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촛불의 미학』 가스통 바슐라르

by 현목

『촛불의 미학』은 제가 프랑스어를 잘 모르지만 아마도 원제는 ‘촛불’ 같습니다. 말하자면 의역을 한 셈입니다. 페이지 수가 142쪽의 소책자이나 내용이 저의 실력으로 감당하기에는 쉽지가 않았습니다. 바슐라르의 원본은 그가 죽기 일 년 전에 나왔다고 합니다. 우리나라 번역본의 초판은 1975년이고 2판이 2001년입니다. 번역자이신 이가림 교수는 2015년에 돌아가신 것으로 나옵니다. 내용이 어렵다 보니 다른 분들은 어떻게 이해하나 보려고 인터넷으로 검색해 보니 의외로 내용이 빈약했습니다. 『촛불의 미학』의 내용 일부만 인용하고는 개인적인 말만 덧붙이고 있었습니다. 몇몇 사람은 2016년의 ‘광화문 촛불’을 여기에다 적용시키는 걸 보고 경악했습니다. 그 ‘촛불’은 정치적 의사 표시의 상징이었으나 바슐라르의 ‘촛불’은 시적 상상력과 인간 본성의 승화를 상징하는 표징(表徵)으로 사용했던 것입니다.


바슐라르는 프로필이 예사롭지 않습니다. 1884년 프랑스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는 고등학교를 마친 뒤 우체국에서 일하면서 독학으로 이공계 대학 수준의 공부를 마쳤다고 합니다. 나중에는 소르본느 대학 교수로 재직하였으며 1962년 78세의 나이로 사망합니다.


대부분은 바슐라르를 시인이요 평론가 정도로 알고 있는 것 같습니다만 그는 본래 전공이 과학철학자였습니다. 그것도 가장 중요한 현대 철학자 중의 한 명이라고 했습니다. 그는 “과학의 결함을 시로 메우고 시의 결함을 과학으로 배워야 한다”라고 말했습니다. 다시 말해 정신의 산물로서의 과학과 혼의 산물로서의 시라는 두 개의 극 사이에서 참다운 존재의 모습을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바슐라르가 이 책에서 말하려는 것은 몇 가지 있습니다. 시적 상상력이 무엇인가 하는 문제와 그것을 상징하는 촛불에 대한 정체성에 대해 설명합니다. 그 촛불에는 ‘고독’과 ‘수직성’이라는 특징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촛불이 상상력을 일으키는 메카니즘을 설명합니다. 뒤에 가면 그러한 시적 이마주, 상상력의 예로써 식물의 꽃과 램프를 가지고 현실의 작가의 작품을 인용합니다. 시인 즉 몽상가란 어떠한 사람인가라는 것을 이야기하고 맨 마지막에 가서 에필로그에서 바슐라르는 「실존의 책상」이라는 말을 하면서 글쓰기가 존재의 이유라고 말을 맺습니다. 이 부분이 저에게는 많은 격려와 용기를 주었습니다.


바슐라르는 상상력을 일으키는 방법에는 두 가지가 있다고 했습니다. 하나는 새로움에서 비약을 찾는 것, 즉 아름다움이나 다양함, 예기치 않은 사건입니다. 다른 하나는 존재의 근원을 파고 들어가 원초적인 것과 영원적인 것을 찾아냅니다. 전자를 「형식적 상상력」, 후자를 「물질적 상상력」이라고 했습니다. 이들 중에서 ‘물질적 상상력‘이 중요하다고 강조했습니다. 바슐라르는 네 개의 기본 물질 이른바 4원소 즉 물·불·공기·흙을 물질적 상상력의 근본이라고 했습니다. 따라서 인간의 몽상은 본질적으로 물질적인 것입니다.


바슐라르는 물질적 상상력의 예를 듭니다. 강이 흐른 곳에서 태어난 사람은 물에 의해 그의 무의식이 지배됩니다. 저의 경우는 어린 시절 부산의 범오동 매축지가 저에게 몽상을 일으키는 물질인 것입니다.


바슐라르는 왜 상상력을 나타내는 표징으로써 촛불을 들었을까요? 촛불은 상상력과 기억력이 일치하는 세계로 이끌어 가서 우리로 하여금 몽상하도록 한다는 것입니다. 촛불은 혼자 타면서 혼자 꿈꾸는 인간 본래의 모습을 나타냅니다. 우리가 상상하는 모습을 촛불의 불꽃을 통해서 볼 수 있습니다. 바슐라르는 “불꽃은 몽상가에게 있어서 스스로의 생성에 마음을 빼앗기고 있는 존재의 상징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촛불은 백지의 페이지의 별이다”라는 말은 그야말로 우리로 하여금 상상하게 하는 모습을 강렬하게 나타내는 문장입니다.


