 이미지의 통일성, 일관성을 유지하기 위해서이다. 아무튼 이렇게 적어놓는다. 말하자면 이게 재료인 셈이지. 그리고 마음에 드는 것들끼리 연결하여 은유를 만든다. 이런 식으로 시 한 편을 만드는 것이다.

어설프지만 내가 이 재료를 가지고 연결시켜 보았다.


붉은 강이 산산조각이 난다

바람이 달려든다

비명 지르는 강물 소리에

놀란 청설모의 눈이 붉다

발아래 떨어지는 솔가리의

마른 향기가 단풍나무를 기어올라간다

어둠이 솔방울 속에 들어 있다

단풍의 흐느낌과 함께


대충 이런 식이다. 이렇게 해놓고 일정한 시간이 지난 다음(왜냐하면 숙성이 되어야 하기 때문에) 고쳐쓰기를 한다.


3) 셋째는 구성과 주제이다. 시의 가장 전통적인 구성의 기법은 기승전결(起承轉結)이라고 생각한다. 사전에 찾아보니 이렇게 써 있다. ’시문을 짓는 형식의 한 가지, 글의 첫머리를 기(起), 그 뜻을 이어받아 쓰는 것을 승(承), 뜻을 한번 부연(敷衍ㆍ敷演)시키는 것을 전(轉), 전체(全體)를 맺는 것을 결(結)이라 함‘. 이런 방법에 너무 얽매여 꼭 이런 형식으로 쓸 필요는 없다고 나는 생각한다. 형식에 너무 부담 가지지 말고 자연스럽게 마음이 흘러가는 대로 쓴다. 왜냐하면 어차피 나중에 고쳐쓰기를 할 것이니까 말이다.


이때 중요한 것은 시문 전체의 이미지가 통일성, 일관성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어떤 주제에 맞는 이미지들이 한 곳으로 모여야 하고, 엉뚱한 얘기를 하면 안 된다. 아무리 아끼고 싶은 구절이 있어도 전체 이미지에 맞지 않는 것은 과감히 버려야 한다. 그건 어딘가 저장해 두었다가 나중에 써먹는 것이 좋겠다.


이렇게 쓰다 보면 자연히 주제(시인이 말하고 싶은 의도)가 자연히 생겨난다. 나의 경우는 쓰다 보니까 혹은 쓰고 나서 보니까 ”아, 내가 이걸 말하려고 쓴 거네“ 하고 나중에 깨닫는 경우가 많았다. 반면에 처음부터 주제를 정하고 쓰는 사람들도 있다는 것도 잊지 말아야겠지.


4) 넷째는 문체이다. 사람 얼굴과 성품이 각자 다르듯이 글쓰는 이의 글에서 풍기는 느낌이 다 다르다. 우리는 그것을 문체( style of writing)라고 한다. 사람 목소리가 굵은 사람, 가는 사람, 혹은 말을 길게 하는 사람, 짧게 하는 사람 등이 있다. 시인의 사용하는 언술도 마찬가지다.


언술에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진술(statement)이다. 이 말은 할아버지가 하도 많이 해서 이미 잘 알고 있을 것 같다. 있는 사실 그대로 자세히 설명하는 것을 뜻한다. 별 생각없이 진술을 하게 되면 인간은 인과율에 따라 논리적(이치에 맞게)으로 말하기 마련이다. 시에는 이러한 진술이 절대로 있어서는 안 되는 것은 아니지만 상황을 연결하는 데만 사용하면 좋지 않을까 생각한다. 진술은 논술에서 더 필요한 문장일 것 같다.

다른 하나는 묘사(description)이다. 사물이나 대상을 그림 그리듯이 서술하는 걸 말한다. 세 가지가 있다고 했지.


①서경적 묘사. 이건 자연의 경치를 글로 나타내는 것을 말한다. 경치를 보면 눈에 보이는 대로 기술한다. 오래 전에 내가 고흐와 세잔의 그림책을 보고 눈에 보이는 대로 글로 써보라고 했지. 바로 그거야.

