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지개 끝

by 현목

해는 이미 정오를 지나고 있었다. 습기가 꽉찬 하늘에 가랑비가 내리고 있었다. 산의 고갯길이 뿌연 안개 속을 지렁이가 몸을 틀 듯이 비틀면서 하늘로 올라가고 있었다. 다리와 팔은 넝마가 되어 펄럭이면서 나를 밀고 나아갔다. 세상살이의 험한 바람을 지나오다 보니 몸의 기둥은 낡아버렸고 자존심은 땅바닥 위를 구르는 가랑잎이 되어 굴러가고 있었다.


내 앞에서 청설모 한 마리가 앉아서 두 손을 입에 모으고 무어라고 말하는 것 같다. 그의 초롱한 눈빛이 가슴 속으로 들어오면서 따뜻하다. 이 외로운 숲속에서 청설모는 어떻게 살아왔다는 말인가. 갑자기 쓸쓸함은 날개가 하늘로 날아가버린다. 저 멀리서 서쪽에서 햇빛이 팔을 뻗어 뿌린다. 산마루에 갑자기 무지개가 등을 구부리고 있다. 누군가 자기 등에 올라타라는 모양이다.


발걸음이 안개 속을 휘저으면서 나아간다. 소나무도 편백나무도 모두 평화롭다. 아마도 무지개의 일곱 빛깔을 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들에게도 미소로 눈인사를 하자 무지개 일곱 빛깔은 몸안에다가 걸린다. 눈부심에 눈을 감고도 걸어간다. 새소리의 명랑이 상쾌하다.


갑자기 의심이 들기 시작한다. 무지개는 분명히 내가 손을 뻗는 그 자리에 있다. 지금 몇 시간째를 걸어왔는데도 무지개의 입구를 찾을 수가 없다. 무지개의 일곱 빛깔의 등에 올라타서 오늘에야말로 무지개의 행복을 맛보아야겠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아무리 걸어도 닿을 수 없는 무지개의 입구이기에 포기하고 돌아가려고 하자 상수리 나무에 제 몸을 박고 울고 있던 매미가 고함을 빽 지른다. “야이 바보야, 무지개 입구를 니가 선자리에서 들어가려 하면 안 되지. 너와 무지개 입구 사이에는 한없는 낭떠러지가 있어. 거기에다 니 몸을 던져야 갈 수 있는 거다. 그런 용기가 너에게 있는지 모르겠다만.” 순간 내 머리 속에서는 한여름 마른 하늘에 번개가 친다.


내 몸은 어둠 속을 내려가는데 처음에는 두려움이 숨길을 누르더니 차츰 편안해진다. 멀리 반짝이는 게 보인다. 저게 틀림없이 무지개의 입구일 것 같다. 당도하니 입구는 밝기는 한데 몸 하나가 겨우 지나갈 통로이다. 겨우 비비고 들어가자 찌지직 방전이 일어나더니 내 몸에는 무수한 불빛이 반짝인다. 무지개의 빨주노초파남보의 색깔을 이처럼 가까이서 마주 보기는 처음이다. 손을 내밀어서 잡아보려고 한다. 분명히 내 손에 들어와서 몸에 들어왔는데 다시 보니 없다. 조바심은 종종 걸음으로 달려가 목을 낚아챈다. 다시 무지개의 빨주노초파남보는 내 속에 들어온다. 지나간 자리에는 어둠만 고요하다.


한 평생 살면서 행복은 편안한 삶이라고 생각했다. 끼니 안 굶고 자식 잘 낳아서 교육 잘 시키고 고약한 병에 안 걸리고 오래 살고 집도 남보란 듯이 삐까번쩍하고……. 이걸 행복하지 않다고 말하는 자가 있나. 하긴 그런 놈들 중에는 권태에 못 이겨 행복의 사지를 찢는 자도 없지는 않지만 말이다. 그래도 자질구레한 항목에 신경쓰지 말고 전체를 보는 눈이 있어야지.


행복은 무지개처럼 손에 잡을 수 없는 환상이란 말인가.

무지개의 등을 타고 내려오다 보니 드디어 무지개의 밑이 보이기 시작한다. 입구와는 달리 무지개의 밑은 아무런 등도 없이 어둡다. 어디다 발을 디뎌야 할지 두려움이 몰려온다. 그냥 어둠의 나락 속으로 떨어져 죽는 것은 아닌가 생각하니 소름이 돋는다. 우와좌왕하고 갈피를 못잡는다.


갑자기 땡고함 소리가 들린다. 거의 악에 바쳤다. 아까 보았던 매미이다. “야이 바보야, 무지개 밑은 낭떠러지야. 내가 말했잖냐, 낭떠러지를 보면 무조건 몸을 날리라고. 조건이 있어. 네 몸에 무게 나가는 건 다 버리고 날려야지 안 그러면 정말 즉사한다.”


매미 소리 믿고 여기까지 온 주제에 에라 모르겠다 이판사판이라고 하고 몸을 던진다. 어라 진짜 매미 말대로 몸이 중력을 받아 수직 낙하하는 것이 아니라 둥둥 떠다닌다. 한참을 그 짓을 하다가 멀리서 매미가 단말마의 소리를 지르는 것이 들린다. 아니 무지개의 밑은 다름 아니라 내가 올라오던 고갯길이란 말인가. 이건 분명히 매미가 내게 득도하라고 보낸 메시지가 틀림없다. 나는 고갯길을 매미의 땡고함 소리를 작별하면서 내려간다. 분명한 건 내 속에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이다. 내장도 다 떼어버렸나보다.


다이닌 가타기리 선사 말처럼 무지개 입구는 ‘그저 옴’이요 무지개 밑은 ‘그저 감’이다. 무지개는 ‘그저 옴’에 한 발을, ‘그저 감’에 한 발을 걸치고 있다. 나는 한 평생 무지개 등위로 오르락내리락 하면서 빨주노초파남보만 주무르다가 가는구나.(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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