촛불에는 두 가지 특징이 있다고 바슈라르는 말합니다. 하나가 고독입니다. 촛불은 혼자 타며 스스로 연료를 마련하고 다 닳아 없어질 때까지 혼자 고독하게 불꽃으로 탄다고 했습니다.


고립된 불꽃은 불꽃과 몽상가를 일치시키는 고독입니다. 촛불은 혼자 탑니다. 사람도 상상을 한다고 해도 타인과 함께 하는 것이 아니라 촛불처럼 혼자서 합니다.


다른 하나는 촛불에는 수직성이 있습니다. 비주네르가 말한 것처럼 불꽃은 ’가치‘의 지평을 엽니다. 여기서 가치는 빛입니다. 의식과 불꽃은 같은 수직성의 운명을 가지고 있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수직성의 몽상을 쌓음으로서 초월을 알게 됩다고 합니다. 사람들이 가치의 물리학의 지배 아래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사실의 물리학의 지배를 떠나야 한다고 바슐라르는 말합니다. 촛불의 천정을 향한 수직적 상승은 우리의 삶의 상징적 메아리가 우리를 승화시키는 아우라인 것입니다.


촛불이 어떤 기전(mechnism)으로 우리에게 상상력을 불러일으킬까요? 우리가 촛불의 불꽃을 응시하고 있으면 불꽃은 우리들을 일상으로부터 떼어 놓고 몽상의 세계로 이끕니다. 시인이란, 불꽃처럼 자신의 존재를 잃어버린 채 꿈꾸기 위해, 몽상하기 위해 떠나갑니다. 이마주(image)를 몽상 속에 넣기 위해서는 촛불의 주위처럼 이마주에게 애매함의 안개를 둘러싸야 합니다. 우리들의 먼 추억 속에서 촛불의 불꽃은 기억의 몽상을 불러일으킨다고 했습니다. 불꽃의 소리에는 냇물의 흐림이 와 닿고 불꽃은 추억을 몽상합니다. 따라서 불꽃은 창조입니다. 그때 불꽃은 사물을 시화(詩化)시키는 실체가 되는 것입니다. 오직 시적 언어만이 언어의 위대한 승리이고 진실로 자유롭고 창조의 세계로 이끕니다. 꽃의 색깔은 불의 현현이며 꽃은 빛의 실재화인 것입니다. 다시 말해 꽃들의 세계 앞에서 우리들은 확대된 상상력의 상태에 있다고 합니다. 바슐라르가 말했습니다. “「살아 있는 물건」이라는 말이 모든 것을 결정한다. 몽상가는 이 「살아 있는 물건」이 빛을 만들어내는 것을 알고 있다. 그것은 창조하는 피조물이다.” 너무 감동적인 문장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살아가면서 만나는 ’죽어 있는 사물‘은 우리의 촛불 같은 상상력에 의해 ’살아 있는 사물‘이 되어 우리를 보다 나은 혼의 세계로 인도하기 때문입니다.


바슐라르는 촛불을 불꽃을 통해서 사람이 상상력을 일으키는 예를 작가의 작품을 통해서 소개합니다. 식물의 꽃과 램프를 가지고 작가가 어떻게 상상하여 표현하는지를 예로써 보여줍니다. 우선 불꽃으로서의 꽃의 시적 표현의 예를 봅니다.


①하늘은 저물고 마로니에 나무는 타고 있다.(장 부르데예트)

②불도 장미도 하나의 것.(T.S. 엘리엇)

③제라늄의 불이 석탄을 빛내고 있다.(피에르 드 망디아르고)

④수레국화가 보리밭에서 전류처럼 일어서고, 수확하는 여자들을 용접 램프의 불꽃처럼 위 협한다.(룬트크비스트)

⑤만들어지는 컵이 유리를 붓는 판 끝에서 마치 색깔이 변하기 시작한 수국의 산방화서(繖 房花序)와도 같이 장밋빛 으로 혹은 파란색으로 흔들리고 있다.(다눈치오)


다음에는 램프의 몽상의 예를 보겠습니다. 램프는 모든 추억이 있는 곳입니다.