②심상적 묘사. 이건 내가 그 동안 하도 많이 말해서 귀가 따가울 정도인 은유를 말한다. 같은 그림이라도 현실에는 없는 것을 마음 속에 그린 것이다. 그러니까 이것은 논리적이지 않고 인과율에도 따르지 않는다. 은유는 읽는 사람으로 하여금 긴장을 일으킨다고 했지. 그러면 벌써 시의 세계로 들어가는 셈이다. 파블로 네루다(1904~1973. 칠레)가 ”시는 메타포다“라는 극언까지 할 정도로 중요하다.

③서사적 묘사는 이야기를 하는 중에 어떤 그림을 떠올리게 한다는 정도만 알아 두면 된다.


순유, 순규, 서윤, 서우도 각자 개성이 다르니까 문체가 다른 것은 당연하다. 좀 더 커서 나중에 자신에게 맞는 문체를 찾아가는 한이 있더라도 지금은 기초를 다진다는 뜻에서 은유적 문장을 많이 쓰기 바란다. 나는 너무 늙어서 배웠기에 이런 것을 하려고 해도 몸에 잘 붙질 않는다. 너희는 어려서부터 해 두면 어른이 되어도 별 힘을 안 들이고 은유를 구사하리라 믿는다. 잠깐! 내가 항상 잊지 말라는 것을 잊지는 않았겠지. 은유에는 유사성을 축으로 한 은유와 차이성을 축으로 한 은유가 있다는 것을.


내가 너희들에게 구체적 사물 명사 두 개 혹은 추상명사 하나를 주어 은유 만드는 연습을 하는 대신 나는 세잔의 그림과 이수동의 그림을 가지고 ’말도 안 되는 소리‘ 만들기를 해왔다. 요즘은 이것 저것 바쁘다 보니 여기까지 손을 못대고 있단다.


5) 다섯째는 모방이다. 모든 예술은 모방에서부터 시작한다는 말이 있다. 아무리 대가라고 하더라도 처음에는 자신의 마음에 드는 작가, 시인, 화가 등을 모방하여 나중에 자기 나름의 성(castle)을 쌓는다고 본다.

모방에는 두 가지가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① 하나는 베껴쓰기다. 나는 6년 전에 소설 쓰기 인터넷 강좌를 들은 적이 있다. 그때 가르치신 분이 이순원 작가인데 그분에게 베껴쓰기를 배웠다. 내가 수차 말해서 너희들도 잘 알고 있다고 믿는데, 베껴쓰기는 단어 대 단어로 공책에 베껴쓰면 별로 효과가 없다. 반드시 하나의 문장(아무리 긴 복문이라도)을 머릿속에서 외우고 나서, 보지 않고 공책에 베껴써야 한다는 원칙을 지켜야 한다. 그때 나는 한국의 유명 단편소설을 십여 편 베껴썼다. 그 중에서 지금도 내 머릿속에 남아 있는 것은 이광수 작가의 「무명」이었다. 너희도 나중에 한 번 읽어 봐라. 그때 일 년 반 정도 베껴쓰기를 했는데 사실 그렇게 했다고 내가 주관적으로 느끼기에 ”아, 이러니까 이런 효과가 있구나“ 하는 점은 깨닫지 못하겠더라. 다만 어렴풋이 내게 들어오는 느낌은 있었다. 예전에는 글을 쓰면 무언가 주어와 동사가 맞지 않는 것이 자주 눈에 띄었는데 지금은 그런 점이 많이 고쳐졌다는 것만은 내게는 확실한 것 같다. 또 하나는 나도 모르게 문장을 자연스럽게 만들어가지 않나 하고 나는 혼자 짐작해 본다.


요즘은 송재학 시집 열 권 중 아홉 권째를 베껴쓰기 하고 있다. 산문으로는 나는 김훈 작가를 좋아한다. 그는 나처럼 1948년 생이라 그런지 친근감을 느낀다. 내가 아는 한 산문을 쓰면서 은유를 그렇게 많이 사용하는 작가를 보지 못했다. 특히 추상명사와 구체적 사물의 현상을 연결한 은유(순유가 하는 은유 연습)를 보면 생각의 깊이가 느껴져 오는 때가 많았다. 김훈의 『자전거 여행』은 13개월 걸려서 베껴쓰기를 했고 현재는 『라면을 끓이며』를 베껴쓰고 있다. 한 시간 쯤 일찍 출근해서 이런 작업을 한다.


시도 마음에 드는 것을 골라서 100번씩 써보자는 생각이 작년에 갑자기 들어서 베껴쓰기 시작했다. 허만하 시인의 「물결에 대하여」 「얼음」 그리고 송재학 시인의 「튤립에게 물어 보라」는 이미 100번 썼고 현재는 송재학 시인의 「애월 바다까지」 「모래장」 「모슬포 가는 까닭」 「수평선」 「달 가듯이」를 75번, ’세장면 쓰기‘는 95번 썼다. 딱히 근거도 없이, 혹은 ”나도 모르게 발전했구나“ 하는 느낌도 절실히 없이 베껴쓰기가 좋다는 말만 믿고 ’무뎃뽀(無鉄砲)’로 쓰는 것이 잘 하는 짓인지 의심이 들 때도 있다. 하지만 계속할 요량이다.


② 모방하기의 다른 하나는 ‘이기적 시쓰기(Egoistic Poem Writing)’이다. 이건 박종현 선생님에게 배운 것이다. 시를 읽다가 어느 한 구절이 감동이 오면 그것을 중심으로 자기식으로 한 번 써보는 것이다. 혹은 어떤 시편 하나가 마음에 들면 그 시에서 그 시인이 발견한 본질(essence)을 가지고 그 시인과는 달리 자기 나름의 본질을 발견하여 시 한 편을 완성하는 것이다.


이미 우리가 연습해서 알겠지만 다시 복습해 보자. 송재학 시인의 「튤립에게 물어 보라」에서 송재학 시인이 본 본질(발견)이 뭐라고 했지? 모차르트, 리아스 식 해안, 등대의 불, 이 세 가지를 들었다. 따라서 ‘이기적 시쓰기’를 하려면 내가 튤립에서 보는 나만의 본질(발견)을 찾아내서 시를 만들어 보는 것이다. 2020년 8월 27일 편지(17)에서 너희들이 「튤립」이라는 제목을 갖고 이런 방식으로 시쓰기를 한 적이 있다. 찾아서 한 번 읽어보기 바란다.


6) 이제 플러스 원이 남았네. 지난번 수필처럼 플러스 원은 고쳐쓰기(퇴고)이다. 여기가 프로와 아마추어의 갈림길이다. 나처럼 아마추어는 시 한 편 쓰는 게 만만치가 않다. 정말 힘들게 겨우 하나 완성하고 나면 스스로 대견하여 더 이상 고쳐볼 생각이 없어진다. 고쳐보았자 더 낫다는 보장도 없고, 겨우 만든 것이 개악이 될 것 같으니 고쳐쓰기 작업은 잘 안 해. 그러나 억지로라도 고쳐써야 한다. 길지만 내가 고쳐쓰기 한 것을 예로 보여 줄 게.


꽉찬 적요

지리산 대원사 계곡길을 갔다. 갈색 나무로 새로 만든 길이 유평

마을까지 이어져 있다. 소나무의 나뭇가지가 바람에 흔들리면서

저 아래 계곡의 물소리를 가리킨다. 갑자기 표지판이 계곡으로

내려가지 말라고 한다. 그곳엔 적요가 꽉 찼다. 계곡 물살만이

적요 속을 뚫고 지나간다.

삼십 년도 전에 진주 처음 와서 친구가 여길 데려다 주었다.