①이 주의 깊은 램프와 저녁이 상의하고 있다.(레옹 폴 파르그)

②석유의 램프의 빛, 설명하고 훈계하며 자기 자신과 의논하는 빛, 그것은 아무도 오지 않 을 것이라고 내게 말한다.(옥타비오 빠즈)

③소금처럼 스며드는 침묵이 램프를 울리고 있었다.(로제 브뤼셰)

④지속되는 행복에/방은 놀란다(조르주 로당바크)

⑤램프의 뒤에 그 혼이 있었다. 내가 되고자 했던 바로 그 혼이.(앙리 보스코)


시인 즉 몽상가는 어떤 사람인가요? 촛불의 불꽃처럼 몽상하는 사람은 잠재적 시인입니다. 몽상가는 상상력에 의해 언어를 확대시킵니다. 그리하여 몽상가는 심령 자체가 확대되고 높아집니다. 그는 죽어 있는 사물의 무의함을 극화시킵니다. 그리하여 무의미한 사실에 의미를 주고 불꽃의 수직성처럼 그는 자신을 승화시키며 그 자신도 곧바로 서야 함을 배웁니다. 몽상가는 몽상 속에서 존재의 안녕을, 혼의 평안함을 얻습니다. 바슐라르가 말합니다. “시인으로서의 몽상가는 모든 아름다움의 후광 속, 비현실의 현실 속에 살고 있다. 시인, 즉 말을 통해 그리는 화가는 자유의 위력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그는 꽃을 말하고 꽃을 이야기해야 한다. 그때 그는 언어의 불꽃에 의해 꽃의 불꽃을 드러내는 것을 통해서만 꽃이라는 것을 이해한다.” 하늘을 몽상하는 시인은 꽃 속에서 하늘의 색깔을 발견한다는 것입니다.


바슐라르는 에필로그에서 시인이라는 글쓰기는 그의 존재의 이유라고 했습니다. 램프에 의해 비춰진 책상 위의 백지의 페이지에는 고독이 펼쳐집니다. 백지의 페이지는 건너야 할, 결코 건너보지 못한 광대한 사막이라고 했습니다. 백지의 페이지는 사람들이 글을 씀으로써 참으로 존재하기 시작하도록 합니다. 글을 씀으로써 살기 시작한다는 것, 고독의 거대한 밤샘을 통해 시인은 살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바슐라르가 말합니다. “존재의 계단을 나선 모양으로 한 계단 한 계단 내려갔었다고 나는 생각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내려감에 있어서, 스스로 생각한다고 하면서 사실은 몽상하고 있었던 것임을 이제야 나는 안다. 존재는 아래쪽에 있지 않다. 그것은 위쪽에, 언제나 위쪽에-분명히 활동하고 있는 고독한 사고 속에 있다. .. 그렇다. 내가 최대한의 실존, 팽팽한 실존-앞을 향하여, 보다 앞을 향하여, 또 그 위를 향하여 긴장되어 있는 실존을 알게 되는 것은 나의 「실존의 책상」에서이다. 내 주위의 모든 것이 안식이며 조용함이다.”


바슐라르에게 있어서 산다는 것은 생성하는 것, 순간순간마다 새로운 미래를 획득하면서 진행하는 창조의 과정이었습니다. 그는 과거조차도 고정된 불변의 실체가 아닌, 「하나의 항구적인 이마주」, 도달해야 하는 하나의 미래로 보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는 자신의 사람을 소재로 하여 상상력과 언어를 통해 끊임없이 삶을 재구축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마치 자기 스스로를 소재로 하면서 빛을 얻기 위해 항상 위를 향해 타고 있는 촛불의 불꽃과 같습니다.


바슐라르가 한 말들을 직접적으로 혹은 간접적으로 길게 많이 인용했습니다만 저에게는 감동적인 말입니다. 비록 시시껄렁한, 시를 시답지도 않게 쓰고 있는 처지이지만 저의 시작(詩作)의 의미의, 논리적 근거를 바슐라르가 제시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 책의 내용을 한마디로 요약하는 것이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 책을 읽으면서 제 머리 속에 떠나지 않는 의문이 하나 있었습니다. 바슐라르도 전혀 차원이 다른 두 대상을 비현실적으로 연결하는 상상력을 말합니다. 이것은 저 개인적으로 관심을 많이 가지고 있는 메타포에 다름이 아니지 않은가 하는 말입니다. 희한하게도 이런 것을 바슐라르는 메타포라고 꼬집어서 말하는 것은 볼 수 없었지만 저로서는 메타포라는 생각이 지워지지 않았습니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쥐구멍에도 볕들 날 있다