그때는 그 꽉 찬 적요가 보이지 않았다. 계곡에 앉아 고기 구워

먹고 소주로 몸의 근육을 풀어서 빨래처럼 너럭바위에 걸쳐놓으면

나긋나긋한 바위 속으로 몸은 녹고 저 멀리 보이는 구름이 나를

쳐다 보았다.

계곡물이 시간을 휩쓸고 내려가고 있었다. 꽉 찬 적요만 남기고

(2018년 7월 8일 일요일 오전 3:40:04)


어떠냐 처음의 글에는 은유는 몇 개 없고 진술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두어 번 고치고 마지막은 이렇게 되었다. 너희들도 알 것이다만 나와 네 할머니는 집 근처에 있는 비봉산과 지리산의 대원사 계곡을 좋아해서 수도 없이 거길 가고 있다. 대원사 계곡에 오면 고향집처럼 편안하게 느낀단다.

꽉찬 적요(대원사 계곡)--4


①내 35년 세월(진주에 온 삼십여년 세월)에 무단출입금지라는 팻말을 달아 놓았다

⇒ A=세월 B=무단츨입금지

②적요에도 소리가 난다는 것은 대원사계곡에 가면 안다

⇒ A=적요 B=소리

③황토빛 세월은 바위가 되어 누웠고 그 위로 적요가 꽉차서 흘러갔다

⇒ A=황토빛 세월 B=적요

④너럭바위에 빨래처럼 누워 흘러가는 구름은 배를 밟고 지나갔다 (구름 위로 걸어가고 있 었다)

⇒ A=너럭바위 B=구름

⑤하얀 수국 위에 가라앉은 가랑잎 학교, 아이들이 읽는 국어책 소리를 꿀벌이 뜯고 있다.

⇒ A=국어책 소리 B=꿀벌

⑦적송이 몸이 빨간 것은 꽉찬 적요가 물줄기를 타고 하늘로 올라가는 소리 때문이다

⇒ A=적송 B=적요


대원사 계곡을 오르다--5


에메랄드 빛 적요에도

소리가 난다는 것은 대원사 계곡에 가면 안다

진주 온 지 삼십여 년의 세월에

무단출입금지 팻말을 달아놓았다

황토빛 세월은 바위가 되어 누웠고

그 위로 고요가 꽉 차서 흘러간다

너럭바위에 빨래처럼 걸리면 구름은

설핏한 내 그림자 밟고 지나갔었지

하얀 수국 위로 가라앉은 가랑잎 학교,

아이들이 읽는 국어책 소리를 꿀벌들이 뜯고 있다

물살이 몸피를 깎고 지나고 남은 건

계곡의 위의 틈새에 피어난 파란 한 조각 하늘,

적송이 몸이 빨간 것은 꽉찬 적요가 물줄기를 타고

하늘로 올라가는 소리 때문이다

(2020.10.13.)


이런 식으로 나는 고쳐쓰기를 하고 있으니 너희도 참고하기 바란다. 가능한 은유로 바꿀 수 있는 것은 바꾸고, 나타내고자 하는 이미지를 일관되게 하여야 한다. 운문시의 행의 숫자는 정해진 것은 없지만 대개 15~20행 정도는 쓰는 게 좋다. 산문시는 운문시처럼 박자, 리듬이 뚜렷하지 않지만 진술도 많이 볼 수 있으나 거기도 은유가 들어가야 시의 긴장미를 갖게 된다. 산문시는 나중에 기회되면 이야기할 때가 있을 것이다.


이제 길고도 긴 편지를 마칠 때가 다가오는 것 같다. 하나 잊어버린 게 있네. 이건 어느 정도 시쓰기가 초보를 벗어나면 더 언급할 필요는 없는데 너희들은 정말 초보이기 때문에 행갈이가 잘 안 되는 걸 발견했다. 행갈이는 노래 부르기와 똑 같다. 노래 부를 때 계속 달아서 부르는 게 아니잖니. 작사 이원수, 작곡 홍난파의 「고향의 봄」을 보자.


나의 살던 고향은 꽃 피는 산골

복숭아 꽃 살구 꽃 아기 진달래

울긋불긋 꽃 대궐 차린 동네

그 속에서 놀던 때가 그립습니다


‘~산골, ~진달래, ~동네, ~그립습니다’마다 악보에 사분쉼표가 붙어 있다. 노래를 이어부르지 않고 쉼표 때마다 쉰다. 음악은 박자에 따라 일정하게 쉬지만 시는 시인이 자신의 마음속으로 어떤 리듬감, 박자, 강조를 감안하여 짧게 쉬기도 하고 길게 쉬기도 한다. 길게 쉴 때는 한 문장이 시의 한 행이 되지만 대개는 단어 하나, 혹은 구(둘 이상의 단어가 모여 절이나 문장의 일부분을 이루는 토막)가 한 행이 되는 경우가 많다. 행갈이를 이런 식으로 유의해 주기 바란다.


쓰다 보니 양이 많아졌고 내가 봐도 너희 나이에 비해 어려운 말을 많이 써서 미안하다. (순유는 그래도 조금 더 알아들으리라 생각하지만) 오늘 다 이해하지 못해도 나중에 더 커서 보면 도움이 되지 않나 믿는다. 게다가 내가 전문 시인도 아닌데 설(說) 풀었다는 걸 감안해 주기 바란다.


사실은 너희들에게 시쓰기에 대해 이야기해 준다는 핑계로 나 자신의 시에 대한 생각을 정리할 욕심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칸트 이야기를 하면서 마치겠다. 나는 칸트를 안지 몇 개월도 안 된다. 내가 좀 더 젊은 시절에 이 칸트를 읽었더라면 내 인생의 기로(岐路: 여러 갈래로 갈린 길)에 섰을 때 내 선택은 달랐으리라 믿는다. 너희도 어리지만 지금은 아니더라도 나중에 더 커서 꼭 칸트를 읽어보기 바란다. 내가 보내준 (십대를 위한) 『그렇다면, 칸트를 추천합니다』를 꼭 읽어라.


칸트는 유명한 3대비판서를 썼다. 『순수이성비판』에서는 인간이 무엇을 알 수 있나를 말했다. 즉 인간의 지성에 대한 얘기이다. 『판단력비판』에서는 인간의 예술의 대해서 설명했다. 『실천이성비판』에서는 인간은 무엇을 해야만 하는가를 말했다. 즉 인간이 자유 의지를 가지고 도덕법칙을 세우고 그것을 무조건 의무적으로 지키라는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의무적’이란 말이다. 자신이 좋고 나쁘고 하는 경향성(inclination)에 따라서 도덕법칙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의무적으로 행한다는 말이다. 쉽게 말하면 착하게 살라는 말이다.


너희도 일류대학에 진학하려고 공부(지식 쌓기)를 열심히 한다. 물론 그래야 한다. 예술에 대해서 관심도 가지고 그럴 것이다. 높은 지식과 미적 감식안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칸트는 인간이 착하게 사는 것이 제일 중요하다고 했다.


이제 그만 마치려고 한다. 읽느라고 수고했다. 너희들도 열심히 공부하고, 부모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바른 길로 나아가길 빈다. 이만 쓸 게. 바이.



2021년 5월 23일 일요일

학이재(學而齋) 우거(寓居)에서

할아버지가,



추기: 다 쓰고 나서 할머니에게 보여주었더니 너무 어렵다고 야단만 맞았다. 나도 곰곰이 생각해보니 너무 욕심이 지나쳤다 싶었다. 순유는 중2니까 좀 나을 것 같지만 순규, 서윤, 서우에게는 과한 편지임은 확실하다. 일단은 이해하는 데까지 이해하고 나중에 더 크면 다시 읽어주기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